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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2. 2021

헤어지지 않는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p.325 -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이어진다. 어느새 떠진 눈은 곁에서 함께 잠들었던 아이들을 향한다. 배꼽이 다 드러난 그들의 흰 배는 어둠 속에서도 쉽게 감지된다. 무의식은 말한다. 너는 이미 엄마가 되었어 라고. 여자가 아닌 엄마. 지키려는 사람. 에로스보다 아가페가 먼저일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 버린, 그렇게 변해버려 어떤 부분들은 소실되어 가는,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사적으로 무척이나 형편없으면서도 또한 공적으로 충분히 훌륭한 인간.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몇 걸음을 떼어 화장대 위에 놓인 핸드폰을 쳐다본다. 새벽 1시 반. 더 자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아보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는다. 그대로 눈을 감고 생각한다. 불면은 제각각의 사유를 품고 있을테다. 그렇다면 이 불면은 어디서부터 피어 나온 것인지 생각한다. 오래 연락하지 못하고 서로 바쁘게 지내다가 갑자기 안부를 주던 후배의 말 때문이었을까. 드라마를 보다가 언니를 닮은 사람이 나와서 생각났다던, 보고 싶다던 그 문장을 뜻밖의 인물과 주고 받게 될 줄이야. 아니면 어린이집에서 누군가와 사소한 다툼이 있어서 속상했다던, 간밤에 아이와 주고받은 대화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나 읽다 만 책. 자꾸만 미루게 되고 마는 글.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마음과 감정을 일상을 지내며 그대로 꾹 누른 채 숙성시켜버리고 마는 몹쓸 인내. 제각각의 이유들이 범벅이 되어 불면의 핑계를 찾는다. 그러다 생각은 한 곳에 멈춘다.



그에게로. 어제도 허리는 계속 아팠을지. 점심은 뭘 먹었는지. 회식은 잘하고 돌아온 건지. 일은 잘 되고 있는 것인지. 어디 더 아픈 데는 없는지. 주말에 페인트칠을 한다던 당신의 에너지는 청신호인지, 아니면 적신호에도 어떤 애씀이 발동되는 것인지. 우리가 만든 '가족' 을 위해서. 그러나 그 가족이 되고 난 이후 당신과 내가 서로 만지지 않는 밤이 점점 길어져도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늘 먼저 묻지 않고 다가오지 않는 조용한 당신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조용하고 편안한 이해심과 심지어 다감한 당신은 현재 좋은 배우자인 게 분명하지만 왜 나로서는 가끔 우리가 '우리' 같지 않은 것인지. 어떤 작가의 말대로 침대에서 무슨 협정을 맺은 것처럼 발조차 스치지 않게 되고 마는 관계가 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며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부부라면, 우리는 지금 그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인지.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맞는 건지. 명이 함께 흐르는 시간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네 명이다가 두 명이 다시 되고 나면. 그럼 그 때는...



@르네 마그리트, The Lovers, 1928



이러저러 전혀 연결되지 않는, 그러나 묘하게 연결되고 마는 불면이 품는 사유 끝은 늘 누군가를 향한다. 언제나 마지막에 나를 멈추게 만드는 사람에 대해서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루는 당신, 하루는 아이들, 또 하루는 나 자신, 그리고 또 하루는 완벽한 타인을 생각하다, 바다를 떠올리다 결국 잠들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생소하면서도 강렬한 어떤 감정을 붙들고 상상을 펼치고 마는 이런 나에 대해서. 서로의 신발을 바꿔 신은 채 상대로 살 수 없으니까. 부부라 할지라도 아내는 남편에 대해, 남편은 아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한 착각이라는 것을.



