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까? 두 존재를 동시에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결국 인간의 마음. 영원할 수 없지만 영원하고 싶은 마음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 다시 말하자면 한 존재에게 쏟아내는 마음이란 한 곳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 결국 어떤 타이밍, 어떤 서사, 어떤 연으로 닿든 우리는 다른 존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 한다는 마음을. 또한 그것은 밤도 어두워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다. 밤에 어두워지지 않는 현상. 또는 그런 밤. 최은영 소설가의 '밝은 밤'이라던 제목을 문득 떠올리며 동시에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펼쳐든다. 백야. 도스토옙스키의 젊은 시절 그의 자화상을 그린 것만 같은 단편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 라면서 시작되는 그 책 속으로. 그리고 그 서사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 '투 러버스'의 세계로 나는 기어코 떠나고야 말았다.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내내 마음에 담은 채로.
'나'라는 현실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인물로 비치는 몽상가라는 그는 친애하는 독자인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책은 시작된다. '나는 몽상가입니다. 내게 현실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이런 순간이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그 순간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일주일 내내, 1년 내내 당신을 꿈꿀 겁니다. 나는 내일 반드시 바로 이 시간에 이곳, 바로 이 자리에 올 겁니다. 그리고 어제의 일을 회상하며 행복해할 겁니다.'라고 (p.240). 몽상이란 무엇인가. 꿈속의 생각, 즉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라고 사전은 정의하지만, 어쩌면 현실 세계를 너무나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나 같은 인간에게 그래서 몽상은 때때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쉼'이라는 여유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내면에 자리할 수 있기에.
열흘 내내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이상하게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 길어진다. 그렇지만 그 덕에.. 문장은 더 깊어짐을 느낀다...
그런 그의 시야에 한 여성이 포착된다. 그녀의 이름은 나스쩬까. 그녀와의 운명적 조우 앞에서 그는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에 한 폭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오래전부터 내 심장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것, 그래서 책을 읽듯이 말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부질없이 말해 버렸다는 데 대해, 즉 이야기가 너무 깊이 들어간 데 대해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누구든 나를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p.260) 고는 하나 그는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와의 시간을 내내 기다리게 되고 마는, 결국 사랑하고 마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걸. 아니 그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음을 기어코 빼앗기게 되는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걸.
현실이 아닌 다소 몽상가적인 기질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꽤 깊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그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그들의 삶은 주문된 삶, 꿈처럼 환영처럼 날아가 버리는 삶이 아니라는 것, 그들의 삶은 영원히 갱신되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것, 단 한 시간도 다른 한 시간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p. 262) 동시에 그런 시선과 사유는 그를 조금은 외롭게 그리고 고립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어떤 무언의 상처를 조금씩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그녀, 나스쩬까의 등장으로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다가가는 생소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한 사람에게 속박되어 좀처럼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녀의 서사를 알아갈수록 더더욱 마음을 쏟아붓게 되는 자신이라는 것을.
어느 날 아침 할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 앞이 안 보여서 너를 제대로 감시할 수가 없구나, 하시며 핀을 꺼내 제 옷자락을 당신 옷에 꽂아 놓으셨어요. 그러시면서 제가 행실을 바로잡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앉아 있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간단히 말해서 처음에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일을 하건 책을 읽건 공부를 하건 모조리 할머니 곁에서 해야만 했어요. p. 266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삶은 또한 그리 자유롭지도 못하다. 어두운 밤이지만 선명하게 그녀의 울적한 모습을 발견한 '나'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나스쩬까는 새롭게 만난 '나'와 동시에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자신을 사랑한다며, 그러나 자신은 결국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마음을 전해버린다.
절 사랑해 주세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이 순간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자격이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다음 주에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 사람은 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돌아왔어요. 한시도 절 잊은 적이 없었어요. 그 사람 얘길 쓴다고 해서 화를 내진 않으시겠죠. 그 사람과 함께 당신을 찾아뵙고 싶어요.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실 거죠. 그렇죠? 저를 용서해 주세요. 기억해 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당신의 나스쩬까를. p. 309
사랑이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말고의 영역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고 말아 버린.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영화라던 '투 러버스' 에는 소설과 그리 흡사하지 않지만 묘하게 닮아 있는 세 인물이 나온다. DNA 결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남자인 래너드. 그런 그의 앞에 친절하고 살갑고 따뜻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산드라. 래너드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무언가를 산드라를 통해 채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만난다. 그런데 동시에 장면은 바뀌고 미셀이라는 여성이 등장하며 산드라와는 아주 대조적인 인물로서 그녀도 우울증을 앓고 있고 심지어 마약을 하는 인물로 그려진 그녀 미셀. 래너드는 자신과 비슷한 그녀에게 끌리고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 속 나스쩬까는 '나'와 동시에 그녀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투 러버스의 래너드도 산드라와 미셀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들에게는 이미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것에 대한, 두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게 되는 것에 대한 허락이란 애초에 불가한 영역. 왠지 나스쪤까와 래너드야말로 상처를 가진 채 세계를 살아가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에서 뚜렷하고 확실한 무언의 기준에 의해 관계를 조금씩 쌓아간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상처가 있더라도 사랑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드러낸 그 두 인물을 통해서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야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둠이 어둡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뜨려 버리게 되는.
'나'는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 사람' 에게도 마음을 빼앗긴 채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이야기를 기어코 주고받았던 찰나의 그녀인 나스쩬까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라면서 진심으로 축복하고 훗날 오래 회자되기를 기원한다.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라면서. (p. 310) 이 얼마나 대단하고 근사한 마음일 수 있단 말일까.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아픔보다 상대의 아픔을 끌어 앉을 수 있는 용기. 자신이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 그들이 원하는 건 뭐였을까. 어쩌면 사랑의 '결과' 이기 보다 그들은 그 사랑을 주고받았던 '시간의 기억' 이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요 근래.... 글이 써지지 않는 오랜 날들의 밤을 지새우면서. 두 시간 정도만의 수면을 다시 취하게 되고 다소 피곤한 몸으로 일상을 지내고 있는 나로서는 자꾸만 이 생각이 선명해질 뿐이다. 살면서 중요한 건 결국 '시간' 그리고 내가 바라고 향하는 '기억'이라고. 결국 그 두 개를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고...
미셀에게 래너드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에게 산드라는 또한 어떤 존재였을지.
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죽하면 그의 탄생을 확실히 기리기 위해 정확히 2021년 11월 11일에 전 8권으로 된 그의 기념판 세트가 출간되었다니.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단연코 그의 문학을 조금 더 읽게 되는 올해 겨울이 아닐까 싶으며 나로서는 그 연이 닿아 그의 단편소설을 이렇게 읽고 그 서사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영화까지 보는 시간을 통해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