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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15. 2023

악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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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요즘 뜨거운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시청자의 입장에서 일견 공감 가는 이야기이다.

 현실에서 악이라고 하면 법을 기준으로 할 것이다. 죄를 짓고도 법대로 처벌받지 않는 일이 지속해서 벌어지고 있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요즘, 허구의 세계에서까지 악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에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창작자로서는 고민이 된다. 허구의 세계에서 악이라는 것의 정의가 모호하고, 누구의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악일 수도 악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래 이런 고민의 지점들을 멋지게 돌파한 두 작품을 읽게 되었다. 하나는 정용준 작가님의 유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레몬이다.


 정용준 작가님 유령은 정치권 인사 열두 명을 짐승을 사냥하듯 깔끔하게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수감자 474번이 주인공이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이다. 그는 자기 죄를 순순히 자백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거에 대해서도 별다른 저항감이 없다. 그렇다고 자기 범죄에 대해 참회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얼어붙은 수면 아래 잔잔한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 사는 사람처럼 교도소 생활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런 그가 호들갑을 떨 때가 있는데 바로 상처를 입었을 때이다. 그는 자기 몸에 사소한 피부 벗겨짐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그의 담당 교도관인 윤에게 구급약을 요청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를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나니 바로 신해경이라는 중년 여성이다.

 이 소설은 교도관 윤과 신해경 두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474번에 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 관련 이야기와 현재 474번의 심경에 대해서는 교도관인 윤의 시점으로, 474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신해경의 시점으로. 그리고 두 사람의 시점이 지나간 자리에 474번의 독백이 낮은 목소리로 깔리며 그의 마음속 깊은 고독을 드러낸다.

 사람을 죽이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지만, 474번은 그 죗값을 교도소 안에서 받고 있다. 그런 와중에 주변인의 시점으로 밝혀지는 그의 유령 같았던 삶은 연민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은 틈을 만들어 준다.      

 이제 소년은 그림자가 되어 어둡게 누워 있다. 주검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꼼짝도 않는 작은 몸. 바닥에 끼얹어진 한 바가지 물처럼 바닥에 스며들며 서서히 증발해가는 어린 시절.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권여선 작가님 레몬은 살해당한 해언이라는 여학생의 두 살 아래 여동생인 다언과 다언의 문예반 선배이자 해언의 동급생이었던 상희, 해언의 또다른 동급생이었던 태림의 시점을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언니 해언이 살해당한 후 망가진 다언과 그녀 가족의 삶에 다언은 복수를 결심한다. 문제는 해언의 죽음에 대해 용의자는 있지만, 범인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용의자는 두 명이다. 한만우와 신정준. 둘 다 해언과 같은 반 동급생이다. 상희가 기억하길 반 아이들은 한동안 한만우와 신정준 중 누가 진짜 범인일지 추리 토론을 벌이곤 했다. 형사도 반 아이들도 범인일 가능성이 더 있다고 생각한 건 한만우이다. 그가 목격한 해언의 모습은 정황상 맞지 않은 진술이었다.

 다언은 한만우부터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만우와 대화 끝에 알게 된 진실은 신정준이 범인이라는 것과 한만우 역시 다언처럼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독자는 다언보다 먼저 범인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앞부분에 진범인 신정준과 결혼한 태림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면서 남편의 범행에 대해 횡설수설 털어놓으며 그의 범행을 모른 척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각 인물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서로 공감하지 못한다. 다언과 다언의 엄마는 친족이 살해당했다는 슬픔 속에 서로를 위로하지 못하고 죽은 해언에게 사로잡혀 서로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승희는 문예부 선배로 다언을 아꼈지만, 해언의 죽음에는 거리감을 느끼며 어떻게 위로할지 난감해한다. 태림의 관심은 늘 신정준이다. 그녀에게 해언의 죽음은 정준의 실수일 뿐이고, 나쁜 건 정준을 꼬신 해언이다. 그녀는 해언의 가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인물 간 공감이 그려지는 곳은 다언이 복수의 시작으로 한만우를 찾아갔을 때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한만우의 말을 다언은 끝까지 파고들며 물어본다. 그런 다언을 만우는 반기는 건 아니지만, 내쫓지도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만우의 증언을 통해 진범을 알게 된 다언은 그 후에도 만우의 집을 찾아온다. 만우의 여동생과 만우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신다. 섭식 장애가 있던 다언은 그곳에서 모처럼 식욕이 도는 걸 느끼며 인간다운 삶을 되찾는다.

 다언은 결국 신정준에게 복수한다. 신정준과 태림의 어린 딸을 납치하는 것으로. 아이는 해언이 되어 다언과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 태림은 아이를 잃은 슬픔과 냉혈한인 남편에 대해 진저리치며 죄책감으로 미쳐간다. 다언 또한 아이를 납치한 대가를 치른다. 다언은 아이를 곁에 두기 위해 그녀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던 한만우의 가족과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녀 곁에는 아무도 모를 죄책감과 기나긴 고독만 남는다.     

 한만우의 가족을 통해 구원받았으면서도 끝끝내 복수를 완수하는 다언의 모습을 보며 여운이 많이 남았다. 그녀가 복수를 하는 시점이 만우의 죽음 이후이기에 힘들게 얻은 구원을 잃어버린 다언의 아픔이 더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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