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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0. 2017

#17. 단 하루의 오늘

사랑해요. 오늘도

 사람으로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하면 항상 중얼거리는 한마디가 있다. 


'단 하루의 오늘. 좋은 하루 고헤라' 


 매일의 한 마디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날 따라 유독 공기는 참 차가웠다. 계절이 이미 바뀐 탓이었으려나. 코끝이 너무 시려서 콧물이 줄줄 흐르기만 했다. 콧물을 닦으며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듣고 있던 이어폰을 떨어 뜨려서 주으려던 찰나, 발을 헛디뎌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하필 치마를 입고 온 탓에 무릎이 까지고 입고 있던 살색 스타킹에 구멍이 났다. 그대로 구멍 난 스타킹 사이로 살갗이 파인 채 피가 났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어.... 뭐지


빨갛지 않은, 진한 녹색 빛깔이 나는 색깔이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지금은.... 7시야. 아침인데. 


 약간 흐르다가 이내 멈춰 버린 진한 녹색 피를 보며 길가에 멍하니 잠시 서 있었다. 피가 났는데 빨간색이 아닌 녹색이 낮에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날은 그렇게 이상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날도 단 하루의 오늘에 그치지 않을 오늘, 사실 이미 한 사람 덕분에 세상의 경계는 뒤바뀌어진 채 흘러가고 있었다. 


나를 지키면서 상대를 사랑하는 건강한 경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경계라는 게 온전히 나를 지킬 수 있는 한계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경계를 넘어가려 했고 우리는 사회가 통용하는 경계를 넘어갔었다. 그와 나는 넘어갔다는 표현을 사용해야 했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나로 온전하게 있을 수 있는 울타리가, 그를 향한 마음의 선이 진해질수록 나보단 그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날의 추운 바람도, 녹색빛 피도 별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중요했던 건 나의 시선 속에 들어오는 그를 둘러싼 모든 일상의 범주들이었다. 

 그가 스쳐 지나간 길가에 떨어진 낙엽들, 엘리베이터에서 눌렀던 손자국이 남겨졌을 버튼 하나, 노트북을 가지고 들락날락하는 어떤 회의실의 책상과 의자, 와이셔츠 밑에 떨어진 단추 한 조각. 오른쪽 팔뚝의 불주사 자국, 오뚝한 콧날 위의 작은 점처럼 생긴 모양의 콧잔등의 상처, 아랫입술의 얕게 까인 살점과 같은 것들. 


 같이 있던 밤, 고양이로 변했던 날, 그가 혼자 방을 나왔고 나는 몰래 고양이로 그 뒤를 뒤따라 나왔던 그 밤. 그 이후부터 나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던 걸까. 


지혜의 숲에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그가 생각이 났다. 일상은 이렇게 달리 흘러가고 있다. 왠지 모르게 아쉬워진다. 


내가 세운 경계는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기준이 된다. 

 이미 무너진 마음의 경계는 나의 움직임을 결정하고 행동시키게 만들었다. 그를 향한 나의 움직임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또 그래서 나 또한 막지 못하는 당연함이었다. 


 순간의 감정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행동이었다. 그의 일상이 궁금해지고 그래서 연락을 하고. 돌아오지 않을 답신을 기다리며 마음이 점점 더 아려오는 순간.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할머니를, 엄마를, 유키를, 현지를 한 번이라도 그보다 더 생각했다면 나는 과연 그에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만나고자 했을까. 모르겠다. 


그럴수록 그는 나를 점점 피해갔다. 그 날 이후에 더더욱.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이 가득할 때 10번 참다가 1번 정도의 짧은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종종 마주하는 그는 일부러 나의 눈을 피하는 듯, 아주 차가운 인사를 건네고 일을 할 뿐이었다. 그 밤 이후로 그는 조금씩 나와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경계하는 모습을. 


그는 멀어지려 했으나 나는 다가가려 했다.
우리의 경계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경계 지키기 연습을 실패한 걸 지도 모른다. 사람과 고양이 사이의 경계, 그와 나 사이의 경계를. 엄밀히 타인에 불과했던 그를 향한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면서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내 생각은 이러저러한 사소로운 간섭을 하며 그의 일상을 상상하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경계를 지켜주어야 한다지만, 나는 이미 나의 일과 그의 일,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 나의 감정과 그의 감정을 분리해서 볼 자신이 없었다. 하나가 된 이후엔 더더욱 그래 졌다. 현지가 느꼈다는 인간의 감정이 그제야 이해되고 있었다. 


