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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Aug 25. 2023

여자, 여자, 여자

글을 읽는 중입니다

 요즘은 단편과 시 위주로 작품들을 보고 있다. 그중 각기 다른 작가님이 집필한 세 편의 여자 이야기를 연달아 읽었는데 비교하면서 재미난 지점이 있었다. 제목을 지어본다면 ‘분노하는 여자, 도망치는 여자, 이상한 여자’이다. 절정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로 시원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김이설 작가님,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일상 공간과 성매매 공간을 교차시키는 감각적인 배경 설정을 보여주는 장류진 작가님, 그리고 가부장에 대해 인도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유쾌하게 비판하며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 가치를 보게 하는 반다나싱 작가님. 무거운 주제를 각자 시선으로 소화하며 공감을 끌어내는 모습에서 문학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김이설 작가님 기민한 날들을 위해는 정신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중년 여성 선혜가 주인공이다. 혼전임신으로 25살 나이에 일찍 결혼한 그녀는 공무원 남편을 내조하는 전업주부로 딸과 아들이 모두 성년이 된 남들 보기에는 부족한 거 없는 완벽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주면서도 약봉지 하나 쓰레기통에 버릴 줄 모르는 남편을 뒤에서 욕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딸과 말다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선혜가 갱년기가 아닐까 추측할 때쯤 신혼 시절 남편의 외도 이야기가 나온다. 선혜가 임신한 기간에도 지속해서 성관계를 요구하던 남편은 선혜가 하혈까지 하자 관계를 요구하지 않은 대신 성매매를 허락해달라고 조른다.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는 것이 싫다며 끈질기게 성매매 허락을 강요하는 남편에게 선혜는 어쩔 수 없이 질 수밖에 없었다.

 바람기만 빼면 남편은 좋은 남편이었다. 일찍 결혼해 집안일에만 매달리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과 매년 여행을 가도록 격려하고, 여행비도 두둑하게 챙겨주던. 그래서 선혜는 문득문득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참고 살았다. 그녀의 여행을 핑계로 남편도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기 시작하고, 해외 골프 여행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다 선혜는 어느 날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받아 주말부부이던 시절 우연히 남편 핸드폰을 본 선혜는 남편이 상간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찍은 사진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남편이 친구들과 톡 방에서 변태스러운 동영상을 돌려보고, 초경을 치르지 않은 어린 외국 소녀를 성매매 대상으로 집요하게 요구하는 걸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그래도 선혜는 위선을 떨더라도 가정은 지키려고 참고 참았다. 하지만 남편이 또 친구들과 해외여행 일정을 잡는 걸 보고 폭발한다. 그녀는 친구 아내들과 아들, 딸에게 남편의 해외 원정 성매매 사실에 대해 알린다.

 끝나지 않는 싸움은 매일 반복되었다. 나와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패거리의 전화에 시달렸고, 남편은 그들로부터 투서를 넣겠다는 협박도 무시로 받는 것 같았다. 음식을 제대로 넘기질 못하고, 혈압약의 용량이 늘고, 하루가 다르게 머리가 휑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참 멀었다. 피가 바짝 마르도록,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도록, 낯가죽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도록, 더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 어떤 지경에 이르러도 남편이 범한 여자아이들의 참혹함에 비할 수 없었다. 타국의 여자아이들이 겪었을 처참함에 비한다면.  

  

 장류진 작가님 새벽의 방문자들은 성매매 사이트 홍보 글을 지우는 일을 하는 포털 클린 센터에서 일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얼마 전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급하게 한 이사라 집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조금씩 짐 정리하며 집도 손보는 중이었다.

 그런 여자 집에 어느 날 새벽 모르는 남자가 와서 초인종을 누른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새벽에 모르는 남자가 오는 것도 소름 돋는 일인데 이 남자는 문 앞을 서성거리며 쉽사리 갈 생각이 없다. 집요하게 여자 집 앞을 배회하며 초인종을 누르고, 심지어 도어록을 열기 위해 아무 비밀번호나 눌러대는 남자가 떠나고 여자는 공포감을 느낀다. 애써 집을 잘못 찾아온 거로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하지만 찝찝함이 남았을 때 직장에서 여느 날처럼 성매매 홍보 글을 삭제하다가 그 남자가 성매매하러 온 걸 수도 있겠다는 가정을 한다. 오피스텔이 두 동으로 되어 있는데 입구만 다를 뿐 외형과 구조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가정대로 또다시 새벽에 초인종을 누르는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그 후로도 종종 새벽의 방문자들은 그녀 집을 방문했다. 처음은 잠금장치를 추가하고 두려움에 떨던 여자는 점점 그들에게 익숙해져 그들의 외모를 평가하며 인터폰에 보이는 그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얼굴을 인쇄해 벽에 붙여놓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방문한 남자를 보고 여자는 경악한다. 그는 여자의 전 애인이었다. 여자가 이 오피스텔로 이사 온 이유도 결혼을 전제로 만나던 그와 이별한 직후였다. 여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옆 동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옆 동에서 나온 건 여자와 같은 평범한 여자였다. 여자는 급히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

