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
우리는 그녀의 슬픔이 평범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 디 아워스, 마이클 커닝햄, p. 303 -
일상을 지내다 가끔 몸과 마음이 내 것 같지 않게 자꾸만 어긋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마치 그런 느낌이다. 스텝이 제대로 꼬여버려 나도 모르게 발을 연신 헛 디디고 마는 것, 그래서 애를 써 보아도 좀처럼 일으켜지지 않은, 마치 어떤 늪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기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럴 땐 재빨리 어떤 문장들과 장면을 떠올려내려 애쓴다. 예컨대 '시간은 신이었을까' 라던, 마음에 깊숙이 각인된 박완서 선생님의 그 문장은 나로선 단연코 우선순위로 떠오르고 만다. 내게도 시간은 신이니까. 그 신에게 때로 배신당하는 것 같아도, 다시 돌아오는 시간들 앞에서 '나'라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끌어 앉고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특히 결혼을 하고 난 이후의 '시간'이라는 신 앞에서는 더더욱. 그리하여 나로서는 시간이 분명 신 같기만 하고 또 그 시간은 일종의 마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잊고 싶은 시간이 어느새 그리운 추억이 되고 마는 신묘한 마법이 벌어지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라는 신...
여기, 다른 시절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여성 세 명이 등장한다. 모두 '부인'이라 칭해지는 그녀들의 시간은 겹쳐질 리 없다. 1923년 런던 거리와 1949년의 LA의 가정집, 그리고 현재라 칭해지는 뉴욕 길거리에서 그녀들이 마주칠 수는 없다. 마법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그러나 사실은 그녀들을 교묘히 이어주는 마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댈러웨이 부인'을 경험하는 '시간' 이겠다. 1923년의 울프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 실제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을 어느 시절의 브라운 부인 (로라 브라운) 이 읽는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브라운 부인과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여성은 옛 연인에게 실제로 소설의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 (클러리서 본)이라고 불린다. 어쩌면 세 명의 여인들이 연결되는 건 시간의 마법이 아니었을까. 그녀들이 삶을 살아내는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그 기록들을 담아낸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책의 시작은 '울프' 부인부터 시작된다. 쓰는 여자 버지니아 울프의 작가로서의 삶을 '디아워스' 안에서 엿보다 보면 자꾸만 쓰고 싶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그녀는 글 앞에서 생각한다. '실내복을 입은 채 펜을 잡고 있는 자신은 그저 약간의 재능만 있을 뿐 두려움이 많고 확신이 없는, 그래서 어디서 시작하고 무엇을 쓸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여자일 뿐이라고.' (p.61, 울프 부인) 그러나 기어코 그녀가 펜을 들고 마는 것처럼.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뭘 쓸지 모르겠지만 일단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는... 그렇게 울프 부인을 읽어내고 또 영화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만다. '디 아워스' 안에서. '지금까지 쓴 글을 내일 다시 보면 지나치게 부풀어졌고 공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힘이 솟구친다. ' 는 말에, 그리고 '누구나 마음속에는 종이에 옮길 수 없는 훌륭한 책을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는 말에 괜히 눈시울을 붉히면서. (p. 110, 울프 부인)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시대를 건너 로라 브라운은 그 소설을 읽는다. '한 페이지만 더 읽을 것이다. 꼭 한 페이지만 더. 자신을 되찾고 진정시키기 위해. 그러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날 것이다.'라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채로. (p.64, 브라운 부인) 그녀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하고 말았던 건 어쩌면 닮은 면면들을 은은하게 느꼈기 때문일지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의 섬세하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문장을 좋아하는 면이. '지금 당장은 버지니아 울프를,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전부를 한 권 한 권 읽어나간다. 그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토록 명민하고, 그토록 미묘하고, 그토록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슬픔을 끌어안은 여자에게 완전히 매료.' 되었던 건 비단 그녀뿐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p. 69, 브라운 부인)
더군다나 책을 읽는 '엄마' 로서의 그녀여서. 나는 브라운 부인이 느끼는 감정에 절절히 동화되고 말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떠올리며 그녀가 생각하는 그 마음을 너무나도 공감하고 말았기에. 나 또한 아이를 대하며 자주 '닿을 내리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봉착하고 마니까. 그녀가 생각하는 데로 '아이는 고집이 무척 세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탐욕스러울 정도로 집착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그녀에게 간청하고, 때로 그녀를 무시한다. 아이는 언제나 엄마가 다음에 뭘 할지 궁금해하며 지켜보는 것 같다. 그녀는 아이를 둔 다른 엄마들은 몇 가지 규칙과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하고만 보내는 많은 날들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엄마의 자아를 따로 갖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나 또한 어느새 쌍둥이 육아를 하다가 지쳐 떨어지는 날이면 아주 자주 생각하고 말기에. (p. 78, 브라운 부인)
