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워하되 미워함 없이

enri de Toulouse Lautrec

by 헤븐

오전 8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현관을 나서기 전부터 둘째 아이의 칭얼거림은 시작되었다. 등원 길이었고 날은 어제보다 추웠다. 모자와 장갑을 주었음에도 아이는 거부하며 내적 불만을 보이려 했다. 예감은 틀리는 법이 좀처럼 없다. 쉽지 않겠다는 느낌은 그대로 적중했고 시종일관 둘째 아이는 한 사람을 향한 불만족스러움의 감정을 보내는 중이었다. 조급함이 밀려왔다. 일찍 가야 일찍 너희 둘을 데리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 아이는 모르고 나만 아는 진실. 그러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의 가방을 챙기고 간단한 청소를 하고 저녁 메뉴를 구상하며 반찬 혹은 식재료의 준비와 쌀을 씻어서 불려 놓는 그런 것들. 누군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반대로 누군가의 공력과 에너지와 시간이 적잖이 소비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른다. 알려하지 않는다면. 알고 싶지 않다면.



급기야 아이를 채근했다. 조급한 마음과 서운함과 속상함으로 인한 결과였겠다. 그리고 반복되는 행동 패턴대로 혼을 내고 난 이후엔 늘 죄책감과 마주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지 못한 나를 원망하는 마음.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한 나를 미워하는 마음. 좀 더 괜찮은 엄마가 되지 못할까 라는 자책. 그러나 도대체 여기서 더 얼마큼 잘해야 되는 것인가라는 무언의 속상함. 급기야 언제쯤 자유와 해방을 온전히 합당히 누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라는 인생을 향한 묘한 반발심...



아이들이 부러웠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자유로움' 이 부러웠던 것일지 모른다. 마음껏 자유롭게 자신의 내적 불만족스러움을 토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내비쳐도 안전하게 감내해 줄 존재가 바로 '나'라는 인간이 되어 버렸지만. 반대로 아이를 채근하며 그리 좋은 마음과 생각의 소유자가 아니었음에. 한쪽의 만족이 한쪽의 결핍으로 충족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언제쯤 그 순환고리가 개선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프고 쓰려도 묵묵히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나아간 이후의 끝은? 인내하는 인간에겐 무엇이 남는가. 삶의 무엇을 위해 그녀는 나아가는가. 너무 깊이 생각하고 만 나는 때때로 길을 잃고 만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너를 사랑하고 싶은 '나'이지만, 한편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인 것도 같아서. 아이들을 부러워하되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것만이 내가 택해야 하는 유일함인 것 같아서.



800px-Henri_de_Toulouse-Lautrec_017.jpg La toilette, oil on board, 1889


작가마다 문체와 개성이 있듯이 명화 속 그림들도 화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예술가가 관찰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그림에 담겨 있기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은 특히나 그렇다. 소위 있는 집 자제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좋은 인프라를 활용하지 못한 채 10대에 신체적으로 불구로 살아야 했던 프랑스 귀족으로서의 자신은 버린 채, 대신 그가 눈여겨 지켜본 장면은 프랑스 몽마르트르 거리 구석구석에 위치한 카페, 매음굴, 술집과 같은 공간을 향했다.



위의 그림인 '몸단장 (La Toilette)' 은 특히 그가 여성이라는 인물 이전에 그 여성의 '삶'이라는 시간을 보려 한 흔적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림속 장면은 제목과 달리 역설적이다. 몸단장하는 여성의 모습치고는 어딘지 어색하다. 인생 다 귀찮다는 듯 양다리를 벌리고 치마를 걷은 채 철퍼덕 바닥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그녀의 상반신은 이미 반 나체가 된 채로 메말라 보이는 앙상한 어깻죽지가 도드라진다. 동시에 무언의 고독한 한숨이 어울리는 듯싶다. 어쩌면 툴루즈의 상태를 대변한 모습은 아닐지. 한창이어야 할 유년 시절 양쪽 대퇴골 골절로 인해 다리 성장이 멈춰 버려 평생 불구의 단신으로 살아야 했던 작은 체구의 자신이. 신체적 문제로 인한 삶의 괴로움과 고독함이라는 무의식의 마음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면?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이성과의 보통의 연애가 어려웠다던 로트레크가 그리하여 술집이나 매춘부들과 가까이 지내게 됐기에 관련된 여러 그림이 나왔다는 주장이 상당수 있으나 나는 사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약자나 소수자가 된 '자신'이었기에 그러한 인물들의 삶이 또한 얼마나 지난한 피로함과 생의 허무함을 낳게 되는지를 그는 대변하려 했떤 건 아니었을까. 결국 그림을 통해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려 했을 로트레크는 그리하여 그런 자신의 인생관을 화폭 속에 성실히 기록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담아내려 했던 건 아닐까. 생애주기가 길지 않은 그였지만 꽤나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하니. 게다가 어려서부터 그는 알았을 지 모른다. 같은 '조건'을 지니지 못한 비루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그 남루하고 처참한 삶 속에도 어떤 빛나는 무언가가 있음을. 반드시 그 보석 같은 무엇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그는 '불구가 되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다' 고 말한 바처럼 말이다.



