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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더리 Jan 30. 2021

내 이름 찾아 삼만리

미국 생활의 시작, 그리고 나의 영어 이름 짓기.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한국어 이름이 더 좋아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1년간 미국에서 지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전학생이 되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새로운 반 친구들 앞에서 담임 선생님과 함께 나를 소개했다. 내 이름을 듣고는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현서'. 이름 참 예쁘죠?"


내 이름이 예쁘다니. 어렸을 때 나는 내 이름이 너무 남자 같다고 생각했다. 밑으로 동생이 두 명 있는데, 나와 한 살 차이인 여동생의 이름이 더 예쁘다고 느꼈다. 동생의 이름은 상호명으로도 많이 쓰여서 간판에도 자주 보이고, 같은 이름의 연예인도 몇 명 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동생의 이름을 내심 부러워했다. 무엇보다 동생의 이름은 간단하다. 외자이기 때문에 발음하기도 쉽고, 한국어 이름을 그대로 미국에서 쓰기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미국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큰 골칫덩어리였다. 내 이름을 영어로 쓰면 "Hyunseo"인데,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우니 기억하기도 힘들다. 미국 생활 초반에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내 이름을 소개하거나 발음하게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아마 듣는 나만큼 내 이름을 부르는 그들도 만만찮게 어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나도, 내 이름이 주는 불편함과 어색함에 적응했다. 어린 나는 그들의 꼬부랑 발음이 익숙해졌고, "히연소우~" 또는 "휴운세오~" 라고 불리는 것에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열 살 때 처음으로 남에게 들었던 내 이름에 대한 칭찬,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아마 내 이름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겼던 환경을 벗어난 직후 듣게 된 칭찬이어서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선생님의 칭찬에 진심으로 동의하지 못했지만, 타인으로 인해 서서히 스스로의 장점을 알아보게 된 첫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담백한 한국의 발음, '현서'로 불릴 수 있었다.


나는 한국어의 소리가 좋다. 바람 소리같이 꾸밈없고 소박하다. 한국에서 불리는 내 이름 소리가 좋다. 숨소리로 시작해 숨소리로 끝나는 내 이름. 마치 누가 속삭여주는 것만 같다. 시옷 소리가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담백하고 짧게 끝내는 "서"의 소리.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많이 불러달라 하고 싶다.


대학에 합격한 후 미국 생활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고민했던 것은 가서 무슨 이름을 쓸지였다.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자니 어렸을 때의 경험이 생각나서 별로 내키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는 "내 한국 이름을 기억해주거나 발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과는 깊게 알고 지낼 필요가 없다"라며 본인의 여권상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쓴 경우도 꽤 있었다. 열아홉 살 치고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꿰뚫어 본 아주 대단한 논리였지만,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영어 이름을 골라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듣고 쉽게 기억할 수 있었으면 했고, 나를 부를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기회를 잃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BabyNames.com과 같은 웹사이트를 몇 시간씩 뒤지며 이름을 찾아보기도 했고, 친구나 가족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살면서 세 개의 영어 이름을 가져봤지만, 그 어떤 이름도 진짜 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아무거나 툭, 하고 내 이름으로 정하기에는 뭔가, 이름의 의미나 역사가 깊지 않았다. 나의 이름이 되기에는 나와의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결국 H로 시작하는 이름 하나를 정해서 대학 4년 내내 썼다. 그렇지만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친구들은 나와 잘 어울린다고 해 주었지만, 나는 그 이름이 너무 연약하고 여성스럽게 느껴졌다. 회사에 취업한 후, 나는 이름을 바꿨다. 아니,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고 해야겠다. 내 한국 이름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내 이름을 잘도 발음해준다. "현" 부분도 아주 정확하고, "서" 부분은 좀 서툴어하지만, "thur"으로 발음하면 쉽다고 얘기해주었더니 그렇게 불러준다. 여전히 진한 영어 발음이지만, 그래도 한국 이름을 쓰니 뭔가 더 강인해진 느낌이 든다. 든든하다고 해야 할까.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나에게는 내가 자라온 한국, 그리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생각. 내 이름이 나에게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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