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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Dec 29. 2023

겨울강

그 앞에 마주 서서

겨울강을 보고 싶어 드라이브를 나섰다. 목적지는 남양주 어딘가. 정해놓은 곳은 없다. 그저 차를 몰고 가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 바람이 제법 매섭다. 얼굴을 향해 작은 눈가루를 뿌려댄다. 목도리를 두르지 않았더라면, 깃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얼굴에 허옇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마치 어느 겨울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속 여행자처럼.


언 강을 바라보다, 뜨거운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주위를 찾아보니 편의점 하나 없다. 좀 전에 지나온 길에 있었는데, 커피를 사려면 한 2킬로미터는 돌아가야 한다. 이 풍경이 아깝지만, 잠깐의 시간이 흘러가도 지금 느끼는 감정의 풍경은 다시 못 볼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그보다는 빨리 이 감정과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섞여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지만 겨울강은 내 눈앞에서 완성된다. 사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겨울강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당연히 따뜻한 차 한잔이 필요한 것이고.


차를 돌려 편의점으로 되돌아갔다. 가던 방향에는 가까운 거리에 편의점이 없는 것 같아서. 편의점도 눈을 푹 뒤집어쓴 바위 같은 모양새다. 그 눈을 헤치면 따뜻한 공간이 나올 테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앳땐 표정의 여점원이 인사를 한다. 그녀는 추운 자에게 건네지는 따뜻한 라테 같은 미소를 보여준다. 다행이다. 무뚝뚝한 직원이 아니라서. 사람의 표정은 얼마나 추위를 녹일 수 있는가.


갑자기 영화 <철원기행>이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본 적도 없는데.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으로 최고의 데뷔작이라고 추켜세웠다는 그 영화. 제목에서 백설에 뒤덮인 배경이 생각날 지경인데, 역시 포스터도 그런 그림이다. 방에다 걸어놓으면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갈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온장고에서 가장 따뜻해 보이는 커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커피가 아니라 그 온기를 사는 셈이다. 커피맛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다시 차로 돌아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시동이 걸린 차에 뜨거운 기름이 돌 듯이, 내 몸에도 새로운 기운이 돌고 있는 것 같다.


차를 몰아 좀 전에 보던 강을 찾아간다. 강은 그곳에서 얼어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당분간 아무도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눈앞을 온통 흰색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눈이 사람들이 강을 찾지 못하도록 감출 테니까. 눈은 어떤 살아있는 것의 의지를 지닌 듯, 어떤 명령에 따라 움직이듯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겨울강의 나무들은 죄인들처럼 침묵으로 도열해 있지만,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춘다. 이 겨울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이런 겨울이 오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나누는 사랑 같은 것. 서로가 가진 것들을 내어주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 숭고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랑이란 몸과 영혼의 중간단계에 있는 실물을 끄집어내어 서로 섞어대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을 열고 눈이 내리는 강을 바라보고 싶다. 만약 겨울 강속에 빠진다면, 정말 잘 벼린 칼 수천 개가 나를 찌르는 느낌이 나겠지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온다. 옆사람을 꼬옥 껴안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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