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했다. 화장을 지우면서 분명 그 엇비슷한 감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클렌징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볼에 슥슥 비비면서도 무언의 압력 따위가 볼을 세차게 비비고 있진 않았을 테니. 화장이 지워지면 지워질수록 우스꽝스러운 내가 느껴졌다. 곱게 화장을 했던 내가,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던 궂은 날씨임에도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고 이 시국임에도 무모한 용기로 외출을 감행했던 내가, 우산을 들고 걷기에도 마뜩잖은 날씨에 8 권여의 책과 몇 가지 물건이 담긴 커다란 짐가방을 어깨에 들춰멨던 내가, 토요일 오전에 늘 하던 운동과 도서관을 모두 미루고 강남역 8번 출구로 향했던 나는 나 자신이 몹시 미워지려 했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발바닥이 그제야 아파지기 시작했다.
하이힐을 신었던 게 화근이었겠다. 비 오는 날 하이힐이라니. 나 원 참, 무슨 생각으로 그랬었을까.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우스웠다. 조소가 내뿜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벌 받은 거라고. 아이들 놔두고 혼자 집 나갔으니 벌 받을 수밖에. 넌 이제 그럴 자격 없는데. 아이. 살림. 집안일. 가족. 그런 것들로부터 절대 떨어질 수가 없는 인생인데. 겨우 해방되려 선택한 게 다름 아닌 '일'이고 댁내외에서도 성실한 노동자 자처하는 인생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든 것인데. 그러니 화 낼 자격도 없는 것이다. 화장하고 하이힐을 신고 샹스의 향기가 온통 묻어 나와서 꽤나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했던 외출 전의 나는. 참으로 묘하고 맥락 없이 분한 감정에 휩쓸려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에게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며 생각할 뿐이었다. 다 나 때문이라고. 괜히 기대하고 설레며 '내가 가장 예뻤던' 때를 생각하며 잘 차려입고 하이힐까지 신고 선물까지 잔뜩 챙겨버린 나 때문이라고.
버스 안에 앉자 시선은 젖어 있는 가방을 향했다. 미처 전하지 못했던 책들과 물건이 가방과 함께 비에 젖어 있는 게 보이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금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바보 같았다. 아주 오랜만의 독서모임이었고 모두에게 책 선물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 마음이 묘하게 찌그러지고 말았던 하루여서 그럤던걸까. 사람들은 대부분 '노쇼'인 무방비상태. 나를 포함해 단 세 명이 서로의 일상을 짧고 굵게 공유하고 깔끔하게 헤어진 시간이었다. 나쁘진 않았다. 분명 대화의 시간은 즐거웠다. 책 이야기를 비롯하여 사실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외부인들과의 만남이라. 분명 즐거웠지만 한편 너무나도 허탈하고 공허하기까지 했던 건 왜였을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일까. 그런데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기대를 했길래 허무했던 것이었을까. 그이가 한 말을 너무 흘려 들었다. 원래 큰 기대 없이 가야 한다는 것을. 그의 말을 너무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럴 걸.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를 이렇게 한다. 당신 아내는 이렇게나 아직도 어리석다. 바보다. 아직도 치기 어린 바보...
@Edward John Poynter, A Corner of the Villa, 1889
초상화로 유명하다던 빅토리아 시대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존 포인터는 라파엘 전파로 빅토리아 시대의 신고전주의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사실 프레드릭 레이튼이나 로렌스 알마 타데마를 먼저 접하고 뒤늦게 그의 그림들을 접했을 때. 몇 개의 그림들을 넋을 놓고 지켜본 적이 있다. 화려하고 정교하게 잘 꾸며진 고대 건축물 양식의 한 공간에서. 아이를 붙잡고 새를 지켜보는 여성과, 그 새에게 모이를 주는 듯히 지그시 밑을 바라보고 있는 한 인물이 보인다. 창문 바깥으로는 아직 한낮임이 추정되는 초록과 햇살이 보인다. 시원하고 투명한 물줄기가 공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먹음직스러운 사과 몇 알이 떨어져 있으며 인물들 주위로 계속해서 새들이 모여든다. 누가 봐도 화평한 공간, 너무나도 편안한 시간이다. 그런데 왜 내 눈에 그 모든 완벽함 속에서도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은 인물들이 보이고 마는지.