In Bed, 1893, oil on cardboard, Musée d'Orsay (침대에서)


여기,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지긋하게 서로를 향한 채 침대에 누워 있다. 너무 편안해 보여서 그 자세와 표정 자체가 너무나도 부럽다. 게다가 연인 옆에서 함께 누워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거의 불가에 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침대에서'와 '키스'라는 두 그림은 로트레크의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데 단순히 보면 그저 연인에 불과할 테지만 만약 두 인물이 사실은 모두 여성이며 직업은 매춘부라 한다면? 이 그림 속에 담긴 진실을 알고 나면 사뭇 그가 인생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숙연히 숙고하게 만들곤 한다.



벨 에포크 시절 한쪽에선 그야말로 풍요롭고 화려한 '좋은 시대'를 보내겠지만 한편에선 보이지 않게 무너지듯 우울한, 덧 없이 흐르는 삶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걸 비꼬아 말해주듯. 그녀들의 처연한 삶 속에서 그럼에도 서로를 지탱하며 의지하듯 살아낸 그저 인간의 본연적 슬픔을 담아내고자 했을 로트레크의 생각이 담긴 그림은 아닐지. 화가도 사랑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렇게 인생을 지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 부러움이 담긴 그림은 아니었을까. 부러워하되 미워함은 절대 없는, 그런 애달픈 그리움을 담고 싶었던 것이라고...



In Bed, The Kiss , 1892


'침대에서 키스'라는 위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매춘부라면 화가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피폐하게 그늘진 지친 삶을 서로 보듬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그녀들 자신, 그리고 함께였을 서로였음이라고. 게다가 로트레크는 무언의 비판을 동시에 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듯, 당시 파리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놓였있던 시기였고 돈을 벌기 위해 도심으로 올라온 여성들이 증가하고 급기야 그 정도가 심해졌을 때 그녀들의 생계수단은 매춘부라는 직업을 택하는 결과에 이르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국가는 그저 보이는 것에 대한 통제'만' 할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해결책을 오히려 만들어야 함이 아닌지에 대해서. 그것이 인권을 수호하는 국가와 법의 책무임을 역설적으로 그림을 통해 보이려 했던 건 아니었을지.



로트레크는 주위 사람들의 생활이나 장소와 일상의 가려진 모습 면면을 세심하게 포착했다. 비록 그가 마흔도 채 되지 않은 36세에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요절했다지만 그에게 그 짧은 인생은 끊임없는 모순과 본능의 억제와 한계와 마주쳐야 하는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일상 곳곳에 보이는 것들 안에서 정녕 보이지 않는 인간의 본연적 모습을 들춰내려 함에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의 그림을 가만히 보면서 느끼게 되고 만다.




800px-Henri_de_Toulouse-Lautrec_018.jpg The Laundress, 1884–188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세탁부)



'세탁부' 그림 앞에서 나는 멈췄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 씻기고 먹이고 놀리고 재우고 그 이후에 남은 가사활동을 위해 건조기 앞에서 빨래가 말라가며 남겨진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시간 확인을 하면서도 문득 생각에 잠기게 되는 나와 비슷해 보여서. 멈춤 없이 돌아가야 제 기능을 하는, 눈 앞의 건조기와 내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었기에. 인생의 덧없음이나 묘한 허무적 쾌락을 그럼에도 확실히 직시하려 한 그의 그림이. 오늘 아침 일그러질 뻔 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기억하게 만든다.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그 시간의 영속성이 때때로 큰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격렬한 마음의 요동침도. 나를 부단히 채근하다 피폐한 자신과 마주하며 괴로워해도.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럼에도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나만의 '벨 에포크'를 간절히 바라면서... '좋은 시절' 은 바로 우리가 '우리'로 함께 나아가고 있는 지금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편안해 보이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소셜 미디어 속 남들의 멋진 글들이나 사진, 그 화려한 현생의 장면들을 너무 부러워하지는 말자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것이며 설령 부러워는 해도 미워하지는 말자고. 지금 그렇지 못한 '나'를. 누군가는 이렇게 매일 아침 분투하듯 출퇴근하면서도 씩씩하려 노력하는 나를 한편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엄마인 나는 그래서 더 힘을 낼 것이다. 내 '일'과 너라는 '사랑'의 대상. 그 모두를 지키기 위해...





Reference)

책)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마로니에북스)

web)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Henri_de_Toulouse-Lautr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