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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4. 2021

부부는 사랑일까

사랑은 이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과 이상을 혼동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 괴테 -




두 부부의 이야기를 접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듣게 된 그들의 이야기를 감히 제대로 이해하고 알았다고는 할 수 없다. '알다'는 동사를 쓰기에는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뿐. 그들의 신발을 신고 그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법. 다만 그 부부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나서 기혼 이후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에 대한 내밀한 궁금증만 증폭되었을 뿐이다.



곧 부부가 될 예비 신부인 그녀는 사실상 앞으로 다가올 기혼녀라는 타이틀이, 결혼 이후의 삶이 애초에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했다. 요지는 한 사람만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신부가 되고자 했던 결정적 이유는 젠더적 여성의 평등함을 주시하는 이 시대에 역주행하는 듯 신선하게 들렸다. 자신을 먹여 살릴 충분한 경제력과 안정적 직업을 가진, 무엇보다 자신에게 현재 '푹 빠졌다' 던 남자를 발견했기에 결혼한다는 것. 물론 진화심리학에 의한다면 그녀의 선택은 절대 이상한 게 아니다. 1989년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전 세계 37개 문화권을 탐방하여 배우자 선호도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했고 그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배우자감의 경제적 잠재력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범 세계적 현상'이라니까. (*로버트 라이트, 도덕적 동물, p. 102, 섹스, 사랑, 로맨스 中)



한편 두 아이를 기르는 부부 중 외벌이 남편은 야근을 하는 일상 속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곧 중학교에 들어갈 큰 아이의 학습 케어와 둘째 아이의 축구, 그뿐 아니라 주말엔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와 같은 가사노동을 도모한다 했다. 그런데 고충은 따로 있었다. 부부간 경제적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돈 이야기를 하려 하면 신혼 때부터 다툼이 일어나기에 언젠가부터 아예 묻지 않는다는 것. 그런 그의 아내는 대형 평수의 새 아파트로 내 집 장만을 하여 가구나 인테리어가 잘 갖춰진 '멋진 집' 이 현재 없는 것에 늘 히스테리적 불만을 품고 있다 했다. 그리하여 이사철만 되면 부부 사이에 종종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 한데 여기서 반전이 등장한다. 만약 아내가 언젠가 어떤 이유로든 이혼을 원한다면 언제든 자신은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는 그의 자조적 농담. 아내는 자신에게 절대 이혼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헤어지면 아쉬울 쪽이 너무 쉽게 보이니까. 꼬박꼬박 적지 않은 월급을 이체하고 아이들마저 잘 보살피는 자신이야말로 배우자로서 떳떳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스스로 당당하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을 테다. 반대로 그의 아내는 이 쓸쓸한 현상을 알고 있을까. 이미 자신에게 마음이 돌아설 데로 돌아서 있는 배우자의 고충에 대해서. 자식들을 생각하며 사는 데 만족하는 배우자의 외로운 속내에 대해서.



@에드바르 뭉크, 재 (Ashes)



부부는 사랑일까. 과연 '부부'가 된 이들배우자를 사랑한다고 그렇게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떨리는 사랑이 아닌 현실적 부양 투자자로서 최선의 남편감이며 기혼 이후에 외도 시장에 참가할 여지가 꽤나 농후할법한 의지를 지닌 연인과 곧 결혼을 앞둔 그 경제력 튼튼한 예비 신랑은 과연 자신의 현재 연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뭐 하나 빠짐없는 아름다운 피지컬의 여인이 자신을 사랑한다 하니까. 경제력이야 자신이 받쳐주니 조금 부족해도 전혀 상관없다며. 다만 자신에게 그리고 미래의 가정에게 당연히 헌신과 정절을 약속할 것을 예상하는 그의 상상은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결혼을 결심하고 집을 보러 다니며 다이아 반지를 선물하고 그럴싸한 프러포즈를 준비한다. 그들의 결혼은 과연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진행된다고 확언할 수 있을지.



