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주 여성의 삶 속에 나타난 문화적 위계화

[서평] 서성란의 <파프리카>를 읽고

by 토리

서성란의 「파프리카」는 결혼 이주 여성의 고달픈 시골 생활을 그려낸다. 결혼 이주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한지수의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와 비슷한 면을 보이지만, 「파프리카」의 시선은 좀 더 덤덤하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조금 더 기존의 틀에 갇혀 있으며 적극적인 개선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수동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틀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농촌 사회는 이러한 보수적인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촌락적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는 강한 응집력, 동질성 중시, 집단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는 내집단의 사람에게는 안전감, 인간적인 온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지만, 반대로 집단 외의 사람에게는 강한 배타성을 보이곤 한다. 이러한 촌락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화나 규율을 따르지 않는 것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경향을 가진다. 낯선 것(사람, 문화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되고, 이는 나아가 그들 문화와 낯선 문화를 위계화 하는 것에 이르게 된다.


물론 낯선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타문화를 바라보는 태도는 크게 자기 문화를 중시하고 타문화를 그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자문화 중심주의, 반대로 타문화가 자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문화 사대주의, 문화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화 상대주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에는 타문화와 자문화가 가지는 관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가령, 타문화를 대할 때는 국가 간의 외교, 역사, 경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방식 등이 고려되곤 한다. 「파프리카」의 주인공 츄엔이 ‘한국보다 경제적 상황이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베트남 출신의 사람이 아니라, ‘한국의 우호국이자 선진국의 전형’인 미국 사람이었더라면 그녀가 받은 처우는 최소한 멸시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서 드러난 결혼 이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들에는 집단과 개인의 권력관계, 그리고 그러한 집단과 개인이 소속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국가 간의 권력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본 서평에서는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집단과 개인 간의 권력 관계에 의한 문화적 위계화와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함께 다루어 볼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경제적 수준 차이에 인한 위계화



중일과 츄엔의 만남은 처음부터 동등한 조건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국제결혼을 통해 만났다. 중일은 장가도 못 간 채 나이가 꽉 찬 40대의 중년 남성이었고, 그는 그의 아이를 낳고 파프리카 농사를 도와줄 아내가 필요했다. 그의 어머니가 ‘돈을 들여서라도 못 사는 나라의 며느리’를 들이고자 했던 까닭은 그래서였다. 그는 ‘천만 원이 넘는 국제결혼 알선 경비’를 들여 베트남에 갔고, 그보다 20살은 어린 15명의 베트남 처녀들을 소개받았다. 처녀들은 저마다 면접을 보듯이 자기소개를 하고, 중일은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츄엔을 배우자감으로 ‘골랐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중일은 츄엔의 동생에게 오토바이를 선물했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는 두 남녀가 만나 펼치는 연애담이라기보다는 흡사 회사채용 면접에 가까워 보인다. 중일은 가사일과 농사일, 그리고 잠자리를 보살펴 줄 여자가 필요했고, 츄엔은 이러한 15:1의 면접에 합격한 사람인 셈이다.


츄엔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미용사 일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단순히 그녀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난하고 못 사는’, ‘돈 들여 데려 온’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중일이 그의 처제(츄엔의 동생)에게 결혼 선물로 오토바이를 선물하는 것은 이러한 결혼에 의한 경제적인 원조가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국가의 경제 수준과, 중일의 경제적 원조에 따른 위계화는 한 집단에게 다른 집단을 통제하고 배척하는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츄엔의 시모는 그녀를 두고 ‘밥값도 못하는 년’이라고 헐뜯는다. 여기서 말하는 ‘밥값’이라는 것은 결국 중일이 결혼에 들인 비용이다. 전통적인 농촌 집단이 요구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소임은 가사와 농사를 돕고 아이를 낳는 일인데, 그녀는 어느 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차별적인 대우는 시모뿐만 아니라 남편인 중일과 그녀가 새롭게 속하게 된 농촌 집단 전반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순이 넘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시골에서 그녀의 잉태는 희대의 관심사이며, 그녀는 언제나 ‘가난한 나라인 베트남에서 팔려오듯이 시집 온 여인’으로서 주목받는다.



젠더적 위계화



남편인 중일은 적어도 그의 어머니보다는 츄엔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사랑이며,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랑이다.


