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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Oct 26. 2021

찬란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어둠, <아네트>

<아네트> 영화 시사회 관람 리뷰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아네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브라운관과 무대, 모니터 너머의 세계는 언제나 동경과 열광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대중은 언제나 자신을 환호하게 하는 대상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스크린 너머에서 살아가는 '스타'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스타는 그로 말미암아 부와 명성을 얻고, 대중은 그들로 말미암아 대리만족적인 쾌감을 느낀다. 


예술가와 그의 예술을 향유하는 자들의 관계가 언제나 이러한 '윈-윈' 관계였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꼭 그렇지는 않다. 어느 연극의 무대 위를 떠올려 보라.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그 여남은 곳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 깔린다. 대중은 스타들의 '선별된' 찬란함에 환호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현실이 존재하곤 한다.


영화 <아네트>는 이에 대한 이야기다.



1. 죽는 여자와 죽여 주는 남자


헐리우드의 스텐드업 코미디언인 헨리 맥헨리는 특유의 '죽여주는' 입담으로 명성을 떨친다. 비관적이고 조소적인 그의 유머와 퍼포먼스는 순식간에 관객을 매료한다. 비참과 죽음에 대한 유머는 무겁고 우울하지만, 관객들은 그의 말와 퍼포먼스에 시종 웃음을 터트린다. 그것이 헨리가 이 무대에서 맡은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는' 퍼포먼스가 펼쳐졌을 때도 관중은 웃는다. 관중을 웃게 하는 것이 헨리의 역할이고, 관중은 그들이 헨리에게 기대하는 바 이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헨리, 왜 코미디언이 되었나요?'


그러나 헨리가 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재차 그에게 묻는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들의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헨리 맥헨리라는 개인이 아니라,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코미디언인 헨리 맥헨리'이므로. 그가 온갖 혐오적 발언들을 유머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오페라 가수인 '안'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야말로, 희대의 스캔들이다. 우울한 악동과 천사같은 오페라 스타의 만남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둡게 내리 깔린 맥헨리의 짙푸름은 타오르는 태양처럼 선명한 붉음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마치 닿지 말아야 할 것이 닿아 버린 것처럼. 이 두사람은 너무나 달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헨리가 '죽여주는 남자'라면 안은 '죽는 여자'다. 안은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죽는다. 칼에 찔리고, 피를 흘리면서. 그 기괴한 살해와 죽음의 광경에 관객은 열광한다! 그들이 '죽여주는 남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사랑스러운 안'과 '악동같은 헨리'는 본질적으로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대중은 그들이 '왜 죽거나 죽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비하고자 하는 것을 소비한다.


관객은 또한 그들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파악할 수 없다. 영화에서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 너머에서 그들은 숱하게 노래한다. '우린 사랑에 빠졌지만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어.'라고.

안과 헨리는 정말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물론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비하는 자'(대중)와 '소비 당하는 자'(스타)의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은 순전히, 관객이 그 내밀한 속사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숱한 기사들은 헨리와 안의 로맨스에 대해 떠들어대고, 그들의 화려한 삶을 조명하지만 '인간'인 안과 헨리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이기적이다!


그러한 로맨스의 결말은 어디에 다다르게 될까?

그렇다. 죽음이다. '죽여주는 남자'는 '죽이고', '죽는 여자'는 죽는다. 

대중이 그토록 열광하던 비극의 내용과 같이!




2. 아기 아네트: 아버지와 대중의 꼭두각시


이러한 '상품화된 연인' 사이에서는 '상품화된 딸'이 태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아네트'다.


'아네트(annette)'란 '작은 안(anne)'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름에서부터 보여준 셈이다. '아네트'는 그 이름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재능을 선보인다. 그녀가 어머니를 여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 그렇지 않아도 좋은 먹잇감이었을 아이는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대중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난도질 당하게 되었다.


'아네트'는 다른 등장인물과는 다르게 '꼭두각시 인형'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탄생부터 대중의 열광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살아있는 인형'이다. 날 때부터 구경거리였던 아네트는 타블로이드지 따위에서 '사랑스러운 연인의 딸'에서, '어머니를 잃은 가련한 아기', 그리고 이윽고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아기'로 이름을 떨친다. 그 안에서 '아네트' 개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인 헨리 맥헨리는 '광대'인 자신의 딸이 저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을 우려했으나, 그랬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과 그의 아내를 팔았던 것과 같이 그의 딸인 아네트 역시 대중에게 팔아넘긴다. 그토록 목말라하던 돈과 명성 때문에.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은 술이나 마약과도 같아서, 지나치면 그것이 스스로를 망치는 것임을 알면서도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왜곡된 욕망에 휘둘리게 되는 셈이다.


