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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14. 2021

냉정과 열정 사이

冷靜と情熱のあぃだ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Rosso)

단지,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어쨌든 다시 한번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아보고 싶다. (Blue)


-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and Blue - 




기억은 대체로 사적이다. 그럴 수밖에. 같은 현상이어도 너와 나, 우리는 각자 다르게 기억하고 다른 시점에 망각하며 그 기억은 다시 각자의 일상 어떤 타이밍에 맞춰 다시금 소생되기에. 그것은 마치 프루스트식으로 - 그리고 들뢰즈에 의지해서 - 생각하자면, 기억이란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자발적 기억'과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일을 계기로 우연히 떠오를 때 경험하는 '비자발적 기억'으로 구분된다. 그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이 선사하는 맛에 의해 주인공인 '나'의 기억이 돌연 상기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사랑의 기억은 어떠할까. 누군가에게는 사랑 '했다'는 과거형의 기억이, 다른 한쪽에선 여전히 사랑 '하고 있다'는 의지에 따라 수행되어 여전히 현재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혹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기억은 다시금 재생되고 편집되어 찾아온다. 의도치 않게. 비자발적으로. 그리하여 궁금해지고 마는 것이다. 기억이란 기억하는 자 혹은 기억되는 자, 과연 누구에게 선물일지. 어느 편에서 웃고 있는 '기억'인 것인지. 그 연장선에서 생각하자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오랜 시간 동안 끝내 잊을 수 없던 두 사람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일상의 궤도 안에서 내내 간직된 두 사람의 기억. '나만이 기억하고 있을 어떤 약속이 있다' 고 믿었던 여자 아오이와, '믿고 있다면 다시 만날 것만 같았다' 고 생각하며 사는 남자 쥰세이의 이야기. 



20년 전에 나온 소설은 그 이후 영화가 되었고 거듭 재쇄와 개정판, 재개봉을 거듭했지만 '기억' 여전히 하나였다. 첫 기억... 




젊고 투명하고 모든 게 불안하고 불확실했던 그 시절 두 사람은 그야말로 뜨겁게 사랑했었다. 서로가 자기 자신 그 이상의 것으로. 비록 한 철의 뜨거움으로 멈춰야 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아주 오래 흘러도 어떤 기억들은 선명하게도 그들의 일상을 종종 아니 자주 침범한다. 이태리에서 미국인 연인과 함께 생활하며 그야말로 '덜함도 더함도 없다. 조용하고 온화하고 충족.'(냉정과 열정 사이, 이하 Rosso, p. 138) 되는 생활을 하면서도 비가 오는 날 책을 읽던가 목욕을 하며 그녀는 생각하고 만다. '아가타 쥰세이는, 내 인생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무엇이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먼 옛날 학생 시절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는 무엇' 이라고. 그가 그녀를 모델로 종종 그림을 그리던 그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쥰세이는 나를 종이 위에 옮겨 놓는 오른손의 정확한 움직임. 나는 자신이 종이 위에 정착되는 똑같은 리듬과 속도로 쥰세이 안에 정착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하고 만다.  (Rosso, p. 97, 99) 



도쿄에서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 아주 오래전에. 어처구니없이. 그 시절 그림을 그리다가 헤어진 이후 복원사가 되어 피렌체에서 생활하던 그 또한 그녀와 전혀 다른 성향의 연인을 안고 있던 중에도 '아오이'라는 이름을 불러버리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는 일상과 익숙한 편이 되고 만다. 그럴 수밖에. 몸과 기억에 확실히 각인된 누군가를 쉽게 잊을 순 없을 테다. 그녀를 일상으로 쫓아 내지 못하는 그는 다른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결국 아오이가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난 아직 아오이를 가슴속에서 내몰아 버릴 정도의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냉정과 열정사이, 이하 Blue, p.16) ' 고 생각하는 쥰세이는 내내 그녀와 했던 약속의 날인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산다. '사람이란 사랑한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아오이가 그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Blue, p.16) 



오랜 시간이 흘러도 툭툭 건드려지는 기억을 그녀는 애써 잊으려 하진 않는다. 다만 흐르게 놓아둘 뿐. 



비록 다른 장소 다른 사람과 각자의 생활을 흐르면서도 두 사람이 '우리' 였을 때 했던 그 옛날의 약속은 결국 기억된다. 물론 두 사람은 정작 서로 기억하며 산다는 것을 모르는채로.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르리라는 기대로, 어떤 약속을 하고 만 그녀는 여전히 그날을 어렴풋이 기대하며 기억한다. '그때 나는 평소에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으므로.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꼭 이 사람과 같이 오르고 싶다. 그렇게 생각헀던 것이다. 쥰세이는, 너무도 쥰세이 답게 주저 없이 약속해주었다. 좋아 10년 뒤 5월이라. 그때는 21세기네.라고. (Rosso, p. 152) 그도 두오모가 있는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약속을 홀로 지키기 위에 두오모 위에 오르면서도 생각한다.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0년 전, 그것도 몽롱한 약속이었으므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쿠폴라 위에서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면서 8년이란 시간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아오이가 오지 않아도 나는 무너져 버린 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재생시키고 당당히 내려올 것이다. '라고. (Blue, p. 227) 




- 내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중략) 모르잖니 미래 일은. 그러니까,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약속해 줘. 오늘의 이 마음을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으니까 약속하는 거야. 내 서른 살 생일날, 쿠폴라에서 기다려 주는 거야. 