'엄마'와 '아내'라는 굴레 안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역설적으로 알게 되었다. 다둥이 신생아 육아를 전전긍긍하듯 하루에 한 시간을 잘 수 없었던 그 시절. 그야말로 '살아가는' 것을 다 집어치워버리고 싶었던 때. 매 순간이 버겁고 화나고 지겹고 몸서치리게 외롭고 괴로웠던 때. 그럴 때 그림을 접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선명한 각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그림을 보면 글만큼 마음이 편해졌고 그냥 무언의 위로가 되고 만다. 화폭에 담긴 인물들의 표정 하나와 색상들이 전하는 무언의 말들이 느껴지는 것도 같기에. 무엇보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내 인생이 그림에 빠져 있을 땐 조금은 아름다워지는 것도 같아서. 기묘한 이유로 시작한 그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림들 덕분에 좀 더 생각을 외부 세계에서 내 안의 세계로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dward John Poynter, On the Terrace, 1889
사람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은 완벽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고 잘 사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필시 보이는 것만으로 그 인생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절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더욱 알 것만 같은 것이다. 존 포인터의 '테라스에서'는 지중해의 이국적인 바다가 보인다. 다른 이들은 아마 곱고 아름다운 화폭 속 인물을 먼저 보았겠지만 나는 이 그림에서 바다가 먼저 보이더라. 내게 '바다'라는 공간은 각별하고 애틋한 장소일 수밖에 없기에. 그런 바다가 보이는 층계참에서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은 손에 장식품을 들고 지그시 그 물건을 바라보고 있다.
고전풍의 드레스와 머리에 두른 수수한 장식품이 유난히 그 인물의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든다. 얼핏 보면 소년 같은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는 이 여인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여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절제된 감정선은 조용한 눈매에 묻어난다. 일상의 소란스러운 부침들을 혼자의 시간으로 조용히 치유하고 있던 중이었을까.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조용한 시간을 찾으려 했던 공간이 계단 구석이라니. 그럼에도 그 계단이 그녀에게 최적의 장소였다면. 저곳은 아마도 그녀에게는 유일한 쉼터일지 모른다. 내게는 식탁이, 새벽녘의 거실이, 식구들이 모두 잠든 그 시간, 아무도 방해하지 않은 채 비로소 '해방'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과 공간만이 유일했던 것처럼.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존 포인터의 'reading'과 같은 그림은 그리하여 나로서는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고 만다. 책 읽는 여성의 그림을 자주 찾아보는 연유는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나처럼 혼자 읽는 이들의 마음이 이미 그림에 읽히는 것 같아서. 읽음으로 인해 소란스럽고 예민한 자신을 잠재우려는 무언의 애씀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물론 누군가들에게는 그 '읽는 시간' 조차 쉬이 허락될 수 없기에 물리적 시간 확보 또한 애써야 가능한 것이지만.
@Edward John Poynter, Reading, 1871
비 오는 날의 하이힐은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사실 이해한다. 그러고 싶었던 나를 안다... 그런 자신의 어떤 부분을, 그 감정을, 욕망을, 무참히 버려버린 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이런 나'를.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그런 '나'를. 어떤 존재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인생이 아닌 쪽에서 삶을 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독서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그들의 자유가. 내 안에 숨겨진 키르케적 마녀의 질투를 건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렇다 할 약속조차 없이 그대로 허탈하게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 내내 맥락 없이 분하고 속상했던 마음도 이해한다. 결국 집으로 밖에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를 안다. 정리되지 못하는 찝찝한 감정을 머금으며 불러내면 나올 친구 한 명조차 없는 현재의 내 인생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지만 그대로 카페에 들어가 청승맞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나를 이해하려 한다. 이미 머릿속에는 '아이' 생각과 필시 어질러져 있을 집이 생각났음에 발걸음은 그대로 집을 향하려 했으니까. 물론 마음 한편은 너무나도 절실히 투썸플레이스나 아티제에 가 있었음에도... 정말 그랬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나를 이해하려 한다. 평소 같지 않았던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의, 예뻤던 나를 기억하려 한다...
유자녀 기혼자들에게는 자식을 살피는 그 '보통'으로 보이는 인생을 나 또한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힘들게 키워본 이들은, 여전히 그러느라 분투하는 이들은 더욱 알지 모른다. 사랑은 확실히 양가적이라는 것. 기대하고 싶으면서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고 싶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 상대에게 오롯하게 전념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살필시간이나 속 편한 여유 따위는 솔직히 가질 수 없게도 만들어 버리는 것. 얽매이는 시간. 함께 견디며 나아가는 시간들. 그런 지독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다. 점점. 엄마로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의 사랑을 유지하고 있을 때. 어떤 감정적인 파도에 휩싸이고 그대로 밀려 버린다 하더라도 있는 힘껏 '내일'이라는 시간으로 나아가려는 의지. 동력. 무언의 애씀은 이렇듯 그림과 글로 현실의 '나'를 투명하게 드러내게 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위로가 되기에.
평소에는 미처 보살피지 못하는 '나' 라는 존재. 내게서 내가 너무 미워지면서도 안타까운 순간.
그럼에도 다가오는 일상의 모든 장면들을 사랑해보려는 이것은 가장 보통의 마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