결혼이라는 사랑의 실험이 결국 삶의 모순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안다. 알 것만 같다. 그것이야말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인 것 같기에. 우리가 주인공이지만 어느새 우리가 조연으로 사라지는 것조차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어떤 대단히 견디기 힘든 사랑의 형태들에 대해서. 그를 생각하고 그를 연민하며 여러 현실적이고도 지극히 생활적인 '우리'의 건강함을 지키려 애쓰는 '부부' 로서의 우리를 떠올리며 안도와 안정을 느끼면서도. 한편 만질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만지고 싶어도 만져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찾지 못한 채 기어코 만지지 않는 고약한 마음을 이겨낼 재간이 없는 것에 대해서. 뜨거웠던 사랑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변하고 또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당신을 떠올리며 연약하게 고민하는 시간들이 잦아질수록 알게 되었다. 우리가 꿈꿨던 열정이나 헌신 그리고 어떤 약속들은 어느 순간 저 멀리 재빨리 사라져 마음은 감춰지게 되기 쉽다는 것에 대해서. 결혼을 하면 더 행복하고 더 안정적이고 덜 불안할 것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지극한 나의 꿈, 착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된 개인들의 사적인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도...



모든 사랑 중에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모든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이었다. 그 다른 사랑, 사람을 취하게 했던 그 화려한 사랑, 그 열망하고 질투하고 믿었던 그 사랑은 삶이 아니었다. 삶이 좇는 어떤 것, 삶의 일시 정지 상태였다. 아이 옆에 있는 것, 모든 것을 다 바쳐 보호하고 양육해온 아이의 옆에 평화롭게 있는 것이 진정하고 심오한, 유일한 기쁨이었다


-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p.427 -




제인 오스틴에 기대어 생각하자면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현재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서로에게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물러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당신과 나의 에너지의 중심점은 현재 대부분 아이들을 향하고 만다는 걸, 앞으로 꽤 긴 시간도 그러할 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아이들을 향한 그이의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반대로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보다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마는 나를 만났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되고 마는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까...당신보다 아이에게 이불을 먼저 덮어주게 되는, 당신보다 아이의 볼에 입 맞추게 되는, 당신보다 아이를 꽉 끌어 앉고 펑펑 울고 싶은 내가 되어버려서.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베르테르의 로테 로미오의 줄리엣이나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 더 이상 나는 그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니 설령 그럴 여지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형태가 다른 사랑을 주고받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는 중이다. 사랑을 통해 결혼까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가계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야 하는 배우자로서의 남편과 아내, 특히 부모가 된 두 사람은 그들의 상호 책임과 관련된 동반자적 관계로 확실하게 변한다는 것에 대해서. 한번 변한 이후엔 쉽게 그 시간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마치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무대의 장막은 바뀌었고 주인공은 조연이 되었다. 새로운 주인공들은 탄생되어 누군가들의 삶을 밀어내며 자신의 삶을 피어 나간다. 조연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주인공들을 사랑스럽게 지켜본다. 새로운 주인공들이 무대에서 넘어졌을 때 지지하고 일으켜주기 위해서. 그들이 무대에서 아웃팅 되지 않도록, 그들이 너무 아프거나 다치지 않도록, 비록 두 사람의 로맨스는 붕괴 중이며 서로 바라보는 시점이 처절하게 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로. 부부가 사람은 사랑스러운 삶의 침입자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소비한다. 서로를 멍하니 바라볼, 만질, 생각하고 묻고 아껴줄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은 실수를 가끔 범하고 말지언정.



헤어지지 않는다. 헤어질 수 없다. '절대'라는 부사가 저 문장 앞에 붙을 만큼.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랑일 수 있다면. 연민하고 걱정하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사랑일 수가 있다면. 무엇보다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의 잠든 볼을 쓰다듬다 거기까지밖에 할 수밖에 없는 채 침대에서 일어나버리고 마는 불면의 밤도 사랑이라면. 때때로 엄마이자 아내를 확실하게 벗어나고 싶은 이런 나라도. 우리의 소멸되어가는 에로스와 로맨스에  '퀘스처닝' 중인 채 엉뚱한 상상을 자꾸만 하는 이런 나라도. 당신만 괜찮다면. 당신만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당신 곁의 나와 헤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나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다. 아직은. 누구 한 사람이 영원한 잠에 빠지기 전까지는. 그때까지는.



가끔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과거와 헤어지면 내일과 만난다는 것. 헤어지지 않기 위한, 헤어짐이 있다는 것. 그런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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