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

John White Alexander

by 헤븐

올해 7세가 된 쌍둥이 중 1분 먼저 태어난 첫째는 부쩍 잠들기 전 나를 떨리게 만든다. 그 작고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내 볼을 쓰다듬는 것이다. 그 후의 화룡점정은 아이의 말이다. '내 사랑'이라는 첫째의 단어에 결국 무장해제되고 만다. 처음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었다. 아마도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고 긴 하루였을 게다. 그랬으니 오죽할까. '내 사랑'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드디어 너로부터 듣는구나, 들리는구나, 결국 너와 내가 이렇게 문장을 주고받게 되었구나, 정말이지 드디어. 뭐 그런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오며 동시에 격세지감을 새삼스레 느끼며 과거의 기억마저 다가오는 것이다. 그들을 키우며 입술을 깨물며 인내해나가던 순간순간이.



'내 사랑' 이라며 볼과 어깨를 토닥이는 기특한 첫째는 요즘들어 부쩍 묻곤 한다. 엄마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나는 답한다. 그야 당연히 너희 두 명이지라고. 그러면서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누가 제일 좋으냐고. 그 후에 들리는 아이의 대답에서 나는 다시금 심장이 쿵 함을 느꼈다.



- 나는 내가 제일 좋아.



감격스러웠다. 정말이지 그랬다. 동시에 너무나 다행이어서 아마 심장이 떨렸을지도 모른다. 정말 다행이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네가, 그런 너 자신을 좋아해 줘서. 그리고 그걸 알려 주어서. 한편으로 어쩌면 부러워서. 정말 그래서. 아이에게 말했다. 그 마음을 꼭 기억하라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제일 귀한 존재는 다름 아닌 너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솔직한 마음을 답했다. 가끔은 무너지는 그 마음을 감춘 채. 나도 내가 제일 좋기를 바라지만 사실 이제 나는 나보다 더 좋아하는 존재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너무 잘 알아서 때때로 고통스럽기에.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생겼기에. 너무 좋아서 아픈 만큼.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만큼.



- 고마워. 너는 너를 꼭 좋아해야 해. 그런데 나는 너. 엄마는 나보다 네가 더 좋아. 나보다 너... 이젠 너.



그렇게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하루를 반추해본다. 이제는 무기한이 될 평일의 마지막 호사 같았던 오늘을. 곧 새 일터에서의 시작을 앞두고 있기에 평일 오전의 서점은 이상하게 '꿈' 같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발길은 한 권의 책 앞에서 멈춰졌다. 마침 읽고자 했던 시인의 신간 산문집이었고 무엇보다 띠지에 적힌 헤드 문구에 눈길이 쏠렸다.



-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계절 산문, 박준, 달, 2021)



누군가에게는 때때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건 꿈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은 꿈같은 그런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게 진정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다가오는 오늘들을 숨 가삐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야말로 또한 닿기 힘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수록 그들에겐 누군가가 필요할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아는 누군가가. 나도 몰랐던 눈부신 나의 어떤 면을 발견하고선 다정하게 알려주는 그 누군가가.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그 마음이지 않았을까. 네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한다고. 그러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그리고 그런 이가 좋아하는 '나'라는 사람 또한. 좋아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모나고 못난 면이 자주 보이는 '나' 라해도. 나는 좀 더 나를 좋아할 필요가 있다고. 왜냐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 사랑' 이라며, '나는 내가 제일 좋아' 라며 날 기쁘게 만들어 준 네가 있으니까...



@John White Alexander, Miss Dorothy Quincy Roosevelt, 1901-1902, Dallas Museum of Art


은은하게 관능적이면서도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의 모습을 자주 그린 미국의 화가인 '존 화이트 알렉산더'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뉴욕 미술계에 조용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의 손에 키워졌을 그의 삶은 그리 유순하고 편안하지는 않았을 터, 그럼에도 삶 속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품위와 기품을 바랐을지 모른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그렇게 진실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니까. 자극적이지 않지만 기묘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여성들의 표정과 자세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꾸만 어떤 궁금점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수수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그의 그림 속 '도로시' 양은 어딘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피곤한 기색도 아니다. 다만 어떤 생각에 깊이 잠긴 채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그녀를 지키는 노견으로 보이는 강아지의 눈과 다리도 어딘지 모르게 주인을 닮아 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의 마음은 내면의 틈을 비집고 결국 생각으로 새어 나온다. 그들의 하루 혹은 일상은 피곤했던 걸까. 아니면 어떤 삶의 무력함을 느꼈던 것일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좋아했을까. 반대로 그녀를 좋아해 주는 이가 곁에 있었을까. 눈에 띄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눈에 띄었을까. 삶의 활기와 설렘을 발견했을까. 누군가 그녀 대신 발견해주는 것도 때로는 좋지 않을지. 물론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녀는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이미 지닌 자신의 우아한 기세를 조금은 드러내도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든 아니면 자신을 좋아해 주는 누군가에게든.



