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Krohg
여느 때와 같은 주말 일상이지만 그 시간들이 가끔 반갑지 않을 때가 있다. 아마도 그건 신체가 발산하는 무언의 신호 때문일지 모른다. 아마도 다시 일을 시작하며 겪게 되는 초반의 적응으로 인한 심신적 에너지 소비 때문일 테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헤쳐나가면서도 속으론 오랜만의 출퇴근하는 그 시간들을 적응해내느라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신경을 쓰거나 긴장하면서 다녔을 터. 주말이어도 좀처럼 씻겨지지 못하는 은근한 피곤함과 노곤한 심신상태의 연속.
그럼에도 해야 하는 생활적 책무들은 늘 잔존한다. 갈등과 불평 없이 유지해야 하는 일상의 업들 앞에서 묘한 곤란함을 느끼는 건 사실 그럴 때인 것 같다. 유독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과 마주할 때. 도대체 왜 주말이어도 좀처럼 편히 쉴 수 없는 인생인지에 대한 역설적 불평. 기어코 다시금 반복되는 유자녀 기혼자의 우스운 한탄. 그러나 안다. 뭐든 쉬운 건 없다는 것.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 부모가 부단히 움직이고 치열하게 노력해야 아이들은 비로소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지며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그저 현실 앞에서 인정하려 노력할 뿐이다. 아직 온전히 쉴 때는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건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생활을 견디듯 유지하는 것에 대한 힘듦이 들 때 이 그림들을 떠올린다. 바로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그림들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어떤 위로들을 느끼게 되니, 처음 마주했던 그림은 바로 '아기와 잠든 엄마'라는 그림이었다. 보자마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보다 보니 한편으론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림이 또 없는 것이었다. 한 돌도 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아기 옆을 지키며 그 옆에 한 여성이 잠들어 있다. 필시 쪽잠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그녀의 약간 벌어진 입과 침대 모서리에 얼굴이 닿는다는 것도 모른 채 한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진 불편한 자세. 그러나 그녀는 그 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수면부족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터.
괜히 그림 한 장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유별난 주책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마는 건 이 여성의 피곤함과 그 시간의 쪽잠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괜히 마음이 쓰였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엄마가 피곤해야 아이는 건강히 자라더라. 쌍둥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먹고 싸고 자고 그렇게 순탄하게 자라려면 대신 혹독한 제물이 필요하더라.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을 지키는 이들의 시간. 나는 제 때 먹지도 씻지도 못했고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잠을 잘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노르웨이의 자연주의 화가로 주로 생활 속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한다.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생활이 아니라 그는 글도 썼다 하는데 그래서였을까. 글을 쓰는 사람들의 세심한 관찰력이 그림에도 닿아 그는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주로 그림이든 글이든 그의 예술적 동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새삼 이해가 되기도 한다. 가임 과정도 쉽지 않지만 출산 후 양육을 시작하는 시간이야말로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언의 희생과 뜨거운 인내 없이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그러나 한편 그럼에도 그 시간이 버텨질 수 있고 지탱될 수 있는 건 그 시간을 먹고 누군가를 혹독한 시련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생명 그 존재 자체일지 모른다.
바구니 앉의 아기를 중심으로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한다. 서 있는 두 여성은 웃으며 아기를 바라본다. 오른편의 남성은 저 멀리 떨어져서 양손을 모은 채 넌지시 바라보는 중이다. 그 주위로 꼬마 아이들은 신기하듯 아기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유독 주양육자로 보이는 때가 묻은 흰 앞치마를 찬 살집이 제법 있는 여성은 마냥 웃으며 아기를 보고 있지 않는다. 제법 숙연하고 진지하게 아기를 다루는 유일한 손은 다름 아닌 그녀뿐이니. '키워보지 못한 이들이 뭘 알까, 먹지도 자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듯한 경험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 라며. 나는 부끄럽지만 이 그림을 보다 나도 모르게 겸손하지 못한 젠체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을. 화가는 알았을까. 생활의 단면을 밝고 서정적인 색감으로 아름답게 그려냈어도 그 그림을 마냥 예쁘게만 바라보지 않는 누군가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생활을 악전고투하듯 치열하게 살아내는 누군가는 마냥 웃으며 아기를 바라볼 수만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주말 저녁이면 보통 생선 요리를 하려 노력한다. 좀 웃긴 이유이지만 생선 반찬은 평일엔 거의 엄두도 내지 못하는 종류 중 하나이기에. 특히 다시 워킹맘이 된 이상 퇴근하고 외투만 겨우 벗어 놓은 채 손질된 생선을 꺼내어 밀가루 옷을 입혀서 튀기는 그 과정을 일사천리로 행한다는 게 쉽지 않다. 몇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나름의 교훈. 그러니 자연스레 주말 메뉴로 밀어 넣은 식단이 바로 생선일지니. 돌아가는 메뉴는 뻔하다. 하루는 갈치 튀김 또 하루는 가자미 구이. 아니면 고등어를 튀기거나 지지거나 꽁치조림을 하는 수준. 이번 주말엔 튀기기로 결정.
