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Oct 17. 2021

결혼기념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는 모든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고 

최후의 시험이자 증명이며 그 외의 모든 일들은 이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기대어 생각을 이어보자면 정말이지 내가 아닌 타자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해내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어디 하나 부정할 것이 없는 생각이다. 나를 사랑하기도 힘든 데 하물며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니. 게다가 나 자신을 뛰어넘어 상대를 위하는 순정한 그 마음은 용기 없이는 실로 불가한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대가가 훗날 유리파편이 군데군데 숨겨진 모래밭을 맨발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를지언정. 도중에 그 사랑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유한한 생에서 인간이 설 수 있는 최대의 시험대이자 최고의 증명일지도 모를테니까. 삶에서 끝내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내내 풀면서, 끝없는 깨달음을 던져주는 것. 인류 최대의 과업이자 생의 희비극이 난무하는 곳. 바로 사랑의 무대. 그곳에 본격적으로 '기혼자'가 되어 뛰어든 지 올해로 10년을 맞이했다. 겨우 혹은 벌써라고 생각되는 '우리'의 시간들은, 어떻게 흘렀고 어디로 흐르는 중일까. 



10년 전 10월의 어느 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했다. 다른 세계로 돌진하던 우리였다. 당신은 '남편' 이 되고 나는 '아내'가 되기로 한 약속. 한 사람이 '우리'가 되던 그날. 벌써 그 해로부터 10년이라니. 많다면 많고 또 아직이라면 아직 한 참일 수 있는 우리는 아무튼 서로의 기혼자로 10년을 함께 지냈다. 금요일 새벽. 일어나서 달력을 보니 정말 그날이 오고 말았다. 새벽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쌀을 씻으며 문득 신혼 때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10주년의 10월엔 이국의 멋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지내자던 철없는 그 약속을. 물론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10년 후 우리의 현실은 그리 비슷하게조차 흐르지 못했다는 걸. 바이러스 시대에 돌입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그이는 백신 2차를 맞고, 나는 프리랜서 식으로 활동하는 취재 일정이 무려 3개나 겹쳐서 서로 각자의 일상에 우선 충실해야 했음을. 게다가 미취학 아동을 둔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란 누군가의 돌봄 도움 없이 단 둘이 있는 시간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연인이었을 때는 정말로 몰랐던 것들을 서로의 기혼자가 되고 나서야 우리는, 아니 나는 최소한 알 수 있었다. 가령 당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확실한 '착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부부로 살아갈수록 너무 많이 알아서도 너무 몰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렇게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개인이자 우리로서 적정거리를 맞추며 각자 지닌 감정의 속도로 달려야 할 것. 사랑에 빠져버린 건 순서 없이 얼결에 다가오지만, 그 사랑에 결혼이라는 '매듭짓기'가 이뤄진 이상, 그 이후엔 어느 한쪽이 앞서가는 경우엔 늘 탈이 난다는 것에 대해서도. 얄궂게도 '남녀' 로서의 달아오르는 속도는 가속도였을지 몰라도 일단 부부가 된 이상 두 사람의 사랑이란 미묘하게 마찰력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 특히 2인 이상의 다가구를 이루게 될 경우엔 더더욱 그들의 에로스는 실종되듯 화석이 되어 가는 것을 각오할 것. 대신 그 자리엔 굳건한 단체 생활의 주 책임자로서의 생활력과 동지애가 튼튼하게 잔존하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무엇보다 같이 살다가 '슬픔'이나 '분노' 혹은 '서운함'이나 '틀어짐'이라는 감정들과 조우하게 될 경우에는 특히 주의할 것을.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너무 침잠하지 않도록.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p. 57, 137 - 



@Richard Bergh, Nordic Summer Evening, 1899-1900.   (바라보고 있을까. 우린. 서로를. 얼마나.... ) 



각자의 일정이 있어도 기억에 남는 하루를 그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그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언제나 화평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신의 사람이 되어 버린 나라서. 나와는 달리 빵보다는 쌀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앙금 떡 플라워 케이크를 만들고 생화 플라워 박스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지금껏 잘 지내 온 우리를 위한 드림보드도 새삼스럽지만 만들었다. 도화지엔 우리의 화평한 노후를 위한 버킷리스트가 담겨 있는 그림과 글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걸. 그 생각의 원천은 결국 나'만' 이 아닌 '우리'를 향한다는 것을, 그이는 알았을까. 비록 거창한 이벤트가 있던 10주년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보다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 입맛을 지닌 아내가 좋아하는 순댓국과 각종 찹쌀 꽈배기와 생도넛, 슈크림과 단팥빵, 갓 구운 빵들을 나눠 먹으며 말수가 없지만 되도록 먼저 말을 걸어 주며 도란도란 일상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들이.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냉큼 앙금 꽃이 두둑이 올라간 쌀케이크를 반 이상 먹어 준 당신이. 무엇보다 글쓰기를 무척이나 곤란해하는 당신의 빼곡한 편지 3장에는 애씀과 마음이 충분히 묻어있었다는 걸 내가 아니까... 



