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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0. 2017

#45. 숫자 이상의 '월급'그리고 일

더 나은 선택하기 전에 생각해 봐요. 스스로 진지하게.  

 3달 전에 온라인 재무상담을 해 드린 27세의 그녀가 오늘 출근길에 문득 생각이 났다. 그녀는 처음에 청운의 꿈을 가지고 나와 만났었다.


"백조에서 드디어 탈피하니 이렇게 계획도 세우게 되고. 정말 좋아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좋게 만든 것일까.

 취업에 되어서?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되어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여하튼 나도 그 기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만큼 그녀에게 '일자리'라는 것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졌을 테다.


누군가에게 일자리는 정말 숫자 이상이다. 생존이고 필수 도구다.
그래서 소중하다. 그러니 한눈팔 수도 없는 게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비록 인턴으로 시작한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뛸 듯이 기뻐한 그녀에게, 감히 밥벌이의 더 냉혹하고 치열하며 맞서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차마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저 재무상담 이외의 사소로운 사견을 간접적으로 덧붙였을 뿐. 내가 뭐라고 그녀의 기쁘기만 한 그 시작에 초를 칠(?) 수는 없었으니깐.


시작은 빛이 난다. 빛이 오래가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되도록 오래오래...


 그녀는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에 6개월 시한부 일자리였다. 누군가에게는 그 일자리가 생존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거다. 그녀에겐 그랬을 거다.


 그렇게 기뻐하며 훈훈하게 상담을 마무리 한 그녀에게서 최근에 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퇴근을 하고 싶다는, 월급 한 푼 두 푼 모아봤자 쥐꼬리 같다는, 다 제로섬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올 것(?) 이 왔구나 싶었다.  나는 큰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재무 상담 때 보다 꽤 많은 메일과 쪽지를 주고받았다.


 사실 내게도 ‘원하는 직장에만 들어가면 다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취직이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새 직장에 100%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10년 차인 지금, 복직을 해서 깨달았을 때의 나름의 조용한 충격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이건 마치 “대학만 가면 세상이 바뀐다”라고 이야기하던 어른들에게 느꼈던 배신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었다. 소위 말하는 취업 9종 세트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경력, 사회봉사, 성형수술) 중 몇 개만을 달성하며 취업에 성공하여 나름 밥벌이를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나도 그럴진대, 이 어려운 관문을 뚫고 애써 일자리를 쟁취한 후에 느끼는 그녀의 허탈감이란 아마 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일하게 된 후에도 직장인이라는 역할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일할 자격이 있는, 밥값 하는 사람임을 알게 모르게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 지 모른다. 편의점에서조차 ‘열정 페이’를 운운하며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려는 게 현실이니까.


 그러니 “회사가 전쟁터지만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 대사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터. “버티는 게 최고”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건 당연한 듯싶다. 실시간 검색어에 ‘공무원 봉급표’ '대기업 연봉'이 당연시하게 등장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새해 소망이 ‘일자리’ '부자'라는 건 이젠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키워드니까.


 삶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가 사는 밥벌이를 하는 현실은,
절대 만만치 않다.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의 마음엔 여유가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삶의 가치를 따지고 취미를 생각하고 더 잘 살 생각을 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모임, 그리고 시대 트렌드와 각종 서적들, 자기계발서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녀도 압박감이 밀려왔을 테다. 그러다 어느새 자기 연민에 빠졌을 것이고. 나도 한때 바닥을 치고 들기만 하는 자기연민에 빠졌었고, 그 고민을 달고 산 내 나이 때의 그녀가 또다시 그러려고 하는 찰나였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감사함을 이제서야 나는 깨닫곤 한다. 추운 날 따뜻한 공간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그런데 한편으로 또 다른 직장인의 부류도 있는 걸 볼 수 있다.

 업에 충실하면서도 틈틈이 준비한다. 그렇게 꾸준하고 치열하게 계획해서 결국 귀농하는 직장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의 유입 인구가 매년 늘어날 정도로 지방으로 이주하는 젊은이들도 취업 대신 선택한 그 움직임에 더 늘어나는 요즘이라고 한다.


