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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Jun 28. 2016

44번 국도는 낭만로드

길은 그 존재로서 아름다움을 빛낸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미세하게 늙었음을 느낀다



서울에서 속초로 갈 때면 44번 국도를 이용한다. 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까지 와서 자연스럽게 44번 국도로 갈아타는 것이다. 44번 국도는 언제 가도 낭만적이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아니면 눈부시게 맑은 날이건, 길은 그 존재로서 아름다움을 빛낸다.      

안타깝게도 최근 이 도로는 교통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서울과 양양을 잇는 고속도로가 생기면 도로는 더 한적해질 게 뻔하다. 이곳에서 생계를 꾸리는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 한적함 때문에 이 도로를 좋아한다. 쫓아오는 차가 없거나 앞서가는 차가 한참 동안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길 하나가 온통 내 것인 양 질주본능이 인다. 물론 이곳은 드넓은 아메리카가 아니다. 결국 어딘가에서 오순도순 모이게 되지만, 그래도 그 잠깐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로변에 도열한 허름한 쉼터와 쉼 없이 등장하는 휴게소, 소박한 식당들은 저녁해가 지는 시간이면 휘황한 불을 밝히고 저마다의 사연으로 도드라진다. 하지만 자기를 봐달라고 켜놓은 총천연색의 불빛들이 오히려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차들과 사람들은 빠르게 그 가난한 풍경을 지나치고 오롯이 길만이 남아 노변의 가게들이 털어놓는 애환을 들어주고 있다. 묵묵히 길답게.



밤이 되면 드문드문 만나는 신호등마저 반갑다. 도로의 불빛들은 점점 야위어가고 풍경은 그만큼 어둠에 잠식당한다. 차를 몰고 컴컴한 도로를 한참 동안 가다 보면 알게 된다. 불빛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44번 국도 주변의 산은 외롭지 않다. 산 주변에는 누군가 모여 촌락을 이룬다. 아롱거리는 불빛들이 그 사실을 일러준다. 마을에 오래전 안주한 사람들과 불친절한 주유소의 직원까지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깊은 곳까지 흘러왔을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살았을 사람, 파산하여 식솔과 함께 찾아든 가장, 산과 강의 끌림을 받은 사람, 어딘가 몸이 심하게 상한 작가까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직선의 길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참는다. 허락된다면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강의 지류처럼 찾아가고 싶다. 그곳에서 한 사나흘 묵으며 고지대의 서늘한 공기를 폐 속에 수북이 담고 싶다. 처음 보는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이다 케케묵은 사랑 타령이 늘어진다 해도 귀 활짝 열어 들어줄 채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내 여정은 서울과 보이지 않는 강철 레일로 연결되기라도 한 듯 예정된 행로를 벗어나 주지 않는다. 주춤거려봤자 상처만 깊어질 뿐.



여행이 길어지고 몸이 피곤해지면 빠르게 스쳐가는 차 안에서 가끔씩 동공이 고장 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감각은 사물을 버리고 환영을 끌어안는다.



44번 국도에서 갈라져 속초로 가는 길. 설악의 울산바위는 우주에서 떨어진 거대한 생물의 등껍질 같이 솟아 있다. 서늘한 바위들은 기립해 방문자를 환영한다. 저녁놀이라도 보이면 최종 목적지로서의 바다는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설악의 소나무들은 곧고 우렁차다. 나무들이 모여 함성을 지른다. 숨어있는 꽃과 차들도 그 함성에 조그맣게 주눅 든다. 숲을 걸으며 나는 건강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 느낌을 고체 같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싱싱한 나뭇잎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에 가 닿는 곳. 속초의 바다에서 생각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온갖 잡일과 해결해야 할 일들과 불안과 걱정이 난지도처럼 쌓여있는 곳이라 해도, 떠나온 뒤 마음 한켠에서 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해도 바로 여행지의 시간이 빛나는 이유인 것을.



여행에서 돌아오면 어딘가 미세하게 늙었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정신적 성장이라고 자부했지만, 잠깐 동안 찾은 자유에 대한 시간의 형벌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청춘의 환영, 젊은이에게 만 보이는 존재지, 흐르는 시간 속을 여행한단다"라는 메텔의 말처럼 더 이상 환영은 보이지 않고 내 젊음의 촉수는 저녁놀처럼 소멸해 간다. 생각해보면 가슴 아프고 참 쓸쓸한 일이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차피 밥을 아무리 먹어도 늙게 되어있는 몸.

 나도 기꺼이 흐르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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