- 네가 먼저 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 아니. 영원히 날 마음에 간직한다면 자기가 먼저 가서 기다려 줘야 해 

- 서른 살, 앞으로 10년 후의 일인데. 


마음의 오랜 상처가 점점 더 아파 오는 이유는 그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까지 이제 1년 남았다.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마치 꿈속에서 주고받은 듯한 근거도 없는 약속. 그러나 치유할 길 없는 내 마음은 분명히 그날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 냉정과 열정 사이, Blue, p. 99, 142, 그의 기억 - 



점점 다가간다는 걸 모른 채 
점점 가까워진다는 걸 모른 채 다만 볼 수 있기를, 보고 싶다고 '믿는' 사람 앞에는 무슨 기적이 펼쳐질까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아는 친구 덕분에 가까스로 그는 미처 몰랐던 그녀에 대한 과거의 오해를 알게 되고 사무치는 마음으로 참회할 '편지'를 쓰게 된다. '아오이에게 사죄하는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과거를 이겨 냈는가'를 느끼며. '그 가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나를 저주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서 그녀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오랜 세월의 끝자락을 우리 두 사람은 헤엄쳐 나가고 있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는 사죄' 일지언정. (blue, p.160)  반면 그녀도 내내 헤어질 수밖에 없던 시절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그때 그 말은 나에게, 온 세계로부터 거부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Rosso, p.143) ' 던 그 기억의 늪에 빠지곤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거리도, 대학 생활의 흔해빠진 즐거움도, 쥰세이와의 일도 모두 모두.' (Rosso, p.179)



사랑했던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의도치 않게. 누구의 잘못도 아닌, 마음이 식어버리지도 않은 채. 다만 너무 넘쳐났던 서로의 열정은 가려진 사실과 오해로 일순간에 냉정을 선언하게 만들고 서로 다른 곳 다른 이들과의 생활을 잇는다. 어떻게든 살아야는 했기에.  그럼에도 그들은 그 약속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이미 지난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약속은,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Rosso, p.225) ' 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결국 피렌체의 두오모로 향하게 된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Rosso, p.242) 그도 두오모를 오르며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가 나타나기를 슬프게 기대하면서. 그때. 피렌체의 햇살은 두 사람에게 향했던 걸까. 그는 듣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바람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귀는 그리운 그 감촉을 확실히 느끼고, 또 기억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서 있었다. ' (blue, p. 234) 



나는 온몸으로 쥰세이를 향하고, 한 손으로 쥰세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끼어들 수 없는 장소에서, 이 사람은 이미 새로운 인생을 쌓아 가고 있다.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나는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쥰세이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켰다. (Rosso, p.258)


사흘 동안, 우리는 필사적으로 8년이란 세월을 메우려 했다. 지칠 줄 모르고 서로를 탐하고 입을 맞추었다. 말이 막히면 서로를 안았다. 8년은 너무 길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헤엄치려 했지만 결코 며칠 사이에 넘을 수 있는 강은 아니었다.   (중략)  오로지 8년을 아오이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약속만을 유일한 삶의 의미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온 나 자신에게, 이제 와서 신은 무엇을 새로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blue, p.246, 253)




냉정과 열정 사이- 그 간격을 생각하게 된다. 얼마큼의 거리로 가까워져야 하고 또 얼마큼 떨어져야만 할지.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두오모에서의 만남을 뒤로하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마는 아오이와 쥰세이. 돌아가 봐야 한다는 자신을 말리지 않는 그에게 미소 지으며 담담히 생각하고 만다. '생각해 보면, 나는 붙잡아 주지 않는 쥰세이의 올바름과 성실함을 사랑한 것이었다.'라고. (Rosso, p.259) 그렇지만 자신의 얼굴이 뒤틀려진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그렇지만 사실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는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무엇보다 소중한 현재. 나는 아직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않고, 그녀를 그녀의 현재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8년을 다시 얼어붙게 해서는 안 된다. 역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고 외치면서. '(blue, p.255) 그렇게 그녀에게 다시 닿으려는 그는 '밀라노행 국제특급' 티켓을 받고 플랫폼을 향해 달리며 생각한다. '어떻게 하려는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모르니까 이렇게 달리는 것이다. 단지,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어쨌든 다시 한번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아보고 싶다.' 고. (blue, p.256) 



혹자들은 과거에 힘이 없다고,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지만,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을, 특히 잊고 싶지 않고 싶었던 좋은 기억은 일상 속에서 틈을 파고드는 파편이 되어 어떤 식으로든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에게 '10년 후의 두오모'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가진 과거의 기억을 벗 삼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나아간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접하고 비록 한 철이어도 오래 회자될 아오이와 쥰세이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철없던 나는 두 사람 덕분에 묘한 사랑관이 생겨 버렸다. 



자신만의 억양, 음성, 특이한 습관, 그리고 목소리... 내내 듣고 싶은, 그리운 소리라고 생각될 수 있기를.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라던, 그 문장을 기억하는 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 깊이 회자되는 존재가 되었기를. 혹은 되어가고 있기를...



가을밤의 그곳은 이럴 것 같았다. 바다를 닮은 하늘의 석양은 확실히 그리움- 



#아이들, 그, 그리고 그들을 떠올리며- 

#같은 주제 다른 시선이 들어간 두 권의 소설을 원한다면 단연코 그 원조격인 '냉정과 열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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