반면, 전업주부인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알려고 할까. 대평 평수의 집과 인테리어만이 자신을 대변하는 전부라 생각하는 자신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남편이 고맙기보다 오히려 당연한 역할 배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가사와 육아가 힘들다는 핑계적 이유에 마냥 기댄 채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들을 하기는커녕 배우자라는 서약된 인물이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며 당연히 기대'만' 하며 사는 건 아닐지. 그런 남편이 사실은 자신의 히스테리나 다정하지 못한 무참한 태도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자로서도 은근한 자책감을 만들며 밖에서 쓸쓸한 자조적 농담을 하는 배우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 본 적이 있을지. 집 밖에서는 세상 좋은 이웃일지 모르나 집 안에서는 게으르고 무심하며 가족 구성원을 멸시하고 조롱하는듯한 말투와 태도는 사실상 지극히 덜떨어진 예의 없는 배우자라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모르는 자신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커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커플들은 영원을 약속한다. 영원히 네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도 세상 무모하게 짝이 없이. 사랑을 하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결혼 시장에 들어가려 한다. 일정 부분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누군가들은 은밀하게도 소기의 목적이 뚜렷한 채 서로를 충분히 기만하여 그 시장에 들어가기 시작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동물이 지닌 욕망 그 이상의 욕망을 지니며 집단을 구성해 나가는 도덕적 동물인 '인간' 에게는 애초에 이 일부일처 기혼 제라는 것은 그리하여 맞지 않는 제도는 아닌 것일지. 그러니 누군가들에게는 결혼제도가 무척이나 불편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 예비 신부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육아는 말할 없는 신세계일뿐더러, 무엇보다 일부일처라는 제도권 속 기혼제가 맞지 않은 '캐릭터' 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이들은 각자의 형태로 은밀한 사랑을 주고받을 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외도 시장의 참가자로서 그 시장을 활성화(?) 시킨다. 은밀한 사랑은 늘 포고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래선 오히려 위험하다. 제도권 내에서의 행동은 늘 조심해야 될 테니. 열정에도 소비기한이라는 게 있기 마련일 테니까. 외도에는 결혼제도가 주지 못하는, 어떤 인간 본성적 성취감이 있는 걸지도 모를 테니까. 정서적 욕구와 성적 욕망 사이의 균형이란 그토록 어려운 문제다. 그리하여 내 질문은 자꾸 꼬리를 이어간다. 사랑의 영역에 어째서 결혼이라는 한낮 이벤트를 통해 영원을 감히 그렇게도 확실히 단정할 수 있는 것인지. 도대체 부부가 된다는 그 약속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틀어지고 마는 것인지. 일부일처제의 효용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부부 사이의 신의란 무엇인지. 무엇보다 서로 기만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부부니까 서로 상대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과연 스스로 그렇게도 확언할 만큼 떳떳한 것인지.



@오귀스트 툴 무슈, 허영, 1889



자백하자면 내 결혼은 그리 순수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이에게 가끔 미안하다. 물론 그 예비신부처럼 배우자의 경제적 기준이 단연코 우선이며 결혼하기도 전에 외도를 미리 염두에 두는 그녀처럼 형편없이 너저분한 불온함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순정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한다. 열렬히 사랑한 연인과 이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이가 다가왔다. 눈에 띈 그는 나이가 많았고 혼기에 차 있었다. 무엇보다 성적 대상으로서 그리 큰 스파크를 낼 만큼의 불꽃은 튀지 않았지만 묘하게 그이의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자꾸만 어떤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여자가 되고 싶게 만드는 기대감. 다정다감한 그를 조금 더 알고 싶은 어떤 호기심. 알아갈수록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무언의 설렘. 무엇보다 그 시절 모든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다시 처음부터 삶을 리셋하고 싶었던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만다. 아주 뜨겁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이성적으로 서로가 장기적 파트너적으로서 도움을 주고받기에 탁월한 관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 덕에. 그래서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 뜨겁지 않았기에. 당신으로 하여금 불타오르지 못했으니. 격정적인 섹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아쉽게도 미처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당신이어서 오히려 그 점이 어떤 헌신과 정절을 증명하는 것 같았던 나의 미천하고 엉뚱한 생각이었다는 것.