@John White Alexander, Sunlight, 1909. Art Institute of Chicago



화가의 또 다른 그림은 햇살로 인해 더욱 인물의 아름다움이 극화되어 보인다. 어딘가로부터 빛이 들어온다. 많은 빛도 아니다. 희미한 몇 줄기의 단순한 빛에 불과하지만 그 덕에 연노란색 옷을 입은 그녀의 여린 몸이 더욱 우아하게 느껴진다. 희미한 미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옷에 비친 빛을 조용히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단정한 머리와 수수한 옷차림은 왠지 그녀의 성격과 취향과 일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런 단정함 속에서 그녀는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좋아했을까. 그런 조용한 단정함이. 때때로 흐트러지고 싶진 않았을까. 물론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던 이는 쉽게 망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 아주 커다란 용기 없이는. 난데없이 갑자기 발견한 빛 같은 그런 용기 없이는. 빛이 보여도 마냥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그녀는 아니었을지.



존 화이트 알렉산더 A Quiet Hour, 1901, oil on canvas, 110.17 X 90.49 cm, .jpg @John White Alexander, The Quiet Hour, 1903,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단조롭고 순한 붓터치와 은은한 색감을 살린 화가의 그림은 그렇기에 더욱 빛나 보인다. 그의 화폭 속 인물의 자세와 표정과 소박함과 어떤 배경의 단순함들로 인해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확실한 집중을 끌어들이는 것만 같다. 별 게 없는 일상의 장면이지만 자세히 바라볼수록 묘하게 관심이 가게 되고 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바라보게 되며 찾아보게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데 존 화이트 알렉산더는 어딘지 도가 트인 것만 같다. 이 그림 속 책을 읽는 '조용한 시간'을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웬일인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한편으로 들썩이게 되고 만다. 괜히 하던 일을 어서 마치고 읽다 만 책을 펼쳐 읽어보고 싶어 질 만큼. 아니 사실은 '19호실에 가다' 혹은 '디아워스'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혹은 스스로 감금되기를 자처한 채로 조금 흐트러져 있더라도 충분히 용서할 수 있을 '나' 로서, 그저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완고하게 바라던 어떤 공간 속 자신을 떠올리며.



그의 그림 속 단순한 구도의 여성들을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그리운 잔상들을 떠올리게 되고 만다. 그것은 아마도 느낌들이다. 어떤 평론가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니, (느낌의 공동체, p.12, 신형철) 분명 나만 알 수 있을 느낌이겠다. 바라고 그립지만 일상에서 손에 잡히기 힘든 소박하고도 간절한 그런 마음. 그 마음은 갈 길을 헤매고 주저앉기를 자청하다 보니 어느새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에서도 조용히 멀어져 간다.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저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 느낌의 공동체, 서문, 신형철 -



jwalexander10 Memories.jpg @John White Alexander, Memories, 1903, Brooklyn Museum



사랑이 능력이라면 나는 그 능력을 여전히 원하고 만다. 언젠가 삶이 마냥 속상해져도 분명 나는 오늘을 그리워하며 떠올릴지 모른다. 삶에서 고마웠던 기억으로 점철된 어떤 '느낌' 들과 잔상을 기억하며. '메모리즈'라는 그림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느낌처럼 무심하듯 다정하며 한편 영원한 어떤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짧게 느껴지고 실제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오늘의 어떤 순간들이 정말 바랐던 장면이었기에.



좋은 기억은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어 진다. 실제로 듣고 싶지만 이젠 들리기 쉽지 않은 문장을 서점에서 발견하던 순간과 이어폰으로 들리는 좋아하는 음악과 들리는 목소리. 쓸쓸했던 과거를 확실히 날려버리고 마는 스타벅스의 돌체 밀크티와 케이크 한 조각의 달콤한 위로. 그리웠던 좋아함들 속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느낌... 언젠가 아이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이 오래 기억된다면 언젠가 이렇게 건네질 지 모른다.



나는 바다를 좋아했어. 그리고 그런 나를 네가 좋아해 줬어. '내 사랑' 이라면서. 그런데 나는 너. 어느새 그렇게 변해갔어. 그 변화가 설레고 아련하고 슬퍼질 정도로 그럼에도 지키려 했다고. 그런 우리는 함께 하는 모든 계절 속에서 서로 지키려 했을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가 되기 시작했던 처음부터 지금껏 아마 마지막까지도. 한 사람은 세월의 부침 속에서 어느새 작아지는 기억과 느낌을 자주 편지에 봉인한 채로.



이 시절 너를 향했던 느낌들과 함께. '우리'가 된 우리는 그야말로 '느낌의 공동체' 였다고.







Source : #John White Alexander

https://en.wikipedia.org/wiki/John_White_Alexander

http://americanartgallery.org/artist/home/id/113





photo-1620221730023-16275248b6c6.jfif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