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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7. 2022

노마드랜드

이것이 현실이라면... 

견뎌내려는 우리의 의지를 뒤흔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별이 빛나는 광활한 하늘 아래 

동료 워캠퍼들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을 때와 같은 공유의 순간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하다.


- 노마드랜드 - 




숨을 깊게 들이쉰다. '노마드랜드'를 덮고 난 이후 한번 더 깊은 들숨과 날숨을 내 쉬었다. 잿빛. 잿빛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르포르타주인 이 책을 그럼에도 단순히 '잿빛' 이라고만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무채색에 가까운 빛깔 하나 없는 잿빛이라기보다 무언가 분명 형용하기 쉽지 않은 독특한 빛이 들어가 있는 듯한 묘한 잿빛... 그런 잿빛 같은 미국의 은퇴 이후 거주지를 거부 혹은 의도치 않게 잃어버린 (혹은 버려버린!) 이들의 이야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환상적인 노마드족의 이야기와는 상당수 거리가 있는, 이미 활성화되고 있는 미국의 지극한 가려진 현실의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부터 읽고 싶었다. 그러길 잘했다고, 두서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 이 어지러운 마음 상태의 현재도 결국 생각하고 만다. '은퇴'가 결국 '휴식'의 시간이라고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은퇴 이후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니어층이 과연 몇이나 될까? 국가는 파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제는 침체나 대공황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오늘 다닌 회사에서 내가 불시에 쫓겨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 우리는 과연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이제 더 이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제시카 브루더가 쏘아 올린 '은퇴의 종말'이라는 작은 칼럼은 무려 3년의 인터뷰 기간과 몇 개주를 돌아다니며 탄생시킨  이 한 권의 르포르타주를 통해 우리는 예상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현재의 풍요로운 유토피아가 사실은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앞당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임을. 



RV를 흔히 레저용 차량이라고 이해하기에 이제 시대는 많이 변했다. 레저가 아닌 '생존' 이 되어 버린 이들이 있으니 바로 '워캠퍼'들이다. 미국 전역에서 홈리스이자 하우스리스를 자청 혹은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되어 버린 은퇴 및 이동 노동자들은 그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계절 근로자로 일한다. 그들의 대부분의 나이는  지긋한 은퇴자들이란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는 급속도로 미국 전역에서 늘어나고 있다 한다.  일자리를 찾아서 전국 야영장을 돌아다니고 그 악명 높은 아마존 (일명 '아마좀비' 가 되어가는 일터)에서 계절노동자로서 일하기를 자처하는 그들. 저자는 그중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 없어서 자청해서 차량을 집 삼아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린다'의 일상을 비롯한 여러 노마드족들의 삶을 조목조목 따라간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문제는 있었다. '어떻게 남은 평생 동안 일을 하지도 않고 아이들한테 짐이 되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것인가?' 린다의 의문이었다. 린다는 어스십이 장기적인 해결책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떻게 거기까지 간단 말인가? p. 72, 2장 끝


돈은 자신이 점점 확산되는 사회 현상의 일부라고 내게 말했다. 그와 캠퍼포스 노동자 대부분 - 그리고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해 있는 떠돌이 노동자들 - 은 자신들을 '워 캠퍼'라고 불렀다. 이미 그 단어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돈처럼 매끄럽게 그 단어를 정의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워캠퍼들은 이동 생활을 하는 현대의 여행자들로, 미국을 돌아다니며 캠핑터를 무료로 - 대체로 전기와 물, 하수관도 포함 - 사용하는 대가로, 거기에 보통은 급료 또한 받으면서 임시 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워캠핑이 현대에 등장한 현상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답니다   p.84-5. 3장 미국을 살아내기 



