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휴가 기간 중 '차일드 인 타임' 이 각색된 영화를 함께 보았다. 그이와 함께. 제안한 건 내 쪽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온 10년 차 부부가 서로 중첩될 수 있는 방법은, 두 사람이 시간의 교집합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함은 먼저 다가가는 일. 그리하여 늘 영화를 보는 그의 등을 지켜보면서 식탁 위에서 책을 읽든가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제안'을 한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며.
그의 리모컨 재핑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한 영화에 멈췄다. 그 후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대화를. 어쩌면 '차일드 인 타임'이었기에 가능했을 대화라 생각한다. 결혼과 부부, 그리고 자녀를 비롯하여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대해서도. 스티븐과 줄스, 그리고 셀마와 찰스 부부의 상황을 빗대어가며. 비록 짧았지만 그 시간 덕에 휴가 기간 잠깐의 냉전과 쌓였던 서운함은 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든 오래든 아니면 그런 척을 하든, 그렇게 믿고 싶은 '나' 였든...
양장본 25만 부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어른의 눈을 통해 쓴, 아동을 위한 소설' (p.57)의 작가인 스티븐의 초서, '레모네이드'는 그를 순식간에 유명한 아동문학 작가로 만든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씻기지 못하는 상처가 존재하는데 바로 자신의 딸인 케이트를 5세의 나이에 잃어버리고 만 것. 그야말로 갑자기 찾아온 생이별. 자식을 잃은 부부의 상실감은 길을 달리 한다. 아내 줄스의 무력함은 스티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6년을 같이 산 부부이지만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는 '이제 서로 주고받는 위안은, 어루만짐은, 사랑은 없었다. 이전의 친밀감, 둘이 같은 편이라는 습관적인 전제는 사라져다. 그들은 각자의 상실감을 붙들고 웅크렸고, 말하지 않은 원망이 쌓이기 시작했다.' (p.40). 상실에 대한 부부의 대처는 달랐다. 대처 조차 할 수 없었을 그와 그녀의 감정을 대하는 각자의 방법은 같을 수가 없는 것임을... 이상하게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들의 혼란스러움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변모해 가는지에 대해서.
정적이 흘러들더니 깊어졌다. 케이트의 옷과 장난감은 여전히 아파트 안에 널려 있었고 아이의 침대도 정돈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오후, 어지럽던 물건들이 사라졌다. 스티븐은 딸의 방에서 시트를 벗겨낸 침대와 방문 옆에 높인 불룩한 비닐 자루 세 개를 보았다. 그는 줄리에게 화가 났고 여성 특유의 자해 성향, 의도적인 패배주의라고 나름대로 이해했지만 그 행동에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분노의 여지나 감정의 배출구는 없었다. 그들은 대립할 기력도 없이, 수렁에 빠진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갑자기 그들의 슬픔은 개별적이고 배타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목록을 들고 매일 고단한 발품을 팔았고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혼자만의 깊은 슬픔에 빠져다. p.39
@영화, 차일드 인 타임 중
신혼 초, 나는 유산을 했다. 처음이어서 대처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실 대처한 '이후' 도 처음이었기에 첩첩산중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처음은 강렬한 경험으로 각인되며 특히 그 경험이 안 좋은 쪽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강렬함은 더 큰 힘을 지니게 되는 법인 것처럼. 소설과 영화를 오고 가며 잠깐 그 과거가 떠올랐다. 연속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아이를 보지도 못한 채 흘려버려야 했던 두 번의 유산, 수술대 위, 친정 엄마의 얼굴, 그의 찡그리는 표정.... 그 모든 장면들 모두. 여전히도 징그럽게 말끔히 씻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티븐의 '습관'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습관 그 이상'이었을 테니까. '습관이라면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깊이 뿌리내린 성향, 경험이 성격에 새긴 윤곽'이었을 테니까. (p.6) 그 습관이 얼마나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줄리의 무력함과 스티븐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그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할 것 같았다. 줄리는 스티븐을 볼 자신이 없었을 테다. 마치 그 시절, 내가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미국으로 돌연 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과 비슷하다면....
