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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Aug 27. 2020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

카뮈의 페스트를 읽다가


 이 사태가 만든
가장 큰 흉흉함일 것이다.


한강의 물색깔은 병명을 붙여주기를 기다리는 환자처럼 보인다. 강물은 어느순간 수변공원을 대부분 잠식했다. 암녹색과 푸른회색이 뒤엉킨 물빛은 그대로 팬데믹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 하다.

한강을 옆에 끼고 달리면서도 어두운 상념을 덜어내지 못하는 건 지금 잡고 있는 카뮈의 <페스트> 때문일 것이다. 오랑의 의사 리유처럼 지식인의 관조 같은 것을 더이상 유지하지는 못하리라.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는 이는 플롯을 상상하는 카뮈도 책을 덮으면 사라질 소설속의 주인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휴가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강원도의 호텔을 예약했다가 2단계로 격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취소해버렸다. 다행히 수수료 없이 취소가 되었다. 집에서 책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에도 한계를 느꼈다. 어떤 장면이나 문장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루해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순간 배부른 투정이란 걸 안다.


얼마남지 않은 휴가를 위해 양수리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차의 그릴에도 마스크를 씌워주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이라기 보다는 태풍으로 인한 우중충한 날씨와 병원균이라도 머금은 것 같은 산란광 때문에 어떤 물건도 정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수변공원은 삶이 떠난 자리였다. 그곳에는 분명 얼마전까지 사람들이 활보했고 매점에서 라면도 사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물로 뒤덮여 있다. 분명 나무들도 침수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다. 가끔씩 화창한 주말이면 강변의 공터에서 야구동호인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기도 했더랬다. 그리고 손에 꽉 쥐어지는 조그만 야구공은 여유와 평화의 상징처럼 하늘 높이 치솟곤 했다. 지금은 어두운 물만이 가늠할 수 없는 수량을 이끌고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마치 주둔군처럼 머무르고 있다.

아주 간헐적으로 들르는 빵집이 있다. 강변에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보이는 풍광이 좋다. 강 맞은 편으로 보이는 소박한 건물들과 마치 고래의 등처럼 솟아오른 푸른산은 복작이는 마음을 와해시켜 주곤했다. 커피 한잔은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조금씩 녹였다.

차를 몰고 그곳에 갔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일군의 어르신들이 앉은 자리가 자꾸 마음에 쓰였다. 내안의 분리주의 같은 게 살아나는 것이다. 정치적인 단어들을 언급하는 그분들에게 광화문의 태극기를 연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 그곳에서 악다구니를 쓰고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다시 한번 동여매는 내 손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종점에 다다르는 거북이를 본 토끼만큼이나 황급히 커피와 빵을 사서 나오려고 했다. 알바인지 사장인지 계산하는 속도는 한가롭기 그지 없다. 마치 한강의 머무르는 게으른 물처럼.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건 내 마음이 만들어낸 속도다. 타인들을 자꾸만 어떤 잘못된 일의 원인으로 바라보게 하는 하는 것은 이 사태가 만든 가장 큰 흉흉함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러한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은 도저히 벗을 수 없는 혐오와 차별의 방어막을 두세겹씩 끼고 있는데.

그럼에도 강변의 가드레일을 붙잡고 있는 잡풀들이 어느 때보다 악착같아 보인다. 도로변의 허름한 간판들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이름 하나씩을 굳건하게 붙들고 있다. ‘세계속의 경기도’라는 플래카드가 포스트 코로나의 미래 만큼이나 허망하게 보일지라도 누군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밝은 햇살과 함께 북적이는 인파들이 만드는 주말 강변의 파라다이스를.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끝없는 절망도 헛된 희망도 아니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경제가 붕괴돼 가루가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우리 삶은 정비된 도로에서 신호등을 따라 유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도 오랑의 의사 리유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섣부른 희망이나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성실함이라는 실존적인 무기밖에는 없을 것이다. 환란의 시기에 금을 모으듯 각자가 가진 성실함을 내어놓을 수밖에.

성실하게 마스크를 끼고 성실하게 거리두고 성실하게 방역당국에 협조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꼼꼼한, 그래서 공동체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악의 성실함에 성실하게 대항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도덕책에서 꺼내 당연히 탑재해야할 여러 사회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복잡한 현실을 무시한 문학적이고도 순진한 대안일지라도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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