@노마드랜드, 네이버 영화 


비약적인 합리화일 수 있지만 나는 노마드랜드를 읽으면서 먼 미래의 한국을 보는 듯했다...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 그리고 IT 버블 붕괴. 부동산의 몰락. 개인 파산. 좀비기업의 도산. 대공황과 경제 침체기를 겪으며 미국이라는 강대국 또한 소득불평등 격차는 더욱 극심화되었다. 그리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부동산의 오름세와 그 시기에 맞물린 저금리로 인해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서 집이나 땅, 부동산을 구매했고 소득의 대부분을 '집'의 유지 관리비를 위해 충당시킨다. 그러다가 침체를 맞이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서 개인 회생 신청을 한 이들과 동시에 단기 임시직과 같은 임시방편 일자리 창출로 인해 건강한 커리어를 갖지 못한 젊은 층들의 급증세. 그리하여 더욱 횡행하는 사기성 경제범죄들. 그 와중에 '은퇴'라든지 노동소득이 주가 되는 노동자들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맞닥뜨리는 삶의 위기. 그야말로 '위기'... 



그 시절 '노마드족' 은 더욱 급증했다 한다. '워캠퍼'들이 날로 늘어나고 거대 소비의 한 층인 '집'이라는 공간을 거부해버리는 혁신적이고도 파괴적인 생각의 주인공들. 물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이들이 대부분일 수 있으나 그들은 반대로 나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각 또한 잃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나 그 안에서도 하나의 독특한 사회문화가 형성되고 마니. 집이 아닌 차량을 거주지로 삼아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삶을 그들은 더욱 자유롭고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낸다는 나름의 명분을 앞세운다. 그러나 솔직히 내 눈에는 '일부러' 그렇게 노마드족이 된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결국 뼛속 깊이 진실되게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밖에 살아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지 라는 다소 날카로운 반문을 던지게 되고 마는 것... 




밥은 월 스트리트의 나쁜 놈들을 욕했다. 집을 포기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는 거의 방어적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언제나 내야 할 돈을 제때 냈으며, 좋은 신용등급을 유지했다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집값이 계속 올라간다는 복음을 믿은 것이 그의 몰락이 되었다.  p. 99


워캠퍼들은 별다른 교육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며, 계절성 인력을 찾는 고용주들에게는 편리함의 완벽한 본보기다. 그들은 고용주가 필요한 때와 장소에 나타난다. 자기 집을 스스로 가져와서는, 트레일러 주차장을 일이 끝나면 비워지는 단기간의 기업 의존형 마을로 바꿔놓는다. 워캠퍼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할 만큼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힘든 업무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교대 근무가 끝나면 너무 피로해 사람들과 어울리지조차 못한다.  p. 102


내가 아마존 캠프에서 만난 많은 노동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놀랄 만한 속도로 늘어난 인구의 일부다. 하락 중인 고령의 미국인들. 엠파이어 같은 곳의 전성기에 - 직업 안정성과 연금으로 완성된 탄탄한 중산층의 시대에 - 그들의 상황은 사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p. 109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일을 쉴 수 없다는 뜻이다. 2016년에는 900만 명에 가까운 65세 이상의 미국인들이 여전히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보다 60% 상승한 수치였다. 경제학자들은 그 숫자가 계속 증가할 거라고 예측한다. 최근의 여론 조사는 미국인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산이 버텨주는 나이보다 오래 사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p.110





노마드랜드가 그러나 한편 마냥 부정적이고 사회비평적이고 날카로운 분위기만 내비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영화도 각광을 받았고 묘하게 책 여기저기에서 따뜻한 유대관계나 희망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에,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더욱 비참하게 슬프게만 비쳤던 이유는 아마도.. 탈출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예 눌러앉게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반대로 탈출하려는 의지라기보다는 그저 하루 그 순간을 감사하게 살아내려는 '인간'의 '본능'과 생존 감각을 보고 말았기에...



불안한 시기에 좋은 표정을 지으려는 것이, 그리고 그 표정을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노마드들 사이에서는 다른 무언가도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보는 대로의 진실은,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혹독하게 영혼을 시험하는 종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힘겹게 싸우는 동시에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적응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연대감을 찾으려는 인류의 놀라운 능력을 증명해준다. 리베카 솔닛이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지적하듯, 사람들은 위기의 시기에 기운을 내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놀랍고도 강렬한 기쁨을 느끼면서 그렇게 한다. 견뎌내려는 우리의 의지를 뒤흔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별이 빛나는 광활한 하늘 아래 동료 워캠퍼들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을 때와 같은 공유의 순간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하다. 


