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rs Cho Cheng
Mar 16. 2024
멸치 육수 없인 못살아
우리 엄마의 주방 치트키
엄마의 김치냉장고 깊숙한 곳에는 항상 1.5리터짜리 삼다수 생수병이 4~5병 정도 있다. 물론 생수병은 거들뿐, 그 안에는 노르스름하고 비릿한 멸치 육수가 꽉꽉 차 있다. 그때그때 티 백처럼 우려내는 멸치 육수 팩은 물론 아얘 코인 형태로 압축되어 있어 생수에 넣고 퐁당 끓이기만 하는 코인 육수까지 요즘처럼 편한 시대에 엄마는 멸치 육수를 낸다.
우리 엄마 육수의 비밀은 약 달이듯 진하게 육수를 내는 것. 그렇게 내놓은 육수를 물에 희석해 그때그때 기막힌 국물맛을 내는 것이다.
엄마는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해물 육수 팩도, 코인 육수도 없으면 살짝 대기업의 힘을 빌려 다시다나 맛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시대를 역행하며 멸치 국물 내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엄마, 멸치 육수 낼 때 멸치는 얼마나 넣어? 물은 얼마나 넣고? 대파랑 무도 넣어야 하지?"
그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우리 집 요리 고수의 대답은 기가 찬다.
"멸치 쪼오끔, 다시마 큰 거 한 장, 무 쪼오끔, 대파도 숭덩 썰고 있제..."
그러니까 몇 g, 몇 ml인지... 요리 초보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래.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네이버 블로그와 유튜브를 정독하며 얻은 정보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인 한식 연구가 노영희 선생님의 유튜브 '철든 부엌'에 나온 멸치 육수 내기 편이었다. 먼저 찬 물 2.4 리터에 멸치 50g, 다시마 20g을 넣고 냉침하듯 우려낸다. 냉장고에서 최소 1시간은 우려 야하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하루 저녁 충분히 우려내도 좋다. 그렇게 우린 차가운 육수를 냄비에 붓고, 센 불에 끓인 후 30분 정도 추가로 끓이면 멸치 육수가 완성된다. 우리 엄마의 멸치액 같은 진한 맛은 없지만, 그 국물만 마셔도 한 끼가 해결될 만큼 맑고 뽀얀 국수가 나온다.
2리터 정도 육수를 뽑으면, 나와 남편이 4번 정도 찌개나 전골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워낙 국물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일주일에 한 번 육수를 뽑으면 한 주의 국물 요리는 해결되는 셈.
멸치 육수를 내는 일은 피부 관리로 치자면 피부 기초 공사를 단단히 하는 것과 같은 셈이었다. 아무리 비싼 크림에 파운데이션을 바른다고 한들, 피부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기능을 못한 채 피부 표면을 둥둥 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멸치 육수 루틴을 5년째 하다 보니,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쳐도, 예고 없이 칼퇴해 배고프다고 드러누워도 항상 근사한 국물 요리가 뚝딱 나오는 우리 엄마 주방의 치트키가 바로 멸치 육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우려낸 멸치 육수와 잘 익은 김치, 고슬고슬 갓 지은 쌀밥은 엄마의 자존심이고, 영원한 총알인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엄마를 생각하며 멸치를 덖어내고, 젖은 수건으로 다시마를 닦는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그저 내가 귀찮게 여길 뿐이다. 어느 과정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의 요리 수행. 멸치 육수를 내며 나는 엄마를 이해하고, 닮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