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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7. 2017

#44. 나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타인이 기대하는 삶만으로는 진짜 내 삶을 채워 나갈 수 없다. 

 가끔 속내를 넌지시 툭 하고 주고받을 줄 아는 고마운 지인이 생겼다.

 나보다 3살 많은 그녀는 두 딸의 엄마이고 워킹맘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의 육아를 도맡고, 그 와중에 독서까지 병행해내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그녀와 요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있다.


요즘 마음은 어때요 


 보통의 평범한 일상의 대화에서 약간 핀트 벗어나 버린 듯한. 이렇게 뜬금없이 마음을 물어보는 나는 누군가들에게 어딘지 '이상한'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이 질문을 자연스레 스스로 해석해 내곤 또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칠 줄 아는 센스를 장착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긴 터널을 이제 좀 빠져나온 것 같아. 내일 휴간데, 친구랑 같이 길상사에 가려고 
걷는 휴식. 좋다. 
쉬어야지. 
쉬는 것 좋지.. 


 속내를 깊숙하게 파고 들려하지 않기에, 우리 둘 사이는 서로가 알 수 없는 사건들을 가득 각자의 길에서 경험한 채 살아왔을 테다. 원래 사람이 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마련이니까.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여자이고, 엄마이고, 순탄하지 않았던 며느리이고, 아내라는 역할이 주어진 각자의 삶 속 여주들이라는 점. 


 그 때문일까. 

 우리는 가끔 만났을 때 암묵적으로 눈을 보고 입술을 떼어 서로가 건네는 짧은 문장들에서도 넌지시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떤 느낌으로 어떤 마음으로 지금 지내고 있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서로가 솔직한 캐릭터인 탓에, 할 말 못할 말 가릴 말 가리지 않을 말의 범주를 넘나들며 꽤 거침없이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감사한 인연일 수밖에. 


 그녀에게 빌려준 책이 담긴 가방을 들고 퇴근길 행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중에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겨울만 되면 나도 모르게 가끔 눈물이 흐르곤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행인 건 좋지 않은 느낌의 엉엉 우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 갑자기 나도 모르게 떨어져 버린 눈물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괜스레 서글퍼지는 마음이 갑자기 잠시 스쳐 지나가고 있다며 때론 객관화할 줄 아는 혜안이 좀 붙다 보니 그런 걸 지 모르겠다. 


스쳐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또 그렇게 흘러가면 그뿐이라는 걸 안다.


 지극히 사적인 나만 이해될 수 있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있을 테다.

 좋아하게 되어버린 추운 겨울이 완전히 다가왔다는 터무니없는 이유. 날이 어둑해져서 깜깜해지려고 하는 해 질 녘의 하늘빛이 나 보란 듯이 멋스러워서. 코끝엔 이미 겨울이 다가왔는데 너무 추워서 시린 손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또 깜깜한 터널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인지. 닿지 않은 말과 마음을 감추는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더더욱. 


이젠 '꿈'을 섯불리 입밖으로 말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꿈을 먹고 살기로 결심한 이상, 외로움은 견뎌내야 한다..그래서 서글퍼졌다. 그래서 울었나 싶어.


 가고 싶고 듣고 싶었던 1시간짜리 강의를 가지 못해서. 신랑과 아이에게 나의 시간을 양보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상하게 괜찮다가도 가끔 집에 들어가면 내 시간이 나의 시간이 또 아니게 변해버리고 마는 육아의 참맛이 문득 싫어져서 그랬나 보다. 여전히 철이 덜 들어서. 여전히 욕심이 많아서. 


 이러저러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떠올리다가 어느새 종점까지 가버렸을 때. 

 아차 싶었다. 요즘은 이런 '아차'싶은 순간들이 많아져서 위험을 느끼곤 한다. 마음이 어디로 튀어나갈지 몰라서. 그러나 다행인 건 이제는 그저 두고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튀어나가다가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바닥을 찍다가도 다시 꾸역꾸역 살아서 올라갈 줄 아는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믿어줄 줄 아는 근력이 좀 생긴 탓일지 모르겠다. 


애쓰지 않기로 말은 하지만, 사실은 애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애쓰지 말기. 신경 끄지. 나답게 살기. 이런 게 화두가 된 세상이다. 근데 나는 가끔 좀 반대인 것 같다. 


애를 좀 써보고 싶어 진다. 가급적 마음이 샘솟고 에너지가 견뎌줄 줄 안다면. 


 사람을 대할 때 여전히 소통하려고 애를 쓰고 싶어 진다. 내가 애쓰지 않으면 결국 내게도 돌아오는 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신경도 좀 쓰고 싶다. 

 꿈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이제는 입 밖으로 쉽게 '꿈'에 대해서 말하기가 머뭇거려지는 탓에 나이 탓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꿈을 먹고살기로 여전히 철 없이 결심한 탓에 스스로 얼마나 또 외로울지언정 내 꿈에, 내 바람에, 원하는 것들에 여전히 신경을 쓰며 살고 싶다. 


마음이 사랑하는 장면을 현실에서 눈으로 발견했을 때. 가령 이런 하늘을 볼 때의 고마운 뭉클함...되도록 많아지면 좋겠어.


 나답게 사는 건 솔직히 말장난인 것 같기만 하다. 

 나 다운 게 뭔지 정의 내리지 못할 때. 정의 내릴 필요를 굳이 느끼지 못하면 더더욱. 아무 말 대잔치를 입 밖에서 줄줄줄 새어 나오는 나답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늘 화들짝 놀라곤 한다. 사실 사회에서, 조직에서 이 세계관에서 내게 주어진 여러 역할극을 병행하다 보면 내가 정말 바라는 '나'는 이미 없어져 버리고 말아버린다. 그래서 반대로 결심했다. 


사실 나답게 사는 걸 크게 바라지 않게 되었다.
다만  '덜 불행하고 더 기쁜' 나답지 않은 나가 더 쉽고 나은 듯도 싶다.

                                                        

        

 나 답지 않게 울기도 하고 헛소리 돌직구도 날려보는 여전히 나 답지 않은 나는, 그럼에도 집에서 식구들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 양육을 위해 내 시간을 양보하고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삶을 '지금'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반복적인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나의 허한 구석을 선명히 안다. 


가족들이 타인들이 기대하는 '삶'만으로는, '진짜 내 삶'을 채워갈 수 없다. 


 이렇게 마음 깊숙하게 자리한 나만의 바보 같은 욕망을, 그럼에도 나 밖에 채워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 욕심을 꾸역꾸역 충족시켜 나가고자 글을 쓰기로 결심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내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요즘을 사는 시간에 유일한 선택이기도 한 듯 싶다. 

 

나 아니면 누가. 그리고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니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해 보는 것. 그뿐이라고... 

         


시간은 반복되나, 나의 시간은 반복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두려워도 움직여보는거지. 나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겠어..



오늘 길상사에 간 그녀에게 아침 추워진 공기를 걱정하며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날 추운데 잘 다녀와요. 난 글 잘 쓰고 있을게 
그래. 오롯이 널 위한 그 시간 잘 보내    


그래. 나는 그녀 말 대로 오롯이 날 위해 이 짧디 짧은 시간을 오늘도 잘 보내려 한다. 그러니 당신도 잘 보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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