대중의 사랑을 갈구하던 헨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아네트를 '소비'한다. 아네트는 귀애의 대상이자 변명거리고, 돈벌이의 수단이다.



아네트의 주변에 상식적인 어른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네트에게는 의지할 만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었다. '안'의 반주자였고 나중에는 '지휘자'가 된 남자(이하 지휘자)가 어쩌면 비교적 상식적인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지휘자라고 뾰족하게 다른 인간은 아니었다. 제 욕망을 좇기로는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아동착취임을 알았음에도 그 또한 아기 아네트 쇼에 동참하지 않았던가? 안의 지휘자가 되려 했던 욕망 때문에! 그가 안을 잃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루었을 어떤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안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안)의 옆에서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재능있고 사랑스러운 딸(아네트)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부나방처럼 욕망만을 좇으며 나아가던 이들은 결국 '비극적 죽음'에 다다르고 마는 법이다.



3. 파멸과 재기의 이야기



헨리의 오른뺨에 있던 붉은 점은 점점 자라난다. 마치 그가 살인자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마치 그의 뺨에 튀었던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것처럼.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얻은 '죽여주는 남자'는 정말로 아내와 동료를 죽이고 자신의 아이를 착취하고, 끝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죽이는' 자가 된다. 그로 인해 정말로 그 역시도 죽은 사람이 된다. 그의 쇼에서 그가 시니컬하게 외친 바와 같이.


그러고보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헨리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맞이한다.

'안'은 남편에게 살해당했고, '지휘자'는 사랑했던 여자의 남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헨리는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죽였고, '아네트'는 자신의 빛나던 재능을 죽인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대중매체를 펼치면 흔히 보이는 연예인들의 스캔들, 예술가에 대한 미화, 그리고 아동착취적인 방송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가 엿보이지는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싶어하는 것만 보지는 않았나? 그 쇼와 텔레비전과 편집된 영상 너머의 어둠을 들여다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비극을 웃음거리로 삼지는 않았나? 


영화 <아네트>의 관객은 스크린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영화적 연출로 말미암아 영화 밖의 관찰자였다가, 영화 안의 엑스트라였다가, 조연이었다가, 이윽고는 영화의 모든 사태를 자아낸 주역으로 변모한다. 감독은 이러한 연출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이기적인 대중과 스타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대중과 스타의 욕망'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네트는 분명히 그녀를 낳고 기른 환경을 원망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말한다. 나는 부모 두 사람 모두를 원망한다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런 재능을 주었고,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착취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녀를 착취한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아네트는 두 사람 모두를 용서할 수 없다. 


아네트는 이제 영영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램프를 깨고, 콘서트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 그를 사랑하지 않겠노라고(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더는 인형이 아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사람이다. 헨리와 안, 그리고 우리 모두와 같이. 그녀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선언으로 자신의 부모로부터 '홀로 서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녀는 말한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나 가슴아픈 말이지만, 그럼에도 어쩌면, 희망적이다. 그녀는 더이상 아버지와 대중의 피아노줄에 따라 춤추거나 노래부르지 않고 그녀만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때론 우울하고 때론 좌절스러울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강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갈테고, 그녀의 가슴 속에 간직한 흉터를 평생에 걸쳐 회복하게 되리라.






영화 <아네트>는 단순히 뮤지컬 영화로만 홍보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라라랜드>의 우울한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청각적 연출과 미장센은 너무 감각적이라서 도리어 아프기까지 하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그리고 풍자적인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것이라 확신한다. 처음과 끝까지 음악을 담고 있지만 어둡고 기괴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다소 불쾌해지는데, 그 불쾌해지는 이유를 잘 생각해보면 그걸 바라보는 '나'(관객) 또한 그러한 '불쾌함'을 자아내는 사람들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 있다. 관객은 스크린 안에서, 밖에서 수없이 영화 속 엑스트라였다가, 조연이었다가, 마침내는 이 영화에서 도무지 빼놓을 수 없는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아주 수작이다. 기왕이면 큰 스크린에서 보기를 바란다. 내가 스크린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장황한 곳으로.



<이런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우리 사회의 어둠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싶으신 분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짙은 어둠 너머에 반짝이는 옅은 희망을 엿보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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