문득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이 떠올랐던 건, 브라운 부인 또한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 준비를 하는 착실한 '아내'로 살면서도 동시에 '댈러웨이 부인'을 가지고 집 밖의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동안 책을 읽으려는 것뿐인데. 하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돈에 쪼들리지도 않다. 게다가 그녀는 가정을 비교적 검소하게 꾸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 방값이 비싸다 한들 얼마나 하겠는가. 그렇게 비싸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값싼 곳으로 가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런 데는 왠지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고 너무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p.218, 브라운 부인) 면서 그녀 자신에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정당성을 애써 부여하면서 공교롭게 들어간 곳이 다름 아닌 19호실 문에 열쇠를 꽂고 말아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책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다. 물론 이 청록색 호텔방만큼 댈러웨이 부인의 런던과 동떨어진 곳도 없다. 그렇지만 물에 빠져 죽는 천재 여인 버지니아 울프도 죽고 나서는 이 방과 별다르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고는 슬쩍 웃음을 짓는다. ' 던 브라운 부인도, (p.224 브라운 부인)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인 '19호실로 가다'의 수전도, 그리고 지금의 이 글을 소박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는 나 또한. 우리들은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스스로 곤경에 처할 것만 같은 어떤 일상 속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최대이자 최소한의 '노력'을 은밀히 행하려 한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온전히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하는 '시간' 은 아니었을지.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뉴욕에서 옛 연인이 지어 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칭으로 살아가는 클러리서는 '이사벨 아처나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지만,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이야말로 유일하고도 확실한 선택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문제는 댈러웨이의 이름이 클러리서라는 것이었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뚜렷한 암호라고나 할까. 아니 운명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라는 생각을 하며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p.25 댈러웨이 부인) '낡은 별명을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p.90, 댈러웨이 부인) 그녀가 좀처럼 완강히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동성 연인을 동시에 사랑하다 에이즈에 걸리고 만 옛 연인을 향한 연민 아니 어쩌면 과거 기억에 대한 그리운 시간 때문이었을까. '리처드가 딱 한 번 했던 섹스마저도 뜨겁긴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만족스러웠으며, 열정적이라기보다는 다정했다. 삼십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클러리서의 마음에서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저녁 어스름에 마른 잔디 위에서 나눈 키스와 어둑해지는 대기에서 모기들이 공격을 퍼붓는 가운데 연못가를 돌던 그 산책이다. 그 기억에는 아직도 독특한 완벽함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것은 순간이라고. 바로 그 당시의 순간일 뿐이라고. 이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던 그 시간의 기억 때문에. (p. 150, 댈러웨이 부인) 아니면 그 또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관계를 유지하다 어느 날의 우연한 기적처럼 그의 어머니인 '브라운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결국 '댈러웨이 부인'으로 연결되는 두 여성의 모습을 위함이었을까.
울프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을 쓰면서 죽음을 생각한다. 삶을, 런던을 사랑하기에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던 그녀의 작품 속 클러리서를 떠올리며. 그러나 동시에 바로 자기 자신을 떠올리면서 강물 속으로 유유히 들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을지. '육체는 강하돼 정신은 나약한 누군가를. 천재 기질과 사심을 지녔고 세상의 수레바퀴에, 전쟁과 권력에, 의사들에 짓눌린 누군가를. 그런 누군가를. 클러리서, 정신이 멀쩡한 클러리서는 런던을 사랑하고 자기 삶의 평범한 즐거움을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어느 미치광이 시인은, 어느 몽상가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p.310, 울프 부인) 생각에 잠기다 물에 잠겨버린 그녀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그녀가 갈망했던 무언의 해방과 자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자신의 배우자와 자신의 삶, 무엇보다 글에 대한 진심이 뜨거웠던 나머지, 그녀를 동시에 옥죄고 있었던 것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어쩌면 말이다. 그녀들에게 해방이자 동시에 시간의 자유는 다름 아닌 내내 비슷하게 이어지는 삶에 마침표를 찍고 전환을 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글을 쓰는 자신의 삶의 종착지로, 로라 브라운에게는 사랑해 마지않았던 가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모순이, 클러리서에게는 자신에게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칭을 붙여준, 죽어가는 옛 연인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어떤 관계들의 정화가.
소설을 다시 읽고 영화를 보는 내내 바다를 떠올리고 말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다 어느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잠시나마 상상하며 해방되던 혼자의 시간. 단순하고 비슷하게 흐르는 요즘의 시간이 한편 새삼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던 건 '디 아워스' 가 주는 어떤 위로 덕분이었을 지 모른다. '평범한 슬픔' 도 즐겨 보라는 것 같았기에. 엄마로서, 여자로서의 평범한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