인간의 본성 속에는 모순되는 것들이 긴밀하게 맺어져 있겠다. 그런 인간들이 저지르는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시간은 때때로 사랑이 한편 배신이 되어 서로에게 절망적 형태를 띠기도 한다. 외도 시장이 여전히 성행하는 이유는 그 연장선일 테다. 물론 이러저러 그러한 여러 이유를 설명하려면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하물며 내게 그런 것을 설명할 필력도 사색적 사유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극히 평범한 10년 차 기혼녀인 나로서는 아마 어쩌면 영원히 설명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혼시장과 외도 시장에 대해서. 기혼제에 들어간 유자녀 부부들의 사랑에 대해서. 다만 양성애 혹은 동성애, 인터섹스와 같은 세계를 이해하려 책을 펼치며, 모노가미로 살아가지만 때로 폴리아모리 여부에 대한 '퀘스처닝' 상태로 사랑의 영역에서 상대의 배타적 독점관계를 은밀하게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부부가 되어도 상대편의 몸과 마음을 절대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기에. 부부여도 서로를 다 안다고, 서로의 모든 점을 다 오픈하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그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이며 어쩌면 지극히 확증편향과 인지 부조화적 생각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의 '생각'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점. 그렇기에 보브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가, 월 스미스 부부의 오픈 메리지가 나로서는 여간 부럽지 않을 수밖에 없을 뿐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도둑맞은 키스



물론 안다. 10년 차 기혼녀가 되어 두 아이를 기르는 전업주부로서 그이의 새벽 도시락을 만들고 가계의 살림을 도모하며 오늘도 화평한 '우리 집'을 지키려는 나는. 결혼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이익을 따지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쩔 도리 없이. 전통적인 결혼 생활에서는 명확한 젠더 역할과 노동 분업을 토대로 각자의 의무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로서는 부부란 남녀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훌륭한 배우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이다. 부부의 형태가 그렇다고 모두 사랑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되고 마니까. 그것이 어쩌면 독점적 관계에 따르는 구속에서 따라오는 패닉을 불러온다 할지언정. 선택지가 끝없이 펼쳐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포모, 즉 좋은 것을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며 그 두려움은 우리를 은밀하게 쾌락을 좇게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부부가 되고 나서야 우리는 더욱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선택한 배우자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할 것.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고 나서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상대 배우자에 대해서 여전히 '모른다'는 인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그가 그녀가 더 웃을 수 있는지 강구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 이미 잡은 고기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더욱 아끼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 각자 또 같이.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특히 결혼 생활과 엄마 됨에는 일정 수준의 엄청난 이타심이 필요하며 이 이타심은 사적 욕망과 이기심과 절대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 그리하여 비록 타인을 돌봐야 하는 여성은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면서 정말이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며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고 때때로 성적으로는 무책임하게 굴기가 상당수 어려울지언정.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은 강력한 성적 부담이며 억제제일 수 있다는 것을 상대편 배우자는 알아줄 것을.



오늘도 아이들은 주말에도 불구하고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을 먹었다. 그들을 위해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새 반찬을 만들며 아이들의 끝없는 칭얼거림과 요구사항과 투정을 받아주느라 진땀을 뺀다. 사적으로는 지금 당장 노트북과 읽다 만 책을 챙겨 들고 카페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늘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피곤해서 곤히 잠든 그이를 이제는 깨우지 않는다. 일부러 깨워서 같이 양육을 해 줄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대로 그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대신 혼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해볼 것. 그것이 이제는 내가 그를 위해, 우리들을 위해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일차원적인 실행 범위가 되었다. 상대의 만족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애쓰는 것.



다만 그러다 우리는 어느새 알아갈지도 모른다. 아니 알아야 한다. 당신의 배우자가 때때로 침대에서 제멋대로 굴고 싶은 모습을 당신에게만큼은 철저히 감추고 있다는 것. 당신을 앉으며 다른 사람을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 언제든 아쉬움 없이 당신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 당신은 상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 몸과 마음은 자기 자신의 것이지 가족의 것이 아니라는 것. 지킬 게 많은 이들은 잃을 것도 많아서 그 존재 자체로 약하다지만 반대로 지키는 시간에 혼신을 다해 최선을 다했던 누군가는 언젠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홀연히 떠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하여 부부가 사랑으로 시작을 했다면, 사랑으로 끝맺음까지 연결되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제대로 알 것.



제대로 알아야 생각이 생기고 그 생각은 행동이 되어 더욱 사랑할지 모른다.

당신이 지금 외면하고 있는 집 안의 시들어져 가는 '꽃'에 대해서.

그 꽃이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생생한 생화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도.



@존 콜리어, Lady Godiva,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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