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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13. 2021

댈러웨이 부인  

모두 쓸데없단다, 애야.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좋은 날과 나쁜 날을 겪었더니 인생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더란 말이지. 

애석한 일이야. 장밋빛 시절이 사라진 것이 서글펐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p. 51 - 





몸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생각의 정글 속 감정의 늪에 퐁당 빠져버리고 말 것 같았기에. 그 무렵 이미 마음속에선 무기력과 우울이 한 편을 맺어, 한 사람의 잠재된 생기와 잦은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해가 생각이 난 것이다. 아이가 없던 서른 살의 그때가. 유산 이후 지독한 우울과 무력함, 자책하는 환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던 그 해의 러닝머신 위의 여자가.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걷고 뛰고 땀 흘리던 시간은 분명 스스로 적잖은 바텀업을 시켰다고 생각하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그 방법을 쓰기로 했을 때. 그 무렵은 8월의 폭염이 기승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침을 차리고 그이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그 빌딩을 향했다. 몸을 움직여야겠다고 선언하면서. 스스로를 향한 그 선언은 어쩌면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던 '파티의 꽃은 자기가 직접 사겠다'는 그것과 비슷한 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한 움직임에 타자가 개입할 여지는 없을 테니까. 매일 빠짐없이 러닝머신 위에서 두 시간 동안 걷고 뛰고 땀 흘리는 시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의지가 강했던 결정이었던 만큼 해냄의 시간들은 제법 순항 중이다. 게다가 예상외의 효과들마저 생기니 놀라울 따름. 단순하고 덜 우울해지는 새삼스러운 자신을 경험하는 시간과 더불어, 너무 앙상해지면 안 된다는 묘한 걱정이 들 정도의 놀라운 몸무게 수치를 찍어 버릴 정도로 의도치 않게 빠져버린 체지방율 제로에 가까운 신체와 마른 몸은 은밀한 희열을 느끼게 만드는 별책부록이랄까. 



19세기 런던 거리를 거닐며 파티에 장식할 꽃을 직접 사겠노라 선언하며 시작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삶은 과연 자신의 삶이었을까, 아니면 전혀 그렇지 못한 그 반대였을까. 누구든지 상대의 신발을 신고 그 생을 걸어보지 않는 이상 그 인생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법. 그녀가 아니고서야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19세기 여인의 의식을 책으로, 그리고 영화를 따라 읽고 보니 자꾸만 '현재'라는 인생을 비틀어 생각하게 되고 만다. 




빅토리아 거리를 건너면서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지.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인간은 왜 그토록 인생을 사랑하는 걸까.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꾸려나가는 걸까. 그리고 인생을 쌓았다가 허물어뜨리면서도 어째서 매 순간 다시 새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오직 신만이 알겠지. 그러나 누추하기 짝이 없는 여인들과 남의 집 문 앞에 앉아 있는 낙담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삶을 사랑한다. 그들이 인생을 사랑하는 바로 그 이유는, 의회 법령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걷는 그녀의 삶은 정녕 자신의 것이었을까. (p.10) 계속 읽고 보며 마주치게 되는 그녀의 짧은 독백과 의식들 속에서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그녀 스스로도 생각하며 어떤 '답'을 내리고자 했음을. '그녀는 스스로를 영리하다거나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정교사 대니얼스 양이 가르쳐준 몇 가지 지식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지나가는 택시조차도. 그래서 그녀는 피터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p.17) 



세상 걱정거리 없이 배우자'복'에 기대어 파티를 즐기며 살아가는 듯 '보이는' 댈러웨이 부인을 두고 누군가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그녀의 삶을 거론한다. '즐기는 것은 그녀의 천성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더 이상 신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들이나 보여주는 역겨운 도덕심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즐겼다.' 그녀의 우아한 낙천성을 보여준다 (p. 141)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러했을까. 그녀를 바라보는 타자는 심지어 독자나 관객들마저도. 어쩌면 즐기는 그 천성이 담겨 있는 이 인물의 인생은 정말 참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즐기지 않고서야 다른 대안을 모색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고통은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오래전 댈러웨이 부인의 곁의 또 다른 여인인 샐리 시튼을 떠올리며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는 이 문제는 어떤가. 오래전 자신과 샐리 시튼의 관계는 결국 사랑이 아니었나' 라며 중얼거리던 댈러웨이 부인의 삶은 자신의 삶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p. 60) '되돌아보면 이상한 것은 샐리에 대한 그녀의 순수하고 고결한 감정이었다. 한 남자에게 품는 감정과는 느낌이 달랐다.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보호하는 마음이었다. 함께 동맹을 맺었다는 의식, 그들을 갈라놓을 무언가에 대해 불길한 예감에서 생겨난 기사도 정신'이었다지.  (p.63) 빅토리아 시대의, 그 시절 꽉 막힌 어떤 답답한 시류의 공기는, 그녀들의 감정을,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또 누군가들은 이해받지 못한 채로 멀어져 갔을지도 모를 테지만. 




