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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더리 Dec 19. 2020

코로나 시대에 미국인 룸메이트 네 명과 산다는 것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일리노이주에서 룸메이트 네 명과 집에서만 지내기.

만약 그들이 한국인이었다면 좀 덜 불안했을까. 3월 말이 되어서야 미국도 본격적으로 코로나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던 일리노이주에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나는 방 다섯 개짜리아파트에서 룸메이트 네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우리는 친했지만 각자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아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각자 생활하다 한 명이 코로나에 걸리는 순간 나머지 네 명 모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언론이나 학교에서 코로나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았던 1, 2월에도 나는 한국에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불안해했다. 우리 룸메이트들이 대화를 나누는 단톡 방이 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코로나에 관한 기사를 하도 많이 보내주셔서 코로나 박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는 만큼 걱정도 많아졌던 나는 가끔 소심하게 룸메이트 단톡 방에 기사나 뉴스 영상의 링크를 올리며 코로나를 조심해 달라고, 다들 마스크를 구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었다. "아마 이게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Maybe I'm just being paranoid, but I think it's best that we be cautious!)"


첫 반응은 밋밋했다. 모두 나를 응원해주고, 이런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코로나를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먼 이웃나라 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룸메이트들을 보며 나는 더 불안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강하게 밀어붙일 수도 없는 판이었다. 나도 사실 그때는 코로나가 미국을 그토록 잔인하게 휩쓸지 몰랐기 때문에.


룸메이트에게 자가격리 부탁하기


3월 말까지 이집트에서 두 달간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룸메이트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 맨 앞글자를 따서 Z라고 부르겠다. 교환학생이 끝난 Z는 본가가 있는 미네소타에 가서 일주일을 지낸 후 다음 학기 수업을 위해 우리가 있는 시카고 아파트로 온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미국 여러 주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비행과 같은 폐쇄된 운송수단을 두번씩이나 이용하는 것은 전혀 좋은 생각같지 않았다. 이미 확진자가 하루에 몇 만 명씩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Z의 귀환과 집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전반적인 코로나 대응 규칙에 관한 회의를 했다. 저녁 7시쯤 같이 간단한 요기를 하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때 결정된 몇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며칠 (Few days)” 동안 자기 방에서 자가격리를 하겠다는 Z에게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해달라고 부탁하기. 자가격리를 하긴 하지만, 사실 Z와 부엌과 화장실을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Z는 자신이 만진 모든 것 (냉장고 문, 수도꼭지, 현관문 손잡이 등)을 소독용 물티슈로 닦아야 했다.


    2. 최대한 외출 자제하기. 불가피하게 외출했을 시에는 오자마자 모든 옷을 벗어서 빨래통에 넣고 절대 만지지 않기. 들어오자마자 손 씻고 샤워하기. 이때 어떤 기사에서는 바이러스가 택배 상자나 머리카락, 옷 등에 붙어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외출하고 오면 바로 샤워하는 것 규칙으로 했다.


    3. 음식 나눠먹기. 3월 말, 통행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사람들이 음식과 생필품 사재기를 시작했다. 모든 마트의 통조림 식품, 냉동식품, 파스타 면, 쌀, 감자, 심지어 밀가루와 설탕까지 다 품절이었다. 마트 안에 스무 명씩 들어갈 수 있는 인원 제한이 생겨서 마트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고 6피트씩 간격을 유지하느라 줄은 더 길어져서 거의 몇 블록씩 이어졌다. 미국은 배송 시스템도 잘 되어있지 않아서 나도 줄을 서서 거의 한 시간 반을 서서 기다렸다.

텅 빈 마트..

제일 충격이었던 것은 바로 화장지 대란이다. 어느 날 한국인 친구 한 명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화장지는 사놨느냐고 물었다. "화장지? 전에 사놓은 거 아직 있는데.. 왜?"라고 묻는 나를 보며 친구는 지금 모든 마트와 심지어 아마존에도 화장지가 다 품절이라며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 빨리 구할 수 있는 대로 화장지를 사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화장지가 없으면 좀 끔찍할 것 같긴 했다. 동네 마트를 다 돌아보니 정말이었다. 화장지가 없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코스트코 같은 마트에서 화장지를 두고 서로 살려고 싸움을 벌이는 일도 많이 생기고 있었다. 화장지 때문에 경찰이 출동해야 한다니.. 이거 실화야? 재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다섯 명은 서로 가진 음식을 나눠먹기로 했다. 다섯 명이 다 각자 음식을 사재기해놓기에는 일단 냉동실과 냉장실 공간이 터무니없이 작았기 때문에. 케일이나 시금치 같이 냉동 보관할 수 있는 야채들을 사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우리도 나름 음식을 구비해 놓았는데, 결국 나중에 보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음식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열심히 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통행금지령 자가격리를 대비해 구비해두어야 할 것 (What to stock up on for COVID-19)" 등의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마스크에 대한 제대로 된 기사를 내보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불안해


룸메이트 한 명이 외출을 했다면, 들어와서 손은 씻는지. 마스크는 쓰고 나가는지. 지금 왜 외출을 하는 것인지. 같이 살고 있는 이상, 나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또 미국이라서, 보통 다른 사람의 행동에 잘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룸메이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잔소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의 코로나 대응 방식만 봐도 개인주의 문화가 뚜렷하게 보인다. 미국 정부는 코로나 대응 정책을 각 주의 주지사에게 맡겼다. 그랬기 때문에 주마다 통행금지령이나 마스크 의무화, 음식점과 상점 같은 공용시설 통제, 재택근무 정책과 같은 규칙이 확연히 달랐다. 어떤 주에서는 마스크가 의무화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악 축제를 하는 등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어떤 주에서는 집단 모임도 가능해서 결혼식도 치를 수 있었다. 코로나가 일찍부터 심했던 뉴욕 주 같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 통제되어 지역 경제가 심히 침체되기도 했다. 같은 국가 안에서 이렇게 정책이 달라지니,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지역이나 정치적 성향 간 갈등이 불가피했다.


그래도 거의 두 달간 이어진 자가격리 생활에서 룸메이트 네 명과 넓은 집에 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만약 내가 좁은 스튜디오 아파트에 갇혀 혼자 60일을 보내야 했다면 그 시기를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케이크나 쿠키 같은 디저트도 만들어주고, 가끔 밤에 노래 틀어놓고 춤도 추고, 아침 운동도 같이 하고, 테라스에 나가 신선한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며 멈추어버린 세상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이 상황을 겪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학기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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