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원, 그들이 행복하게 콜라보하는 방법
자존심 센 예술가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이종격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인상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태어나고 있다.
오래전 일이다. 양수리 근처에 사는 도예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강을 끼고 차를 몰고 가는 내내 쇼스타코비치를 들었던가 심수봉을 들었던가 아무튼 뭔가에 한껏 도취되었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만난 도예가의 공방은 풀이 무성한 곳이었다. 낭만적이었으며 동화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곳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마주한 도예가는 행복의 손을 잡고 있다는 듯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잘 벼린 부메랑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돈벌이에 매진했다.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예술과는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왔다. 삶은 잊을 만 하면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성 잽을 날리기도 했으니까.
성석진 작가가 여주에 공방을 차린 시기가 아마도 그때쯤인 것 같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예술과 ‘바른생활’ 사이의 외줄을 타고 있던 시절. 도쿄에서 돌아온 그는 외딴곳에 들어가 깊이 있는 도자기를 구워냈다. 청화와 철화의 소품부터 달항아리까지 작품의 스펙트럼 또한 넓었다. 나는 또 한 번 흔들렸지만 역시나 그를 응원해주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또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네 명의 작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성 작가의 도자기에 세 명의 화가가 협업한 작품을 들고 왔다(그들은 도화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살짝 질투가 났다. 그들의 작품보다 그들의 생기있는 활동과 그들이 예술로 살아가는 방식에.
도화원(陶畵園)을 풀이하자면 도자기에 그림이 무성한 동산이다. 사진으로 본 네 명의 예술가는 그곳에서 즐거워보였다. 딱히 목적에 메여 일을 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각자 자리를 잡은 중견작가들이 그처럼 부담 없이 놀면 도대체 어떤 작품이 나오는 것일까.
느껴보지 못한 설렘, 새로운 것을 만들다
도화원에서 성석진 작가는 캔버스를 제공한다. 세 명의 화가가 노닐 수 있는 공간이다.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를 캔버스로 쓰라고 내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다(대학에서 성 작가와 함께 도자기를 공부했지만, 내가 그의 작품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그는 공방의 문을 굳게 닫아걸지도 모른다). 세 명의 작가는 물론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다. 자존심 센 예술가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이종격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인상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태어나고 있다.
맏언니격인 송인옥 화가는 평면에 추상화를 그리지만, 도자기에는 자연의 서정을 묘사하려고 한다. 흙의 성질이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소재마저 바꿔놓은 것이다. 화가는 추상으로 구현하던 보편적인 감성보다 자연이 일으키는 작은 감정의 동요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흔들림>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넉넉한 그릇 속에 가득한 붓 터치는 나뭇잎을 통해 자연의 생기를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그 생기가 가마가 열리기를 바라며 갖는 설렘에서 나왔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시간을 들여 흙을 굽는 행위를 몰랐다면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마음의 흔들림일 것이다. 이는 송 작가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초벌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서 구워내는 시간을 기다릴 때는 늘 설레고 걱정스러워요. 그래서일까요? 간혹 성 작가님이 애써 만든 도자기를 망쳤다는 자괴감도 들지만 ‘내 도자기가 이렇게 화사하게 변할지 몰랐다’는 그의 격려에 아이처럼 기뻐한답니다.”
도화원의 또 다른 멤버인 이정은 작가는 평범한 일상을 ‘이정은 월드’로 만든다. 그 세계는 잔잔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독특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 친밀한 독특함이 도자기와 만났다. <제각각>이란 작품에는 도심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 가득하다. 딸기, 체리, 석류, 사과 등등, 작가의 말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도자기 위라 생동감은 더하다. 나와 다른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경계를 허무는 콜라보레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자존심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강력한 힘이지만, 그것을 다독여 타자를 품었을 때, 또 얼마나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내는지 성 작가의 도자기 화폭에 그려낸 이정은 작가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주위의 사물들이 들려주는 이음(異音)을 세상과 이어보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는 도화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김현지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도자기에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새로운 미디어 분야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서는 디자인과목을 가르쳤고 논리적인 사고에 치우쳐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도자기는 자신에게서 잊혀지던 동양화의 감성을 다시 살려낸 소중한 매개이다. 계기는 어느 날 본 예원학생들의 전시회였다. 학생들의 작품에 반해 그들을 가르치던 성석진 작가에게 도자기를 배우고 도화원 모임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안빈낙도> 시리즈에는 현대인의 이상적인 자화상이 담겼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다. 캔버스를 벗어나 머그컵을 떠다니는 ‘집배’는 그 자유를 얼마나 가까이서 만끽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갤러리의 벽면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지는 찻잔의 표면에서도 우리는 김현지 작가의 예술적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도화원에서 놀고 있는 이유
요즘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작가들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중에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지시와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일도 있다. 거대한 자본이 있기에 가능하며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도록 구조화된 것이다. 도화원은 어떤가?
“우리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해요. 두 작가가 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죠. 마치 두 명의 가수가 듀엣곡을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도화원의 작업을 정의하는 그들의 말처럼 예술가들이 행하는 합작의 중요한 가치는 교감이며 교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빠져있는 결과물에서 볼 수 있는 건 그럴듯한 허물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소설가를 모셔놓았더니, 한 시간 내내 먼저 말 거는 이가 없었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한 합작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도화원의 작가들은 자신들과 같이 협업을 하는 후배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는 단지 침체된 미술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의 본령 중 하나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닌가. 인식의 경계, 사고의 경계, 그리고 삶의 경계를. 많은 사람이 꾸는 꿈은 실현될 확률이 높다. 네 작가의 꿈은 개인을 넘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지향점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예술사의 획을 그은 문화운동들도 작은 공방에서 시작한 예가 있듯이 언젠가 이들 네 작가의 실험적인 활동에 많은 예술가가 참여해 우리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그들이 멈추지 않고 도화원에서 놀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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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원전
12월 6일~20일 갤러리가비
서울시 종로구 윤보선길 69 2층 T:02-735-1036
http://www.gallerygabi.com/
12월 6일 오프닝 시간 오후 5시(월요일 휴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