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중반일 때의 일이다. 갓 학부를 졸업한 풋내기는 호기롭게 서울로 대학원을 다니겠노라고 선언했다. 이유는 그럴싸했다. 나는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내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을 보거나 석사를 따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업계 선배들의 말을 듣자 하니 석사를 따는 것이 더 유리하단다. 학력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그 바닥에서는 석사는 기본 조건처럼 되어버렸다나, 뭐라나. 사실상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대 출신인 것이 얼마쯤의 콤플렉스로 작용하던 바, 대학원이라도 소위 ‘좋은 간판’을 따보자는 시커먼 욕심도 없었다곤 말 못 하겠다. 학문을 중시하는 우리 집안 특유의 분위기도 이에 한몫했다. 누가 대학원에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어른들이 죄다 석사니 박사니 이런저런 학위를 따오는 바람에 자연스레 그 자녀들도 그만 '아,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원을 가는거구나'하고 생각해 버리고 만 것이다. 다들 따는(?) 학위, 나라고 못 딸 것 있나 싶기도 하고, 학자가 되어서 유명해지면 나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고, 학문에 매몰되어 사는 삶이 멋있을 것만 같고… 이런 지적 허영과 자만으로 똘똘 뭉친 무언가가 내 안에서 넘실거렸다.
지금이야 그것이 지독한 허영이자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의 나는 그런 걸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기꺼이 대학원 원서를 냈고, 두어 차롄가 고배를 마셨다가, 이윽고는 합격장을 받고야 말았다.
불행히도 합격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합격 확인을 하고서 일주일쯤 되었을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정말이지 의외의 소식이었다. 내가 우리 과 소속 사무실의 교육 조교로 선발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것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공부를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은 꽤나 솔깃했다. 그래서 나는 그만, “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칠지도 모른 채.
조교님의 목소리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나는 서울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딱히 그래서는 아니었지만.)
“다음 주부터 사무실에 나와서 인수인계를 받으시면 돼요.”
“네? 다음 주부터요? 제가 창원에 사는데 어떻게 나중으로 미룰 수는 없을까요?”
“아… 그래도 오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미리 일도 배우고 대학원 공부도 대비할 수 있고…(어쩌고 저쩌고)”
이리저리 둘러서 말하시긴 했지만 요는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대학원에 합격한 지 일주일, 입학까지는 3개월이나 남았지만 그래도 올라가야만 했다. 내 주변의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대학원은 ‘까라면 까야 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히 있겠지만 꼰대들이 쌓아 올린 상아탑에 발을 들이려면 꼰대의 방식으로 해야 하는 법 아닌가. 그런 고로 나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올라간다고 하는 수밖에.
그래도 그때까지는 동경하던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처음으로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한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고 들떴던 거 같다. (아! 순진한 나 자신이여..!!)
나는 그 길로 상경했다. 아직 대학원에 입학도 하기 전이라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당장 머물 곳이 필요했다. 나는 사실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할머니께서 잘 아시는 분이 운영하는 고시원이 있대. 거기로 가면 되겠다."
하나뿐인 딸내미를 혼자 위험천만한 서울로 보내는 것이 걱정되셨던 부모님은 당신들 대신 곁을 지켜줄(?) 보호자 혹은 그에 준하는 누군가를 붙여 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좀 아쉽기는 했지만, 뭐, 고시원살이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학원 합격이 안겨준 거대한 도파민 덩어리가 내 뇌를 둔하게 만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짐을 싸서 상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