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산책시키는 건 줄!
주인!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시원한 공기도 좀 들이켜고 커피도 한 잔 하고!
2017년 5월, 저희 가족은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8년간 키웠던 토끼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저희 가족은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는 반려 동물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강아지 분양 샵에 있는 한 강아지가 유리를 앞발로 긁으며 격하게 제게 반응을 했어요. 실은 저는 원래 이런 가게에 상당히 거부감이 있고 또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이 친구를 보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들어갔습니다. 보니까 다른 강아지들은 아직 생후 2-3개월 꼬물이라 자거나 혼자 놀기 바쁜데, 이 친구만 생후 거의 6개월이 다 되도록 분양되지 않아 오랜 시간 그 작은 공간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새끼 때부터 데려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런 분양 샵에, 소위 말해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동물들은 몸집이 너무 크면 안 돼서 밥을 최소한의 양만 조금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밥도 밥이지만 처해 있는 환경도 너무 마음이 아팠고, 이 친구가 더 자랐는데도 분양이 안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마음에 순간적으로 파도가 확 일었어요. 그 후로 일주일 간 매일 가서 이 친구를 만났고, 결국 8일째 되던 날 결심을 하고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토끼를 보내고 다짐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지요.
아, 이 친구는 "킹 찰스 스파니엘"이라는 종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너와의 산책
내내 플라스틱 공간 안에만 갇혀 있던 강아지는 처음 땅에 내려놓으면 잘 걷지 못하는데요, 이 친구도 마찬가지였어요. 빨리 생활에 적응시키고자 모든 접종이 끝난 후 매일매일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동네에 강아지가 많이 살았는데 이 친구 참 강아지 사람 할 것 없이 친화력도 너무 좋고 어찌나 힘차게 뛰어노는지, 동네 분들이 "지축이"라는 애칭을 지어 주셨어요. 세~상 빨빨거리며 뛰어다니고 이 집 저 집 들쑤시는 "천방지축" 이라고요.
너.. MBTI E로 시작하지..?
저는 이때까지 목적 없는 외출을 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어요. 이유 없이 산책을 나간다는 건 거의 해본 적이 없었고, 약속이 있거나, 처리할 업무가 있다거나, 뭘 사러 가야 한다거나, 출근, 이런 게 아니고서야 그냥 시간을 보내러 여유롭게 집 앞에 나가 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요.
그런데 반려견이 생기고 나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엔 의무적으로 매일매일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게 몇 달 지나니 습관이 되어 하루 두 번, 세 번 나가는 날도 생겼습니다. 너무 자주 나가서 그런지 어느 시기에는 집에서 배변을 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없이 똥오줌 뉘러 나가는 날들도 있었지요.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요!
그러던 어느 날 선선한 밤 산책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네가 날 산책시켜주는 것 같아
오늘 일 힘들었던 거 안다개, 나가서 하늘 풀도 보고 시원한 바람 쐬자개
처음에는 개주인이라면 응당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매일 산책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작된 이 친구와의 산책이, 1년 넘게 반복되니까 문득 그 반대로 느껴졌습니다.
강아지가 나를 산책시켜 주는 것 같은데?
너 아니면 내가 이렇게 여유 있게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머리 안 쓰고 그냥 산책 그 자체에만 집중하며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까? 내가 내 의지로 이런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면서요.
하루에 꼭 한 번은 일상의 모든 압박과 고민을 벗고, 나에게 정말 무해하고 청정한 느낌을 주는 내 반려견과의 오붓한 산책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내가 주인으로서 너에게 책임을 다하는 의미로 시작했지만 오히려 네가 날 쉬게 해 주는 것 같고, 내 일상에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자 휴식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주인의삶
반려 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위로는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바라만 봐도 이 생명체는 나를 다 이해해주는 것만 같지요. 주인이 없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그 책임감이 버겁다는 생각보다는 이 친구가 가르쳐 주는 사랑과 위로의 크기가 참 큰 것 같아요.
저는 제 반려견과의 일상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할 때 꼭 쓰는 해시태그가 있습니다. #개주인의삶 인데요, 제가 개주인이 되지 않았다면 겪어보지 못했을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길 때마다 꼭 이 태그를 붙여 업로드합니다. 저만 쓰는 해시태그는 아니라 이렇게 검색해 보시면 많은 강아지 친구들이 나오기는 하네요. :)
아무튼 특정 해시태그를 붙여 따로 규정하고 싶을 정도로 반려견 (반려동물)과 그 반려인의 관계는 세상 어떤 관계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무언가 인 것 같아요. 앞으로 #개주인의삶 시리즈로 이 친구와 저와의 재밌는 일상도 브런치에 공유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