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기대하는 삶만으로는 진짜 내 삶을 채워 나갈 수 없다.
가끔 속내를 넌지시 툭 하고 주고받을 줄 아는 고마운 지인이 생겼다.
나보다 3살 많은 그녀는 두 딸의 엄마이고 워킹맘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의 육아를 도맡고, 그 와중에 독서까지 병행해내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그녀와 요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있다.
요즘 마음은 어때요
보통의 평범한 일상의 대화에서 약간 핀트 벗어나 버린 듯한. 이렇게 뜬금없이 마음을 물어보는 나는 누군가들에게 어딘지 '이상한'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이 질문을 자연스레 스스로 해석해 내곤 또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칠 줄 아는 센스를 장착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긴 터널을 이제 좀 빠져나온 것 같아. 내일 휴간데, 친구랑 같이 길상사에 가려고
걷는 휴식. 좋다.
쉬어야지.
쉬는 것 좋지..
속내를 깊숙하게 파고 들려하지 않기에, 우리 둘 사이는 서로가 알 수 없는 사건들을 가득 각자의 길에서 경험한 채 살아왔을 테다. 원래 사람이 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마련이니까.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여자이고, 엄마이고, 순탄하지 않았던 며느리이고, 아내라는 역할이 주어진 각자의 삶 속 여주들이라는 점.
그 때문일까.
우리는 가끔 만났을 때 암묵적으로 눈을 보고 입술을 떼어 서로가 건네는 짧은 문장들에서도 넌지시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떤 느낌으로 어떤 마음으로 지금 지내고 있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서로가 솔직한 캐릭터인 탓에, 할 말 못할 말 가릴 말 가리지 않을 말의 범주를 넘나들며 꽤 거침없이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감사한 인연일 수밖에.
그녀에게 빌려준 책이 담긴 가방을 들고 퇴근길 행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중에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겨울만 되면 나도 모르게 가끔 눈물이 흐르곤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행인 건 좋지 않은 느낌의 엉엉 우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 갑자기 나도 모르게 떨어져 버린 눈물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괜스레 서글퍼지는 마음이 갑자기 잠시 스쳐 지나가고 있다며 때론 객관화할 줄 아는 혜안이 좀 붙다 보니 그런 걸 지 모르겠다.
스쳐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또 그렇게 흘러가면 그뿐이라는 걸 안다.
지극히 사적인 나만 이해될 수 있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있을 테다.
좋아하게 되어버린 추운 겨울이 완전히 다가왔다는 터무니없는 이유. 날이 어둑해져서 깜깜해지려고 하는 해 질 녘의 하늘빛이 나 보란 듯이 멋스러워서. 코끝엔 이미 겨울이 다가왔는데 너무 추워서 시린 손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또 깜깜한 터널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인지. 닿지 않은 말과 마음을 감추는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더더욱.
가고 싶고 듣고 싶었던 1시간짜리 강의를 가지 못해서. 신랑과 아이에게 나의 시간을 양보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상하게 괜찮다가도 가끔 집에 들어가면 내 시간이 나의 시간이 또 아니게 변해버리고 마는 육아의 참맛이 문득 싫어져서 그랬나 보다. 여전히 철이 덜 들어서. 여전히 욕심이 많아서.
이러저러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떠올리다가 어느새 종점까지 가버렸을 때.
아차 싶었다. 요즘은 이런 '아차'싶은 순간들이 많아져서 위험을 느끼곤 한다. 마음이 어디로 튀어나갈지 몰라서. 그러나 다행인 건 이제는 그저 두고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튀어나가다가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바닥을 찍다가도 다시 꾸역꾸역 살아서 올라갈 줄 아는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믿어줄 줄 아는 근력이 좀 생긴 탓일지 모르겠다.
애쓰지 않기로 말은 하지만, 사실은 애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애쓰지 말기. 신경 끄지. 나답게 살기. 이런 게 화두가 된 세상이다. 근데 나는 가끔 좀 반대인 것 같다.
애를 좀 써보고 싶어 진다. 가급적 마음이 샘솟고 에너지가 견뎌줄 줄 안다면.
사람을 대할 때 여전히 소통하려고 애를 쓰고 싶어 진다. 내가 애쓰지 않으면 결국 내게도 돌아오는 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신경도 좀 쓰고 싶다.
꿈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이제는 입 밖으로 쉽게 '꿈'에 대해서 말하기가 머뭇거려지는 탓에 나이 탓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꿈을 먹고살기로 여전히 철 없이 결심한 탓에 스스로 얼마나 또 외로울지언정 내 꿈에, 내 바람에, 원하는 것들에 여전히 신경을 쓰며 살고 싶다.
나답게 사는 건 솔직히 말장난인 것 같기만 하다.
나 다운 게 뭔지 정의 내리지 못할 때. 정의 내릴 필요를 굳이 느끼지 못하면 더더욱. 아무 말 대잔치를 입 밖에서 줄줄줄 새어 나오는 나답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늘 화들짝 놀라곤 한다. 사실 사회에서, 조직에서 이 세계관에서 내게 주어진 여러 역할극을 병행하다 보면 내가 정말 바라는 '나'는 이미 없어져 버리고 말아버린다. 그래서 반대로 결심했다.
사실 나답게 사는 걸 크게 바라지 않게 되었다.
다만 '덜 불행하고 더 기쁜' 나답지 않은 나가 더 쉽고 나은 듯도 싶다.
나 답지 않게 울기도 하고 헛소리 돌직구도 날려보는 여전히 나 답지 않은 나는, 그럼에도 집에서 식구들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 양육을 위해 내 시간을 양보하고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삶을 '지금'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반복적인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나의 허한 구석을 선명히 안다.
가족들이 타인들이 기대하는 '삶'만으로는, '진짜 내 삶'을 채워갈 수 없다.
이렇게 마음 깊숙하게 자리한 나만의 바보 같은 욕망을, 그럼에도 나 밖에 채워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 욕심을 꾸역꾸역 충족시켜 나가고자 글을 쓰기로 결심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내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요즘을 사는 시간에 유일한 선택이기도 한 듯 싶다.
나 아니면 누가. 그리고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니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해 보는 것. 그뿐이라고...
오늘 길상사에 간 그녀에게 아침 추워진 공기를 걱정하며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날 추운데 잘 다녀와요. 난 글 잘 쓰고 있을게
그래. 오롯이 널 위한 그 시간 잘 보내
그래. 나는 그녀 말 대로 오롯이 날 위해 이 짧디 짧은 시간을 오늘도 잘 보내려 한다. 그러니 당신도 잘 보내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