케이트의 성장이 시간 자체의 핵심적인 의미로 자리 잡았다. 강박적 슬픔의 소산인 아이의 환상 속 성장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 무엇도 그 근육질 시계를 멈출 수 없었으니 - 필수적이기도 했다. 아이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환상이 없다면 그는 길을 잃고,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아이의 아버지였다. p.8,
숨이 막혔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훔쳐 갔다"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말은 바로 포착되어 주변부로, 근처를 지나다 소란에 이끌려 모인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p. 28
한편, 작품 속 또 다른 인물들은 셀마와 찰스 부부를 통해서 '어른'과 '아이'의 시선 그리고 그들을 가르는 경계, 그리고 그런 계층을 가르는 '시간'에 대해서까지도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다. 정계에 나가 공직을 얻고 출판 사업을 성공시키고 아동 보육 사업의 일환에 일조하던 찰스가 갑자기 돌연 사퇴를 발표하고 시골로 귀농을 선언하는 것이나, 무려 12살이나 연상인 셀마를 선택했던 것들. 그가 되고 싶었던 '진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서마 저도.
다들 짐작도 못 할 텐데, 찰스에게는 내적인 삶이 따로 있어. 사실, 내적인 삶을 넘어서는 내적인 강박, 별개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인가 싶어도 그냥 그렇게 이해해. 그이는 그 세계가 있다는 걸 부인하는 편이지만, 항상 거기 있었고 그를 사로잡았고 지금의 그 사람을 만들었어. 찰스가 욕망하는 것, 그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로 하는 일, 지금까지 해온 일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어. 그런 충돌 때문에 그이가 그렇게 극성스러웠고 그토록 성공에 목맸던 거야. p.82
아동문학작가인 그러서, 조금은 찰스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던.
자신을 속이면 살아야 하는 '어른' 으로서의 '현실'과, 내내 유년이라는 '시간' 속에 박제되고 싶었던 '아이' 로서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다 겨우 성공기에 들어선 찰스. 그는 현세의 환멸을 느끼고 말아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아내와 귀농을 하지만, 유치한 아이와도 같은 자유분방한 생활의 연속은, 어른의 몸으로, 어른인 자신을 지속적으로 찾는 '현실'의 사람들로 인해, 그리고 내면의 자신조차도 충돌을 거듭하다 결국 이뤄지지 않은 '꿈'처럼, 죽음으로서 그의 꿈을 이뤘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남겨진 셀마는 어떤 방식으로 배우자를 잃은 그 상실의 시간을 지나갔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셀마는 자신이 알고 있던 찰스를 일찌감치 잃었고, 새로운 찰스를 만났던 건 아니었을까. 시골에서. 다 큰 어른의 천방지축이 되어 결국 숲에서 죽음을 맞이한 새로운 그에 대해서...
