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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Jan 28. 2021

허물상자

토리 시 01

허물상자



문득

잊어버렸던 내 허물상자를 떠올린다

고통스런 새 봄이 올 때면

차곡차곡 벗어두었던

그 허물들

아주 많은 봄을 만나고

아주 많은 허물과 이별했더랬다


어느 구석, 홀로 썩던

그 허물 상자를 열어보니

나를 고스란히 닮은,

그러나 또 나와는 좀 다른

그 허물들이

나와 눈을 마주친다


어떤 것은 시퍼런 주삿바늘에 엉엉 울었고

어떤 것은 길가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고

또 어떤 것은 거리낌 없이 아빠 볼에 입맞추곤 했다


나와는 퍽 다른 것들이다

내가 입은 겉껍질에는

그 여린 허물들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는 단단한 겉껍질에 싸여

어린 날의 희고 보드라운 살갗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조금은 서글퍼져서

입맛만 쩍쩍 다시다가

허물상자를

도로 닫는다






약 10년 전, 학부 시절, 문예창작 시간에 썼던 첫 작품이다.

스무 살의 나는 열 살의 나를 동경했고, 서른 살의 나는 스무 살의 나를 동경한다.

그러나 스무살의 내가 열 살의 나보다 성숙했듯이 서른 살의 나 또한 스무 살의 나보다는 성장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허물 상자를 기꺼이 열어보고 그 숱한 허물의 결과인 내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마흔 살의 내게 미리 메시지를 보낸다.

서른 살의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고. 내가 이만큼 많은 허물을 벗어 이만큼 단단해졌다고.

나는 나의 보드라왔던 시절을 추억하지만, 그것을 잃음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단단한 껍질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당신 또한 그랬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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