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패스트'하지 않은 우리 엄마의 패스트푸드
맛의 기억은 우리 뇌에서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오래간다고 믿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맛 자체라기보다는 그 음식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한 입 베어 물며 공중에 호호 입김을 날려 보내며 먹는 과정, 그때 나누었던 웃음까지 그 상황이 나의 뇌에, 내장에, 마음속에 콕 자리 잡는다.
2020년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리고 2024년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금도 나는 엄마의 음식 중 8살 때 먹었던 엄마표 첫 번째 패스트푸드가 너무나 그립다. 우리 엄마의 필살기인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담백한 단짠의 결정판 갈비찜도 생각나지만, 엄마에게도 큰 도전이었던 그 패스트푸드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심지어 30년 넘게 그다지 기억 속에 있지도 않다가, 임신만 하면 그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도 너무 신기할 뿐이다.
우리 엄마의 첫 번째 패스트푸드는 식빵 피자.
내 인생 처음 맛본 미국식 피자 '피자헛'이 초등학교 6년 때였으니, 그보다 한 참 전인 8살 때는 피자헛이니 맥도널드니 하는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우리 엄마의 첫 식빵 피자 레시피는 대략 이렇다.
먼저 양파를 잘게 다진 후 기름을 살짝 두른 프라이팬에 연한 갈색이 날 때까지 볶는다. 그리고, 전 국민의 소스인 케첩을 자작하게 부어준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이 타이밍에 토마토퓌레나 피자 소스를 부어줘야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토마토케첩 = 토마토소스" 였기에 그 마저도 마법처럼 보였다. 빨간 소스라고는 떡꼬치 소스 밖에 몰랐던 초등학생 눈에는 더더욱!
다시 식빵 피자로 돌아와서, 엄마표 토마토소스(aka. 케첩 소스)가 완성되면 뽀얀 식빵을 한 장 꺼낸다. 토스터기며 에어프라이어도 없던 시절이니 마른 팬에 식빵을 살짝 굽고, 엄마표 소스, 동전 모양으로 송송 썬 프랑크 소시지와 그 시절 내 눈엔 맛도 모양도 까만 타이어 같았던 블랙 올리브, 통조림 캔에 들어있는 달콤한 옥수수를 몇 알 올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잔뜩 올린다. 사실 모차렐라 치즈가 좀 비쌌던 터라, 노란색 서울우유표 체다 치즈를 자주 올렸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모양을 갖춘 식빵 피자는 다시 팬으로 직행. 아주 약한 불에 치즈가 녹을 때까지 데우면 끝이다. 그러고 보니 토스터기도, 에어프라이어도, 미니 오븐 따위도 없던 그 시절, 우리 엄마는 팬 하나로 모든 걸 해내는 인간 멀티 쿠커였다. 이 정도면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내던 상계동의 미시즈 발뮤다며 미시즈 필립스는 우리 이여사의 몫인데 말이지.
그렇게 5분 정도 프라이팬 뚜껑에 이슬처럼 김이 서리면, 배고픈 삼 남매 뱃속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프라이팬 채로 상에 올려 엄마가 가위로 서걱서걱 공평하게 잘라주기만을 기다린다. 엄마표 식빵 피자! 이 특식을 먹는 날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주방의 마법사였고, 여신이었다.
거창한 아일랜드 형 주방도 아니고, 가스레인지 옆 50cm 정도 될까. 도마 하나 놓고 양념 몇 가지 놓으면 이미 넘쳐나는 작은 작업대가 전부였던 우리 엄마의 주방. 그 작은 주방에서 우리 엄마는 여섯 식구가 먹을 음식을 삼시 세끼 차려내고, 한창 먹성 좋던 삼 남매에게 특식을 주기 위해 외제 간식까지 만들어냈다.
미국에서 살림을 시작해 그때 엄마의 주방보다 최소 3 배 이상은 크고, 널찍한 아일랜드도 있으며 오븐에 에어프라이어, 인스턴트 팟까지 나의 가제트 팔이 되어줄 주방 어시스턴트가 넘쳐나지만, 엄마의 식빵 토스트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식빵 토스트를 만들어주던 그 시절의 이여사는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 어렸구나...) 손가락만 몇 번 까딱하면 전 세계의 레시피를 30분 안에 섭렵할 수 있고, 알아서 다 해 주는 멀티 쿠커가 간택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난 오늘도 그 맛을 그리워만 하고 있다.
이제야 깨닫는다.
난 그때 그 추억의 맛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힘든 내색 않고 자식들에게 미국 음식 해주겠다는 엄마의 귀여운 발상,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며 우리와 같이 설레고 함박웃음 짓던 그 순간이 그리운 것이라고.
올해 가을, 막내딸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오신다.
산모 미역이며, 완도산 전복까지 구해서 급랭해 오신다며 벌써부터 신이 나셨다.
그런데 엄마, 내가 먹고픈 건 따로 있네요.
34년 전 젊은 엄마가 8살 막내에게 만들어주신 프라이팬 식빵 피자요! 우리 집엔 피자 오븐도 있고, 에어프라이어도 있지만 꼭 프라이팬에 올려서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