불 앞에서 요리를 하며 나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번 주는 좀 그랬다. 갈증만 나서 뭔가 시원한 걸 들이켜고 어서 푹 자버리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주방 창문 너머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봤는데 바람은 제법 불지만 날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아 보였다. 봄 비도 잠시 내렸고 여전히 기온차는 있을지언정 이제 제법 봄이 오려나 싶었다. 남은 맥주를 한 퀴에 들이켜니 피곤함이 덜 느껴졌다. 아까까진 힘들고 좀 짜증도 났었는데 제법 그런 감정들이 없어지려 하는 것도 같았다. 역시 술의 힘을 빌려 잠시의 힘듦을 망각한다는 게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서 식탁을 다시 쳐다보니 읽다 만 책의 제목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곤란한 결혼'이었다. 나름의 위로가 되고 현명한 문장들을 많이 마주해서 감사했던 책. 작가님의 혜안에 속으로 몇 번이나 뜨끔하면서도 통쾌하고 또 한편으로는 울적하기도 했던 책...
이 경험의 절대량은 결혼하기 전, 아이를 낳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결혼 후 제 인생은 더욱 기울어졌습니다. 선악의 판단은 차치하고 일단 '인간이란 이렇게나 갖은 괴로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화나는 일을 겪는구나 하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 곤란한 결혼, p. 139 미지의 자신을 발견하기 中 -
크로그의 이 그림은 제목과 그림이 부합하지만 한편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피곤함(?) 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야말로 그의 그림 제목 그대로 '피곤' 했던 일주일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 피곤함을 가라앉히게 만들어 준 건 또한 그 피곤함의 대상들 덕분이었다. 가령 맥주를 마시게 하는 원인들이 거실에서 내내 들리는 아이들의 우렁찬 다툼 소리라든지, 허리가 아프다고 계속 소파에 누워만 있으려는 그이의 게으름이 못내 미더워서 그 모습을 앞에 두고 투덜거리기 전에, 그저 밀려오는 감정을 없애고 이 입을 막으려는 듯 맥주에 손을 댄 한 여자의 분투력의 승리로 인함인지. 무엇보다 생선이 올라간 저녁 식탁을 맛있게 먹고 접시를 다 비워준 식구들의 모습이 그저 뿌듯함과 동시에 묘한 허무함을 앉기게 되어버린다든지. 피곤은 하지만 그 배경은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에, 슬픈 피곤함보다 그저 감사하게 즐기려 노력한다...
생활을 유지하며 느끼는 피곤함은 이렇듯 역설적인 원인과 결과로 곧잘 연결이 되고 만다. 피곤함의 대상이 다름 아닌 뿌듯함과 무언의 보람과 기쁨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은 마치 아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과 동시에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 쉽게 죽을 수 없다는 각오가 동시에 탄생되는 삶과도 같은 것...'자식을 낳아보지 않으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듭니다. 자신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을 가져보지 않으면 자기 안에 어떤 인간적 자질이 잠들어 있는지 발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 (p. 147) 하다던 '곤란한 결혼'에서의 이 문장은 특히나 오늘 나로 하여금 강한 버팀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한편 책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그이에게, 가족들에게 사실 고맙기도 했다. 읽을 수 있는 틈새 시간이 주어졌다는 건 그들의 협조가 있었다는 반증일 테니. 그 시간은 마치 크로그의 아래 그림처럼 이제 막 자신의 시간을 차지하고 혼자 유유히 의자 위에 발을 얹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 채 책 한 권을 마저 읽는 이 여성과 적잖이 닮았을지 모른다. 물론 한가하고 여유로움의 깊이로 따지자면 이 그림의 여성이 조금 더 승자에 가깝겠지만.
단체 생활을 유지하고 지켜내면서도 스스로 괜한 자격지심과 억울함에 어그러지는 감정과 마주할 때가 있겠지만 한편 나는 이제 조금씩 훈련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마냥 불평하거나 힘듦을 토로했던 치기 어리고 어리석었던 지난 시간들에 비해서, 이제는 그저 조용하게 받아들이며 평정심을 가지려 노력하는 내가 가끔 보이기도 해서. 그렇게 어제보다 조금 더 오늘을 잘 지내보고 싶다는 분투를 여전히 내는 자신이 느껴져서. 무엇보다 기억하려 한다. 여간 곤란하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겪다 보면 나름의 즐거움과 놀라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놀라움들이 결국 인생의 한 시절, 아주 소중하게 기억될 선물이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이 편안히 잠든 숨소리를 곁에서 들으며 오늘도 그들 곁에서 살갗을 맞대며 하루의 마무리 끝에서 편히 잠드는 것. 이 시절 우리가 비로소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놀라운 마법, 생활의 기쁨과 슬픔, 무엇보다 인생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원천적 행복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의 행복이란 결국 그런 생활적인 것들만이 만드는 것일테니까.
#Source : Christian Kro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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