그리하여 댈러웨이 부인이 '즐겼다'는 문장에서 멈칫했던 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행복이 화두가 되고 누구나 '자기 자신' 이 되자고 열렬하게 외치는 시대이지만, 한편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태어나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절대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갈수록, 의식과 정체성이 생기고 사회에 속해 관계들을 맺어갈수록. 한 개에서 두 개의 인생을, 또는 세 개 네 개의 생들을, 결국 '나'라는 단수가 아닌 나와 너 그 이상의 것들을 생각하고 마는, 복수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던가. 언젠가부터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연유는 너무 자연스러운 생애주기 덕분이었다. 지정 성별은 여자아이.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어느새 누나가 되었고, 그 누나는 어느 날 타자의 연인이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되어 그리고 어느 순간 불쑥 엄마 그리고 며느리가 되어가는 것. 여기에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어디 있지? 그럴 리가. 우리는 정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을 찾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아니지만 반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이고 그 이후의 삶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것... 



조금씩 늙어가며 깨닫게 되는 삶의 혜안은 이런 것들 같기만 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생은 단수일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여러 개의 '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렇다면 댈러웨이 부인 또한 클러리서가 아닌, 샐리의 벗이 아닌, 리처드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삶'만' 즐기면서 살아가진 못했을 터. 꽃을 사러 가는 그녀 자신의 삶을 긍정하려 했을 뿐. 파티가 열리는 자신이 속해져야 하는 그 공간에 되도록 튕겨나가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 노력하고자 했을 뿐. '댈러웨이의 공공심과 대영제국에 대한 충성심, 관세 개혁 의지, 지도층 정신 등이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결혼 생활이 초래한 비극이겠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두 배는 똑똑하면서도 그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봤다. 자기 생각이 있으면서도 항상 리처드의 말을 인용' 하면서도,  (p. 138)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녀 자신을 둘러싼 삶을 사랑하려 애쓴다는 것.




삶은 모순으로 팽배한 채 오늘도 시간은 무심한 듯 지침 없이 끊기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는 때때로 울고 좌절하고 절망과 무력함에 허우적대기도 할 테지만. 반대로 그런 세상이 오늘은 또 웬일인지 조금 더 화창해서 사계를 누릴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고맙고 오늘의 빨래는 쏟아지는 햇볕 덕분에 금세 잘 마를 것이고, 냉장고 안에 소분되어 있는 식재료 덕분에 오늘의 식탁도 별 일 없이 무사할 것이다. 그래 봤자 바뀌는 게 없는 인생이라도, 그래 봤자 한 번뿐인 인생이라서. 비록 '나'가 빠진 '내 인생'이어도 소리 없이 치열한 기쁨의 사투를 명랑하게 헤쳐 나가다 보면. 결국 그 시간들 속에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도 말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궁색하고 화를 잘 내면서 좌지우지하려 들고, 위선적인 데다 남의 말을 엿듣기나 하고 시기하고, 끝도 없이 잔인하고 뻔뻔스럽게 방수 코트 차림으로 층계참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 스스로 누군가를 개종시키려고 했던 적이 있던가. 모든 사람이 단지 자기답기를 바라지 않았나. ' (p.226)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 시작은 의식의 흐름적, 다채롭고도 강렬한 여성의 글쓰기로 삶을 돌파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삶을 마감시킨 그 시대의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었다. 시대에 환경에 자신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던 작가...그런 그녀를 엿볼 수 있었던 '디아워스'와 그 '디아워스'로 연결된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보는 시간은, 나로서는 답 없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만드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나 자신의 삶을 위함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하는, 인간의 딜레마. 사실은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마찬가지인, 나뿐 아니라 그이도 그러했을, 나와 네가 하나가 된 그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너무도 성실하고 정직했던 나머지, 그 예전의 '나'와 '너'를 잠재워야 했을 뿐이라는 것을. 묘하게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들과 삶을 따라가면서 '나'와 '당신'을 생각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찾은 답은 바로 이것. 



알면 되는 것. 애쓰는 마음을 알아주고 아껴주고 그리하여 감싸주면 그만인 것.

꽃은 직접 사도 좋겠지만 사실은 주고받는 기쁨을 충분히 누린다면 사실 그만한 삶이 없다는 것을. 

그것을 알고 서로 고마워하면 되는 것.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우리는 그랬으면 좋겠다...



시간은 지나가면 없어지니까. 그러니 내일보다는 오늘일 것. 현재.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하는 것들. 



#댈러웨이 부인 @ 책읽는 수요일, 2015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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