기혼자가 되고 난 이후 나는 미혼이었을 시절 그 몇 십배의 여러 감정들을 소화해내야 했다. 조금은 유난스럽기도 한 신혼시절을 겪으며 사적으로는 완전한 슬픔 속에 침잠하는 것도 배워야 했다. 결혼 이후의 시간들은 기쁨보다 아픔이 조금 더 많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온전히 아팠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고유한 슬픔에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나와 당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할지언정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받길 갈망하고 미안해하며 기대는 우리들이 있었다고.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깊은 허기를 역설적이지만 결혼을 하고 각자 느끼면서도 그이와 나는 조금씩 알아갔을 것이다. 가족이 되어 서로 아팠지만, 그럼에도 가족 덕분에 결국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기적에 대해서도. 



현실과 낭만 사이. 아니 한 쪽에 무척이나 가까운 그 경계 어디쯤에 있을까. 우리는. 지금. 



결혼은 절대 사적인 인간에게 평화로운 약속이 될 수 없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것은 여러모로 견딜 각오가 단단히 필요한 약속이다. 혼인신고란 단지 혼인신고서 한 장 달랑 내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시간 이후에 지켜야 할 암묵적 조항이 생기는 엄밀한 계약이니 절대 안온함만을, 안정감을 기대해서는 절대 곤란하다. 기혼자가 된 우리들의 다감한 공간엔 불시에 혹은 틈틈이 작은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할 것. 그 사이로 권태 혹은 자기 실종이 끼어들지도 모를 테니까. 게다가 아이라는 사랑스러운 침입자들이 생긴다면 더군다나 일단 끝까지 버텨내야 할 것. 일부일처제의 기혼 시장 안에 속해진 우리들은 사적인 욕망을 사그라뜨려야 하며 그러다 불시에 불온한 상상이라도 고개를 불쑥 드밀 때면 여간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으니 단단히 감정을 다스릴 것. 



결혼을 했다고 마냥 상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이려 했던 과거의 나를 후회한다. 지금은 알게 된 것을 그때는 몰랐으니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이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이란 길들일 수 없는 존재이며 객체이고 여전히 온전히 개인으로서의 타자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을 시선을 받아들이고 그 앞에 그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감싸 앉아야 한다는 것을. 비록 서로 수습 조차 쉽지 않은 고약한 면들이 여전히 튀어나와 서로를 슬프게 하거나 당황스럽게 할 지라도. 정말 여전히 '사랑' 하려 한다면, 상처와 고통을 각자 또 함께 돌파할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할 것. 



그이에게 쓴 편지 3장 중 마지막 장에 이 말을 적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위해 누구보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만약 당신이 내가 아닌 누군가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할 지라도 나는 충분히 당신이 잃어가고 있는 사적인 당신을 지켜주고 싶다고. 이 마음이야 말로 당신을 향한 내가 지닌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그이는 이런 얼토당토 하고 황당한 편지를 받았으나 물론 아무 말 없었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나 또한 묻진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서로의 전부가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천천히 이동하기를. 

이제는 우리의 전부가 서로가 아닌 아이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더라도.

각자의 소중한 것을 조용히 지켜주려는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되도록 오래 지니고 바라봐주기를... 



보이지 않는 길도 헤쳐 나갈 힘을 샘솟게 하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사랑. 우리가 가기를 바라는. 내게는 그런 것. 





#이런 것들과 함께 당신과의 10년을 기념했다.

#20주년엔 정말 이국의 바다를 보는 '우리' 일 수 있을까.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흐를까... 


촌스러운 앙금꽃. 그래도 맛있었다면-
글이 어려운 당신에게, 글이 제일 좋은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이제 나만이 아닌 '우리' 를 향한다... 당신. 그걸 알고 있는지... 




작가의 이전글 기분에 지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