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에게서 배운 것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나는 한 때 방구석 은둔자, 히키코모리의 삶을 산 적이 있다.
일주일에 외출하는 날은 손에 꼽았고, 편의점 인스턴트 음식 따위가 내 식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마저도 하루에 한두 끼가 다였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면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루에 열 몇 시간을 잤다. 그마저도 깊게 잠들지 못해서 몇 시간을 나누어서 자다가, 깼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잠시 깨어있을 때면 유튜브 따위를 봤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시 잤다. 그런 생활이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지독한 우울증에 지배당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나의 20대 시절의 절반 가까이를 우울증 환자로 살았던 것을 아쉬워하곤 했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가지. 그랬더라면 나는 더 빨리 나았을 거고, 그러면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주변 사람도 나로 인해 덜 힘들었을 거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그토록 괴롭지 않았을텐데... 하는 그런 후회들.
이미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고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버스는 떠나갔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쉬움을 발판 삼아 우리의 내일이 좀 더 나아지기를 기도하는 일 뿐이다. 우리에게 다가올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렇다면 우울과 싸웠던 지난 날들은 무의미했나?
정말로 그러했을까? 나의 청춘은, 그러한 방식으로 그저 흘러만 가버렸는가?
나는 그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몇 년 간의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나, 나는 우울로 말미암아 나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과거의 나를 살피고 현재의 나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스로의 결핍과 결함을 어루만지고 나의 장점을 들여다보는 법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나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갔다.
부정적인 것 대신 좋은 점을 조명하려고 애썼다. 스스로를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가능하면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랬더니 어느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토리 쌤은 참 말을 예쁘게 하는 거 같아요. 생각도 긍정적이고요!
"에이, 뭘요. 아니에요, 그냥 그런 척 하려는거지." 나는 처음에는 부정했다. 긍정이라는 단어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는 몇 년 전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우울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했던 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나의 생각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감정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며, 때론 사건이나 사실의 본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곤 한다. 그런 감정의 폭주를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제삼자가 되어 내 자신을 바라보며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감정에 매몰된 상태에서는 내가 어떤 감정을, 왜 느끼는지 깨닫기 힘들다. 그때 '알아차리기'는 우리의 현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감정의 폭주를 멈추고 우리 자신이 쉬어갈 틈을 내어줄 수 있기도 하다.
인지 치료를 시도하면서 나는 이러한 감정 알아차리기와 더불어 나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가령 너무나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그 전의 나는 그야말로 하루 종일 분노와 비애, 자괴감에 매몰되어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일의 능률은 떨어졌고, 그것은 때로 나 자신이나 주변 인물들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곤 했다. 인지 치료를 연습하면서 나는 나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마다 수첩을 꺼내 나의 감정인 것과 사실인 것을 구분하여 적어 보았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나는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나?
- 화가 난다.
- 왜?
- A가 내게 ~~한 말을 했다.
-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 A는 아마 나를 무시했을 것이다.
- 나는 A에게 그 사실을 확인했나? 그것은 사실인가?
- 그렇지 않다. 알 수 없다.
-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분노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없다. 소모적이다. 그러나 A가 정말로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면 어떡하나?
- A가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나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A가 정말로 나를 무시한다고 한들, 내가 A의 생각이나 태도를 한 순간에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 그래도 화가 난다. 그는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이 감정은 내게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나 자신만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렇다면 나는 지금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해치기만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쉽사리되지 않던 감정 조절과 나 자신에 대한 설득은 나중에는 좀 더 익숙해져서, 수첩에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이 감정 컨트롤이 늘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고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다.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자 타인을 대하는 방식 또한 변했다. 이제 나는 전보다 남을 더 잘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남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우울과 슬픔이 있었듯이 남들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우울을 통해 나와 마찬가지로 타인 역시 다양한 대상과 이유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소통의 부재가 오해를 키우고 관계를 망가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졌다. 신중해졌다. 사과할 일이 생기면 기꺼이 사과했다. 어떤 사람을 오해할만한 일이 생기면 좀 속상하더라도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므로.
내 주변에 우울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내 경험을 공유하고, 그들이 빨리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더 이상 나와 같이 우울에 고통받는 이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내 우울의 원인 중 하나는 어떤 하나의 완벽한 목표를 상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가는 완벽주의에도 있었다. 나는 그 완벽주의를 버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모든 완벽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가령 나같은 사람은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면 지독한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곤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완벽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어떤 단일한, 사회가 규정하는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조금 더 나아지고, 어떻게 하면 ‘나’의 매일이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길을 걸을 때, 과거의 나는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걸었다. 이제 나는 주변을 본다. 꽃나무가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를, 지나가는 개의 흔들리는 꼬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아스팔트 위를 지나는 개미의 살뜰함, 지저귀는 새의 경쾌함을, 부는 봄바람의 싱그러움을 안다. 그날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잘했는지에 집중한다. 나의 오늘 하루 중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나의 삶을 더 다채롭게 했는지를 바로 볼 수 있다. 우울을 통해 나는 좀 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짙은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빛이 빛으로서 역할하는 것처럼, 나의 우울은 내 삶의 기쁨을 더 선명하게 했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우울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중증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것이 모두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우울의 사원에 발을 들인 자야말로 기쁨의 포도알을 맛볼 수 있다’는 존 키츠의 시*처럼, 어떤 기쁨은 우울을을 통해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당신의 우울은 무의미하지 않다.
당신은 우울로 말미암아 더 깊이 사유하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성장의 과정이다. 그래서 어떨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당신은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아주 점진적인 과정이라도 진보는 어쨌든 진보이므로. 그러니 우울했던 지난 날을, 그것과 치열하게 다투며 단단해졌던 우리 자신을 다독여 주자. 당신은 아주 잘했다. 잘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잘하게 될 것이다.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우울에 부치는 송가(Ode on Melancholy)> 中 일부 발췌
Ay, in the very temple of Delight
Veil'd Melancholy has her sovran shrine,
Though seen of none save him whose strenuous tongue
Can burst Joy's grape against his palate fine;
His soul shalt taste the sadness of her might,
And be among her cloudy trophies hung.
그렇다, 그 환희의 사원에서
베일을 쓴 우수는 그녀만의 성지가 있나니,
강인한 혀로 기쁨의 포도알을
섬세한 입천장에 터트릴 수 있는 자 아니면 그를 보지 못하리라.
그는 그녀의 전능함에 말미암은 슬픔을 맛볼 것이며
그녀의 구름 낀 트로피 사이에 걸리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