츄엔은 언제나 중일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츄엔’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농부인 중일의 아내’로서 그 정체성이 변화하기를 요구받는다. 고향에서 그녀는 미용사였지만 한국의 시골에서는 그녀의 재능을 살릴 일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점심이 되면 남편과 동료들을 위해 점심을 가져다 나르고, 저녁까지 함께 파프리카를 딴다. 밤이 늦으면 집으로 돌아가고, 중일과 동침한다. 때때로 시간이 나면 시내의 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강의를 듣거나 목욕탕에 가서 추운 겨울에 언 몸을 녹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중일이 허락 하에 가능해진다. 이렇듯 그녀의 모든 일상은 중일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된다. 중일에게 츄엔은 노동을 함께하는 동료이자, 잠자리를 함께하는 욕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파프리카처럼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보살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중일의 ‘보살핌’은 배려라기보다는 이기심에 가깝다. 그는 남편으로서 가지는 젠더 권력을 마음껏 휘두른다. 그는 그가 바라는 아내 상을 정해놓고 츄엔이 그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그는 츄엔을 위해 그녀가 문화센터에 가거나 이웃인 선미 엄마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만, 그마저도 츄엔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러한 자유는 단번에 박탈당한다. 그는 그가 못마땅해 하는 어머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화가 나면 그녀에게 욕설을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를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는 츄엔에게 그래도 되는 사람이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며, 가난한 나라에서 그녀를 데려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중일은 그 사실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츄엔을 속박하고,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을 미안해하고 후회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일’로 포장된다.



언어적 위계화



이러한 위계화는 언어적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중일은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츄엔을 ‘수연’이라 부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츄엔을 그가 속하는 문화에 동화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 어느 쪽이라고 확실하게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그가 츄엔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은 한국어 자체를 잘 하게 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답답한 농촌에서의 삶을 환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중일은 그녀가 영원히 한국어를 깨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보살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중일의 어머니에게서도 엿보인다. 한국어를 배우러 갔다가 늦게 돌아온 츄엔에게 그녀는 “백날 배운다고 남의 나라 글자가 호락호락 알아질 것 같으냐? 귓구녕이 터져야 사람 구실을 하지. 틈만 나면 밖으로 싸돌아 댕길 궁리만 하지 말고 어서 밥값이나 해.”라고 폭언한다. 중일과 중일의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츄엔이 한국어를 배우는 일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까닭에 츄엔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중일과 함께 살았음에도 한국어를 초급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지 못한다. 그 나라의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종류의 권력 관계를 낳는다. 이러한 언어적 위계화는 주 집단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모의 폭언을 감내해야 했고.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서툰 까닭에 발목을 다쳤어도 말하지 못했다.


이러한 위계화된 환경에서 츄엔은 츄엔으로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츄엔은 중일에게는 잠자리와 노동을 함께하는 ‘보살펴야 하는’ 존재인 ‘수연’이며, 시모에게는 돈 들여 데려왔더니 일도, 아이 낳는 것도 못하는, ‘밥값 못하는 애물단지’,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외국인’ 출신 며느리이다.


물론 츄엔이라고 그녀가 새롭게 소속될 집단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녀에게 낯선 음식인 청국장과 된장찌개를 퍼 먹고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고, 한국어 학당에도 나가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의사소통은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다. 「파프리카」에서는 그녀에게 요구되는 많은 집단적 압력을 보여주지만, 그녀가 요구하는 무언가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 중에 그나마 그녀가 자유롭게 할 수 있던 것은 저렴한 군용 목욕탕에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비로소 그녀에게 씌어졌던 굴레를 벗는다. 그곳에서 받는 시선은 적어도 그녀가 베트남 출신 며느리라서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를 신기하게 보지 않고 덤덤하게 대하는 나 일병이 있다. 그녀는 나 일병이 특별히 그녀를 잘 대해준 것도 아니건만 그를 특별하게 여기는데, 이는 그만큼 그녀가 가정과 사회로부터 요구 받는 것들에 대해 속박 받아 왔음을 반증한다. 이 보수적인 시골 사회와 가정에서 그녀는 언제나 외부인이고 동등한 존재로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중일과 중일 모의 태도가 배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일은 발목을 다친 그의 아내를 살뜰하게 돌보고 병원에도 데려가는 등의 정성을 보인다. 중일 모의 경우도 그렇다. 시종 츄엔에게 폭언을 일삼고 못 살게 굴던 그녀는 작품의 후반부에 ‘바쁠수록 천천히 가라’며 츄엔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분명 츄엔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문제그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문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그녀를 한국 농촌 사회라는 자문화에 일방적으로 소속시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하거나, 그녀를 ‘가난한 나라인 베트남’이라는 타문화에 한정지어 대립상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츄엔이라는 한 사람이 베트남에서의 형성한 그녀의 고유한 문화, 그리고 정체성과 더불어 한국에서 그녀가 새로이 형성해 나가는 문화와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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