그와 자고 난 이후는 이상하게 공허해져 
허무하단 소리야? 
고헤 라. 이 언니가 하는 말, 너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아 근데 뭐 상관없어. 그때 좋으니깐 됐어. 
그때뿐이면 어떡해.. 
?
현지야 난 잘 모르겠지만, 그건 슬플 거 같아. 그때뿐이라면..
흠... 글쎄.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네. 하여간 고헤 라 속을 알 수 없는 거 하고는 여전해 
그럴 거 같아. 난.. 언젠가. 만약 나도 너처럼 그럴 수 있으면.. 그때의 기쁨이 그때뿐이 아녔으면 좋겠어. 
시작하는 건 안 어려워. 유지하는 게 힘들지. 
아....


 현지 말이 맞았다. 새로 시작하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하나가 되기로 결심한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깐. 충동과 간절함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있었다마는, 여하튼 시작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시작 이후의 감정과 마음을 그대로 오래 유지하기가 힘겨울 뿐. 오래 유지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불현듯 닥친다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래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사람 동물들에게는 '간절함'이라는 게 있는 걸지 모르겠다. 고양이의 간절함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었지만 우리에겐 '생존'이라는 간절함이 좀 더 컸다. 


생존에 대한 간절한 애착.
이 사람 세계에서 살아남아서 수명을 다해야 한다는 애착 말이다. 


 그래서... 그 본능적인 생존에 대한 간절한 애착이 있는 '고양이 여자'라는 게, 그 나네 경계가 무너지고 나의 행동의 시작이 어렵지 않았던 것 자체가 내게는 치명적인 문제였을지 모르겠다. 

 

 그 날, 날이 덜 추웠다면, 콧 잔등이 덜 간지러웠다면, 지나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면. 그와 그를 뒤쫓아 달려오고 있던 진우와 마주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퇴근을 하고 회사를 빠져나오는 길에 그의 차를 보았다. 그가 막 주차장에서 차를 빼 가지고 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반대편 신호등 스타벅스 앞에 진우가 보였다. 꽤 많이 큰 듯, 머리카락이 부쩍 길어진 모습이다. 


아.. 진우구나.. 그리고 엄마도 같이 있네... 같이 있구나. 


그때였다. 빵빵대며 반대편에서 화물 트럭이 차선을 넘나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진우야 거기 있어 아빠가 갈게. 건너오지 말고 있어. 수현아 애 뒤에 있잖아! 핸드폰 좀 꺼봐! 
악! 
헤라 씨!!! 
으아아아앙


 경계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사람의 처절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있는 힘껏 진우가 그 사람인 줄 알고 바로 뛰어들었다.  



 사고였다. 아주 순식간의 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아주 희미하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유독 엄마와 할머니의 흐느끼는 소리만큼은 희미하게 생각이 나곤 했다. 내가 슬플 때 혹은 어떤 이상한 기묘한 위험함을 느낄 때는 더더욱. 


어미야. 애들은 어디로 튈지 몰라 항상 조심해야지. 특히 헤라는 말이야 다치면 절대 안 돼. 큰일 난다
알겠어요 미안..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 어쩌죠 이제..
걱정마라. 내가 있으니깐. 내 피를 조금 먹이도록 해. 그럼 곧 나을 거야. 대신 회복력은 빠를 테니깐..
하아... 이 업보를 어쩜 좋아요 
고양이 여자들은 어쩔 수 없어. 걱정마라 괜찮아. 아직 살아있어 이 거봐. 대신 기억을 잘 못할 거야. 이 사고를


점점 기억이 흐릿해져 갔다. 눈을 반쯤 떠 있었을 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 나타났다 
헤라 씨 정신 차려요 내 말 들려요??! 
아.... 나.... 
.... 헤라 씨!! 고헤 라!! 기다려 119 불렀으니깐 조금만 기다려요. 
보... 여
헤라야.......
보고..싶었.....어요. 왜.... 
...... 고헤 라... 정신 차려 제발... 눈 감지 말고... 제발 내가... 내가 미안....
오.... 늘.... 사......
.....
사랑... 해.. 요... 오늘.. 도
고헤 라....! 




그녀를 피해야만 했다. 

 그 밤, 그렇게 그녀가 나를 두고 먼저 떠났을 때,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녀가 먼저 그렇게 나를 두고 아무 언질도 없이 유령처럼 사라 졌는지. 사실 매우 궁금했고 어떻게 그렇게 혼자 갈 수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지를 캐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자격이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회사 곳곳에서 나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를 내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다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보면 안 된 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나는 이제 그녀를 떠날 사람이니 더 이상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여전히 만나고 싶은 그녀가 나를 바라볼 때 마음이 저려온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침묵과 싸늘한 시선의 거짓말로 무장한 채 그녀를 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멀어져야 함을 결심했다. 