 어떻게 생겼을까. 가슴을 다 드러낸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지는 않을까. 야릇한 붉은 조명 같은 걸 켜놨겠지.
1204호의 열린 문 앞에서 여자를 맞이한 것은 헐벗은 여체가 아니었다. 앞니를 짓궂게 드러낸, 롤링스톤스의 통통한 입술과 혓바닥이었다. 트레이닝복 바지에 롤링스톤스의 혓바닥 로고가 프린트 된 맨투맨티셔츠를 입은 그녀가 먼저 물었다. 어제도 저희 집 초인종 누르셨나요?

  

 반다나싱 작가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은퇴한 인도 관리 람나스 미슈라의 아내가 주인공이지만, 람나스 미슈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날도 그는 지난 40년간 해 온 것처럼 베란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 앞에 아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선언한다. 그녀는 행성이라고. 람나스에게 아내는 전통적인 인도의 부인으로 가정의 인정한 군주이자 다 큰 아이들의 어머니면 그만이었다. 그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람나스가 한소리 하려할 때 아내는 입고 있던 사리를 풀기 시작했다. 행성에게는 옷이 필요 없다고.

 람나스는 아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친구 의사에게 연락하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그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옷을 벗어 제끼려 하는) 이런 미친 아내를 볼까 봐 전전긍긍한다. 람나스에게 중요한 건 아픈 아내가 아니라 아내로 인해 망신당할 자신이다. 람나스는 매일 가던 체스 클럽도 가지 못한 채 아내를 감시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다.

 다음날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에 아내의 친구들과 람나스의 친구 의사인 쿠마르가 방문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내가 정상이라고 한다. 그저 기분 탓일 테니 아내와 함께 바깥바람을 쐬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게 고작이었다.

 람나스는 계속 아내를 감시하며 아내가 사리를 벗지 못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밤에는 옆에 누운 아내를 낯설게 바라보며 처음에는 아내를 소문 없이 보호시설에 가둘 방법을 고민하더니 급기야는 아내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며칠 후 밤 그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이는 연습을 하다가 진짜로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때 아내의 입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곤충 인간들이 튀어나와 그를 물어뜯었다. 아내는 그들이 그녀 행성에 사는 거주민들이라 한다. 그때부터 그는 아내를 두려워하며 소파에서 잔다.

 람나스는 어떻게든 아내를 집에서 내쫓기 위해 어느 날은 친정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떠냐고 달콤하게 제안하고, 다른 날은 병원에 가야 한다며 강경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지금이 그녀 인생 중 최고로 건강하고 좋다며 거절한다.

 람나스는 아내가 혼자 산책하러 간 걸 알고 혼비백산해 뒤를 쫓아간다. 아내는 풍선 장수에게 풍선을 사서 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내가 남들 앞에서 사리를 벗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람나스는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 한다. 하지만 그녀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나무와 집들보다 높이 떠오를때 쯤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게 되었다.

 람나스는 그 길로 집으로 도망친다. 이제 체면을 잃은 그는 도망과 자살 중에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도망을 선택하기로 하고 소지품을 챙긴다. 그때 그는 어깨 위에 무언가 있는 걸 느꼈다. 그건 바로 아내 몸에 거주하고 있던 그 곤충 인간들이었다. 곤충 인간들이 공포에 질린 열린 그의 입속으로 행진한다.

 “이봐, 당신이 행성이라면….” 람나스가 격분해서 말했다. “당신은 별 주위를 도는 죽은 물체일 거야. 아마 대기와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살아 있는 것들이 있겠지. 지구나 목성처럼 아주 커야 할걸? 당신은 행성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여자야. 반듯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우리 가족의 명예를 손에 쥐고 있는 숙녀라고.”
자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은 낯선 생물들이 그녀 몸의 길들지 않은 영역을 달리며 산맥과 협곡과 그 신비롭고 알려지지 않은 땅의 다양한 서식지들을 탐험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녀는 어떤 태양을 발견하게 될까? 그녀는 어떤 풍경을 보게 될까?’ 흐느낌이 목구멍에 걸렸다. ‘나를 챙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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