유명해지고 싶고 언젠가는 총리가 될 거라는 말도 듣고 싶은데, 세상 근심 없는 어린아이, 책임도 없고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기도 했던 거야. 그건 즉흥적인 괴벽이 아니었어. 그이의 사적인 시간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환상이었지. 그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이 섹스를 원하듯이 그걸 원했어. 사실, 거기에는 성적인 측면도 있었지. 반바지를 입고 가정교사로 분장한 성매매 여성에게 엉덩이를 때려 달라고도 했고. p.374-5
유년기의 안전, 무력함,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 돈이나 결정이나 계획에서 요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원한 거지. 그이는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약속과 일정과 시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어. 그에에게 유년기란 시간과 무관했어. 그게 무슨 신비스러운 상태인 것처럼 얘기했지. 그이는 이 모든 걸 갈구했고 내게 끊임없이 얘기했고 우울감에 빠졌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어른들의 세상에서 수백 가지 의무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달아난 거야. p.376-7
찰스가 돌연 아이가 되고 만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테지만, 아무튼 찰스의 죽음을 맞이한 스티븐의 생에도 지속적인 상실만이 다가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흘러가나 여전히 잃어버린 딸을 시간 속에서 놓아주지 않고 자신의 관념 속에서 키워 나가는 아버지로서의 스티븐은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음울한 사색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생각의 창조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것을. (p.253)
생각이란 적극적이고 통제된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는 조롱과 악의와 편집증, 모순과 자기 연민의 이미지와 주장으로 이루어진 군중의 행진을 바라본 것뿐이었다. 명료하게 거리를 두고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p. 253
루스 라일이 딸을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을 기억하며 그는 케이트가 얼마나 많은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지, 2년 반 동안 얼마나 많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을지 깨달았고,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태 미쳐 있었고 이제는 정화되었다고 느꼈다. p.285
@영화 차일드 인 타임 중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한 나는 아이 낳기를 포기했었다. 사실 원하지도 않았다. 자녀 없이도 '부부' 로서 살아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나와는 달리 언제나 아이를 원했던 그의 간절함이 결국 통했던 걸까. 나는 '다시' 임신을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쌍둥이라던 산부인과 의사의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울었을까. 사실은 기쁨의 눈물이었다기보다는 두 번 잃었던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지 못한 채 흘려버리고 말았던 그 아이 두 명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아서... 그래서 줄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만 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은 채로 내내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몰게 만든, 그 시절의 미안한 내가 떠올라서.
내가 여기에 온 건 케이트를 잃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위해서였어. 그건 내 과제, 말하자면 내 일이었어, 결혼 생활보다, 혹은 음악보다도 더 중요한 일. 새로운 아이보다 더 중요해고. 그 사실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난 가라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말 정말 나쁜 날들이 있었어. 그런 기분은 다시 고개를 들 때마다 더욱 강해지고 매력적이었지.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마음속에서 케이트를 따라 달려가는 짓을 그만둬야 했어. 케이트 때문에 아프고, 케이트가 현관에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숲 속에서 케이트를 보고, 주전자에 물을 끓일 때마다 케이트의 목소리를 듣는 걸 멈춰야 했어. 케이트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그 아이를 이젠 그만 원해야 해어.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던 거고, 그 시간이 임신 기간보다 더 길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완전히 잘 해내지는 못했지만... p.402
@영화 차일드 인 타임 중
줄스와 스티븐에게는 새로운 아이가 생겼다. 아마 케이트를 놓아줄 수 있는 시간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한편 그들은 마냥 기쁜 삶을 산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부모' 로서의 의무는 다해나가지 않을까. 사실 어디 그뿐이랴. 더 큰 사랑을 아이에게 주지 못해서 힘들어할지도 모를 테다. 물론 다른 시선에서 생각하자면 최소한 결혼 이후 부부로서의 욕망은 서서히 시들어갈지언정. 역설적이나 사실상 아이를 기르는 기혼자들의 흔하지만 또 대단한 그 모든 감정과 행동과 생각의 원천들은 이제는 '아이'로부터 나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걸... 최소한 아이를 잃어봤고 다시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들을 기르면서 기쁨과 절망, 고통과 환희의 시간을 경험하는 나로서는.
차일드 인 타임의 줄스와 스티븐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시간에 의지한 채.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을 품고, 그렇게 새 기억들을 만들고 살아가는, 시간의 기적을 경험한 채로... 박완서 선생님의 말 대로, '시간은 신'인 것만 같다. 유한한 시간, 멈춤 없는 시간. 영원히 '아이'로 살 수 없는 시간, 그러나 그런 내면의 '아이' 다움과, 실제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로 인해 살아나가게 되는 시간....
품 안의 너희들인 이 시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기쁨이든 절망이든 환희든 슬픔이든, 무엇이든 그 원천인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