 더불어 수현이와의 생활도 정리하기로 했다. 진우의 핑계를 대는 건 아니었지만 사실 그동안 진우라는 짐은 그저 내 마음의 짐을 대신 짊어지려는 핑계처럼 들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내 마음은 온통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고, 이미 깨달은 이상 수현이와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숨길 수가 없었기에. 나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렇게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로 살기로. 진짜 원했던 나로 살기로. 


수현아 할 말이 있어. 잠깐 얘기 좀 하자 
..... 
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 내 말은 
거기까지만 해. 구질구질하니깐. 
... 수현아 
알고 있었어
아....
쌤쌤이야 알아? 
....
당신도 알고 있으면서 여태껏 조용했잖아. 내가 미국에 와서도 마이클 만났다는 거 
...... 내가 안다는 걸, 알고 있었니? 
우리가 이래. 알아? 항상 이런 식이지. 
근데 왜 말 안 했어....
당신, 이미 미국 오기 전부터 누가 있었다는 거 느껴졌어. 나랑 진우 보면서도 멍하니 있을 때 많았으니깐
....
당신이라는 사람 내가 모를 줄 알아? 알아. 너무 잘 알아서 그동안 탈이었지 
넌 날 잘 몰랐어..
그래 몰랐어.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 그 속을...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 안 그래 
그래 중요하지 않지... 지금...
쿠킹스튜디오 차렸고. 그래 당신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알아. 난 원하는 거 다 얻었고, 솔직히 나도 인정해. 내가 못된 년이라는 거 
나도 못된 놈이다
우린 서로에게 못됐지만 진우에게는 아니잖아 알지.
응....
서류 정리해놨어. 이미. 당신이 말 꺼내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 수현아
당신 마음. 이미 정리될 줄 알았어. 사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정리했거든. 어느 정도는.
.... 
아무튼 내 걱정하지 마. 진우 생각만 해. 당신이 같이 살자 하면 난 살 생각도 있었어. 
.... 미안... 내가 이제는 더 이상..
.... 알아. 돌이킬 수 없다는 거 
....
다시 생각 안 할 거지? 당신이란 남자... 그런 사람이니깐.
어.... 충분히... 충분히 아팠다... 미안.. 이게 내 최선의 선택이야 널 위해서도 진우를...... 모르겠다. 진우는
진우는 생각하지 마. 
....
아이는 아이의 삶이 있어. 당신은 당신, 그리고 나는 나. 알아? 늙어 빠지면 자식은 떠나게 돼 있어. 
...... 수현아 
이게 나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되어 가고 있고...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인정해 그냥... 난 인정했어 내가 어떤 남자한테 정착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거 인정하니깐...
...... 넌 왜 나랑 결혼했니 
.... 좋았어. 
뭐?
내가 정착할 수 있는 남자라고 믿었거든. 당신 최소한 그런 사람이었으니깐. 
.... 근데 
근데 결국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난 또 그리로 마음이 가겠지. 
...
나도 잘한 거 없다는 거 알아. 우리가 평범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
미안..... 하다 
.... 됐어. 그런 말 듣기 싫어. 최소한 다른 남자들한테 들어도 당신한텐 듣고 싶지 않아. 
...... 
진우는 내가 키워... 알지? 
.... 그래 
언제 떠나?
... 알고 있었어? 
미국 취업 비자랑 발권 티켓 봤어. 
....... 
당신이 나 보다 더 잔인해. 알아?
미안하다...
..... 예뻐?
...?
나보다 당신 더 이해해줄 수 있어? 
.... 모르겠어. 헤어졌어 아니 우리... 사실 만난 적 없어.. 너처럼.... 만난 적 없다. 
.... 바보 멍청이. 못난 인간 
....
대놓고 연애질도 못하는 인간이 무슨.....
.....
짐 정리해서 당신이 나가. 뭐 이미 오피스텔까지 구해 놓은 당신인데 내가 걱정할 바 아니지만..
고맙다... 이해해줘서 
됐어. 내일 밥이나 먹어. 저녁에 퇴근시간에 맞춰서 진우랑 갈 테니깐. 마지막... 저녁인가. 
그래. 6시까지 회사 앞으로 와. 기다릴게 


수현이와 진우는 이렇게 여전히 내 눈 앞에 살아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닌 것 같았다. 


