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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Mar 10. 2020

정의란 마른기침

센델 선생의 조언을 들었지만


의자가 사연을 말할 수 있었다면 고약한
경험을 쏟아낼 게 뻔했다



오래전 유럽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비행시간이 14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다행히 복도 쪽에 앉아 그다지 불편을 겪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 갈 경우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은 화장실 앞에 서 있는데, 어떤 외국인 남자가 들어간 지 20분이 넘었는데도 나오질 않았다. 약간 얼굴에 살이 찐 미스터 빈 같이 생긴 남자였다.

한번 문을 노크해볼까, 다섯 번쯤 생각하던 순간에 남자 승무원이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이
문을 두드려줬다. 그는 그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벌떡 문을 열고 나왔다. 약간의 겸연쩍어하는 표정이 묻어있었지만, 이내 항공기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 자신의 좌석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장실은 난장판이었다. 공중도덕의 반대급부를 보여주는 가르침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무원을 부르려고 하다가, 유난을 떨고 싶지는 않아 대충 정리하고 볼일을 보고 나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앞자리의 남자가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혀놓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족히 100킬로그램은 넘어 보이는 거구였다. 의자가 사연을 말할 수 있었다면 고약한 경험을 쏟아낼 게 뻔했다. 유격의 새로운 종목을 통과하듯, 자리에 앉았지만, 이내 의자와 그의 뚱뚱한 몸이 세트가 되어 압박해 오는 거북함에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뒤에 사람이 있다면 조금 배려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의자가 젖혀질 수 있는 만큼 눕는 것도 돈을 주고 좌석을 산 그의 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이내 포기의 감정이 밀려왔다.
밀려왔다기보다는 잽싸게 힘없는 분노와 자리를 바꾼 셈이었다.

그때 마침 나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센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미덕이라는 철학의 세 지향점을 토대로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애써 센델 선생의 가르침을 이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공리주의자였다면, 아마도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행기의 좌석을 완전히 뒤로 젖히는 것은 대부분의 승객이 장시간의 여행을 위해 반기는 것이므로, 남을 배려한답시고 애써 불편을 감수하는 승객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찌그러져 있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경향성과 욕구를 기반으로 사회의 법칙을 정하자는 공리주의 반대편에 선 자유주의자 칸트라면 어땠을까.
스스로 세운 준칙을 보편화하라는 정언명령에 따른다 해도 반쯤의 승객이 의자를 젖히고 누운 상황에서 무엇이 보편인지 누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델로스적 관점에서, 의자의 목적은 승객의 편의제공을 위한 것이므로
승객이 편하게 여행하는 것은 목적에 맞는 보상의 차원에서 미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노철학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말씀하실지 모를 일이다.
책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굳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센델은 그 선해 보이는 눈으로 조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센델은 도덕이 법과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최근의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미덕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인간을 선으로 이끌어가는 지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특유의 아카데믹한 어조로  말한다.

마지막 장을 읽고 그 거구와 조심스럽게 대화를 통한 타협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역시 언어가 문제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지난한 생각의 과정과 입장을 무슨 수로 타국의 언어로 장황하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요즘 같은 상황이었다면,
마른기침 몇 번이 정의를 구현할 수도 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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