 그뿐 인가? 비록 비슷한 밥벌이 하고 살 지 언정 넌지시 조용히 투잡 쓰리잡을 뛰어가며 개개인의 퍼스널 브랜딩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 이전에, 누군가를 갈구고 험담하고 험담 해 대기 바쁜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말이다. 공통된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며, 그들이 그렇게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인맥과 시간을 통해서 또 다른 직장인들은 새로운 그들만의 사업 아이템을 '작정한 모임'을 하는 그룹으로까지 재탄생되는 걸, 온라인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 요즘이다. 가까운 지인 조차 이미 시작을 했고 그는 아마 조만간 조직에 소속됨을 거부하고 그만의 길을 걸어가지 않을까 싶다.


실체는 처음에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열망을 생각'할 줄 아는 이는 그 실체 없는 열망을 위해 꾸준히 움직인다. 그러다 결국 실체는 뚜렷해진다. 삶의 진리는 이런게 아닐까


 이렇게 말이다. 마치 '하루 종일 아무 할 일이 없다가도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내 존재를 온통 바쳐야만 하는 국경선의 보초병' 같은 하루를 사는 직장인으로서의 인생만이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 일상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듯싶다. 개인의 성장과 삶의 가치가 화두인 시대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만이
결국에 움직일 수 있는 시대 말이다.



 지금보다 더 좋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기억했으면 했다.

 지금의 몇 달 다니지 않고 버티기가 힘들어서 하소연하는 그녀의 고충을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만 굳이 돈벌이와 직업을, 업을 대함의 태도를 자꾸 돈과 연결시키면 삶에서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다들 성공하려면 경력 전환을 운운하곤 하지만 굳이 경력을 전환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위치에서 쉽게 보이지 않아도 분명 잘하는 일이 있을 거라는 것.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지친 그녀에게. 큰 도움이 절대 되지 않는 꼰대식 조언일 수 있을지언정. 그녀가 그 경쾌한 메일 속에 비친 말투를 여전히 간직하며 살아주기를 바란다.


  여전히 나의 일과 업을 대함에, 나의 삶을 사는 풍경과 함께 잘 버무려 되도록 풍성하게 꾸며가고 싶다.

 작게는 내 삶을 그렇게, 크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더 크게는 친구들과 떼거지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큰 요즘이다. 그리고 그 삶의 가치를 자본이라는 것과 연결 짓는 대신, 사람이라는, 사랑이라는 더 소중한 가치로 활발히 연결시켜 내고 싶다. 요즘 들어 원하게 된, 더 나은 삶에 대한 나의 당찬 꿈일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입버릇처럼 “아, 일하기 싫다!” 혹은 “회사 가기 싫다”라고 말할 그녀에게 넌지시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싫은지 스스로 치열하게 파고들” 것을 감히 권하고 싶다. 비록 지 금 현실이 내리막 인생 같아서, 올라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지언정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찾고 찾고 또 찾아가는 것. 그러다 맞는 길, 천운 같은 길을 발견했을 때 나를 던질 수 있는 무모하고 엄청난 용기를 저지를 수도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녀에게 오늘 꼰대 메일을 보냈다. 세 달이 그녀에겐 3년 같을지언정 사회의 참맛(?)을 뼈저리게 경험해 내어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기엔 절대 길지 않은 이제 시작으로 보였기에.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지금 당장 확실하지 않으면 지금의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좀 더 버텨보시는 건 어때요. 그래도 도저히 아닌 것 같으면, 내 안의 중심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지를 먼저 곰곰하게 생각하며 말이죠.

 내가 중심이 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일이란 것도 어떤 게 나와 맞는지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일을 선택할 '권리'는 어쩌면 일을 충분히 겪고 난 '의무와 책임'을 치열하게 다 고 나서야 또 얻을 수 있는 값진 것 아닐까요. 또한 기억해야 할 건 누군가에게는 일자리를 선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처음에 일자리를 얻고 기뻐했던 자신을 기억해내며 말이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나도 매일 같이 균형을 잡고 엇나가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한 두 명이라도 있다면, 또한 경제적 목적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여전히 꾸며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다양한 삶의 욕망을 충분히 삶에서 녹이며 충분히 행복을 담아내는 곳, 그게 직장이라는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까짓것, 안될 이유 없지 않을까.


가다보면 목적지도 도착하는 게 '길' 아니겠어요... 그러니깐 그렇게 우리 잘 걸어가봐요...


쉽게 말해서 미안했던, 그러나 절대 쉽지 않은 메일이었음을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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