고헤 라 제발 정신 차려..... 이게 뭐야 
....사..랑해....요 오늘... 도 
헤라...... 고헤 라.....! 안돼 아직 할 말이...


그러나 그녀는. 이제야 겨우 마음을 열었지만 그래서 다시 떠나려 하는 못내 아쉽고 미안하며 평생 그리워할 그 여자는, 지금 내 눈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내내 떨리는 손과 마음을 부여잡은 채 나는 119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자신의 바닥이 너무나 명확히 드러난다. 


 혼자 짐을 정리하면서도 내내 헤라 생각에 핸드폰을 연신 만져 대던 나였다. 그럴 때마다 내 비겁한 모습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누구든 만나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했다. 


 소비한 시간이 후회가 됐다. 

 그녀가 정작 내 눈 앞에 있는데. 정작 그런 그녀는 이제 나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다. 이렇게 후회되는 게 허무한 우리들의 시간이라면. 왜 진작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행동을 하면서 살지 못했던 걸까. 눈물이 난다. 웬만해선 울지 않는 나를 결국 울게 만드는 단 하나의 여자다. 이 여자를 다시 놓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말 없는 그녀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병원에 가는 일뿐. 그뿐이다. 


보호자 되십니까 
아니.... 네 보호자는 아니지만 
보호자 연락해 주세요 응급 처치 들어가고 바로 수술해야 될 거 같습니다. 
아.... 


 그녀의 핸드폰을 열자마자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을 온통 자신의 핸드폰 문자로 1:1 문자를 보낸 내역이 나왔다. 


오늘은 회식이 있는 것 같네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가다가 넘어졌는데 피가 났어요. 근데 생각이 났어요. 미안...
밥은 먹었어요? 오늘 점심때 나는 책을 읽었어요. 
지혜의 숲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가진 못하겠죠. 
전화는 역시 불편하겠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 버튼 누르다가 말았네요 
미안해요... 오늘은 길 가다가 넘어졌는데 피가 났어요 
오늘 날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처럼 되는 걸 바랐지만, 또한 그 말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의 소스라침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지 모르겠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가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 내뱉는 말이 때론 나를 지배한다. 



제발 헤라야.... 미안 이제야 만났는데 정말 미안해요... 눈 좀 떠봐요...
보호자 연락되셨어요? 
아 네 지금 집에 전화를 걸... 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의 50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라의 어머님이셨다 


여보세요? 
아 저... 고 헤라 씨 어머님 되시나요? 저....
..... 헤라 어딨나요 


 엄마와 딸이라는 건 그런 걸까. 나와 진우 사이와는 또 다른, 그녀들만의 연결됨을 수화기를 건너서 들려오는 헤라 어머니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죄송함과 죄책감을 부여잡은 채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분당 서울대병원입니다 여기 헤라 씨가... 응급실에...
그대로 있어요 거기 
죄송합니다..


 헐레벌떡 누군가가 응급실 문을 열고 헤라의 이름을 불렀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아서 처음엔 몰랐으나 헤라의 어머니였다.


헤라야 너........ 
아... 죄송합니다
당신인가요
.....
나가주세요. 
.....
헤라한테 떨어져 줘요. 


그녀는 떨고 있었다. 멀리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서 그리고 헤라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응급실 밖에서 3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의 수술이 끝나기까지. 초조했다. 비겁한 내 마음이 눈물로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수현아...
그 여자 맞지?
.....
살았어? 
모르겠어 지금 수술 중이야 
...... 빚졌네.........
......
내 평생 내 남자가 좋아한 딴 년한테 고맙긴 또 처음이네 
....
고맙다고 전해줘 그리고...
....
미안하다고도. 


수술이 끝나갔다. 의사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됐나요?
가족 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보호자와 이야기가 좀 필요한데.... 저희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



헤라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가요 어서. 당신 보기 싫으니깐. 가란 말이야 내 딸한테서 떨어지라고! 


그녀를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다. 나는 또 여전히 보내야만 한다. 이번엔 원하지 않았으나 이미 시간은 지나가고 때는 놓쳐버렸다. 


제발, 살아만 줘. 고헤 라..... 이번엔 내가... 내가 꼭 연락할 테니. 이번엔 연락 꼭 받을 테니까. 


 오늘, 부재중 통화가 찍혀있었던 그녀의 전화를 나는 받지 않은 걸 마음 깊이 후회하며 병원을 그렇게 빠져나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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