다시 말해 내가 몇 달째 인터뷰하고 있던 노마드들은 무력한 희생자들도, 걱정 없는 모험가들도 아니었다. 진실은 훨씬 더 미묘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을까. 그즈음에 나는 더 이상 당일치기 여행자가 아니었다. 나는 숱한 날들을 워캠퍼들 바로 곁에서 보내며 다섯 개 주에 걸쳐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겨울 회합 동안 밤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서부터는 쿼츠 사이트의 텐트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내가 바라는 정도만큼 그 현실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들의 삶을 파악할 만큼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더 온전한 몰입이, 날이면 날마다 그들 사이에서 몇 달을 보내는 일이, 몇몇 야영지에 단골이 되는 일이 필요했다. p.272



한국은행의 기준 금리 인상은 시작되었다. 전 세계가 Fed 의장의 말 한마디에 증시가 왔다 갔다 하고 만다. 드디어 '금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대출 금리도 덩달아 인상되며, 다 끌어 모아서 꼭지에서 빚 잔뜩 얻어서 산 이들은 과연 자신이 '꼭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더 오를 거야 '라는 일종의 근거 없는 '복음'과 같은 부동산 신봉자들의 말을 믿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벨트 단단히 차고 고꾸라치려는 하락기에 대응하려고 누군가들은 현금과 현물을 차곡차곡 축적하고 침묵하며 아울러 지키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현실.... 그냥 이상하게 자꾸만 그런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종종 책을 읽으며 동시에 겹쳐지게 되고 마는 건 왜였을까. 은퇴의 종말이 휴식이 아니라 더 큰 암울한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 기술은 압도적으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나 반면에 그 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최첨단으로 풍요로워졌는가. 편리해졌다고는 하나 심신적으로 더 피로한 시대를 살아가는 건 아닐지. 



저자는 그러나 말한다. '길 위에는 희망이 있다' 고. 떠돌이 유랑자라고 할지언정 그들은 '뼛속 깊이 새겨진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신념' 이 그들을 살아내게 만들고 있다고. '온라인으로, 일터에서, 전기나 수도 따위의 공공설비 없이 자급자족 캠핑을 하는 동안에, 그들이 만나면 부족이 형성되기 시작' 하면서 또 하나의 기묘한 사회층을 형성해간다고. 기묘한 연대와 동류의식.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그리 반갑지 않은 사회 현상임은 아닐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나라 전체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 낡은 구조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과 동시에 우리 자신들 조차 지금 새롭고 엄청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 그것이 대 침체이든 공황이든 아니면 계속되는 풍요로움이든, 개인적으로는 전자라 생각하고 말지만 -  새로운 무언가의 중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는 느낌.... 나는 이상하게 그 느낌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책을 읽는 며칠 동안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육아가 힘들다는 핑계를 대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사회 속에서 경제 노동인구를 자처하고 실제 다음 달부터는 일터에서 다시 워킹맘으로 존재하게 되는 나를 상상하자니. 어딘지 나는 이번 생의 팔자를 우습게 생각해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중하게 '현재'의 위치를 생각하게 되고 만다. 지금의 풍요로움이, 이 경제시스템이... 언제까지 풍요로울 수 있을까. 시스템의 붕괴가 일어나는 순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무엇이 다가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뭐 그런 지극히 회의주의적인 그런 생각을...... 다시금 또. 하고 말게 되는. 



노마드랜드. 정말 괜찮은, 1월의 책을 찾아내어 기쁘다... 동시에 조금은 묘하게 울적하다. 왜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밝은 기쁨은 아닌 것만 같다. 예민한 기쁨인 걸까. 



이것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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