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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10. 2022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Eva Gonzales, Carl Larsson

유자녀 기혼녀가 된 이후 생활 속에서 겪는 여러 부침들 중 일상적이지만 가장 단호하고 확실하게 피하고 싶은 순간은 다름 아닌 '독박 육아'를 해야 할 때다. 돌봄의 시간은 - 특히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가 대상이라면 - 마치 산 하나를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언제 다시 넘어가나 싶은 나머지 다리에 힘이 쫙 풀려 버리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아직까지 가끔 그렇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괜한 억울함과 마주하면 마음은 움푹 파인다. 별 것 아닌 것들에 괜히 뾰로통해지거나 화가 치솟기도 한다.



가령 잔뜩 흘린 과즙이 묻은 끈적한 바닥을 엎드려 치우다가 뾰족한 장난감을 밟은 무릎과 발바닥이 욱신거린다든가. 모처럼 차린 식탁에서 먹고 싶은 반찬이 없다고 다른 걸 해 달라는 소리를 듣게 될 때라든가. 갑작스러운 지인의 부고 소식에 휴일에 혼자 부산으로 떠나는 배우자에게 아침을 차려 주는 고분 한 내가 묘하게 싫어서? 그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절대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내심 바랐기 때문에. 수고하라거나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안타깝거나 혹은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절대 나올 리 없는데도. 나는 왜 입술을 깨물었을까. 돌봄의 책무가 마치 한 사람에게 무게중심이 쏠려 있는 것이 자명하다는 듯 아침 먹는 데에만 집중한 그의 모습이 어딘지 볼품없어 보여서. 더 이상 어떤 매력을 느끼기에 무언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휴일을 맞이하여 평일엔 일을 하는 탓에 해주지 못했던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최근 닭강정 팬이 되어 버린 아이들을 위해 무항생제 볶음용 닭을 사서 간을 맞춰 재워두고 튀김옷을 입히고 수제 양념장을 만들어 꽤 그럴싸한 플레이팅을 내보였다. 그러나 언제 만들었냐는 듯이 금세 비워내며 또 없냐는 성화가 들릴 때. 먹성 좋은 아들 두 명의 성장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에 다시 여분의 닭을 급히 튀기면서 주방 쪽 창문을 바라보았는데. 아뿔싸. 닭에 집중할 걸 그랬다.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이상하게 헛헛해지면서 바깥의 화창한 풍경이 이상하게도 슬프게 느껴졌다. 밖은 화사한데 나는 그렇지 않게 느껴졌던 걸까. 바깥에 보이는 빛을 외면하고 싶었던 건 왜였을까.



@Eva Gonzalès,  Woman in White, 1879



여기, 흰색 천이 덮혀진 화장대로 보이는 테이블을 곁에 둔 채 몸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바닥을 쳐다보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바닥에 놓인 바구니 안에는 애완동물인 것 같은,  털 뭉치로 보이는 것들이 담겨 있다. 그곳에 시선을 둔 여인의 얼굴은 어딘지 무심한 듯 초연해 보인다. 파스텔톤의 뚜렷하지 않은 선들이 오히려 그림 속 인물의 희미한 존재를 더욱 부각하는 것만 같다. 삶의 주인이 당신임에도 그 주인으로서의 선명함을 잃어버리는 것 같이 보이는 건, 그림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투영된 결과인 걸까. 제대로 쉬는 게 아니라 잠시 쉬려고 털썩 걸터앉은 흰색 의자 위에 여리고 하얀 피부의 그녀는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언제쯤'이라는 생각을 혹시 했을까. 그림을 보는 누군가는 그 언제쯤을 여전히 기다릴지도 모를 테니까. 삶의 허무함이나 잡히지 않는 무언의 그리움에 자신도 모르게 언제쯤 '끝'이라는지 그 끝 이후의 '해방'과 같은 것이 과연 '언제쯤' 다가오는지를 궁금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루라는 시간이 혹은 인생이라는 긴 레이스가. 아니면 어딘가 확실히 메인 채 살아가는 자신의 시간 그 자체가.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다. 공간 안의 사물들만이 그를 위로해 줄 뿐이다. 충분한 아름다움을 지녔음에도 그 아름다움이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 아니면 보일 데가 없다는 듯 혹은 현실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은 듯 그녀는 거울을 외면한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그런 그녀를 향해 오른쪽 위의 창문을 통해 햇살이 연하게 내리쬐고 있는 것 같다. 바깥의 화창한 날씨를 알려주는 것도 같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있다. 괜히 빛을 보면 나가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나갈 수 없는 그녀라면. 그렇게 빛을 외면하는 게 옳다. 분명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Eva Gonzalès, Le chignon, 1868



프랑스 화가인 '에바 곤잘레스'는 마네의 유일한 공식 제자였다 한다. 그에게 정기적으로 가르침과 조언을 받은 실력파였음에도 활동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예술계의 주변에 머물러야 했고 스승의 화풍과 유사하다 하여 숱한 비난을 받기도 했단다. 완성도가 높았음에도 작품의 섬세하고 여린 표현은 그저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되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초상화들은 결국 드가라든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견줄 만큼 자기 자신만의 또렷한 화풍을 세웠음이 그 명성이 훗날 조금씩 드러나지만. 사실 그전까지 조용하게 혼자서 견뎌야 했을 시간을 생각하게 되면 그 마음들이 어쩌면 그림 속에 절로 담긴 건 아닐지 싶기도 하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의 커다란 등은 그림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등의 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데 어쩌면 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일까. 어딘가를 바라보며 마치 긴장이 한 번에 풀려버렸다는 듯이 약간 구부정한 자세의 그녀는 왠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불행만 피해도 그것이 결국 행복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이. 자신이 돌보는 누군가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지내준다면 그것으로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하루의 일과 끝에 목욕을 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피곤한 모습을 보았던 걸까. 아니면 옷을 갈아입다가 잠깐 몸에 힘이 풀려 버렸던 걸까. 정숙하게 올린 조금은 불편하듯 전형적으로 메여 버린 머리를 풀어버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 상반신은 맨살이나 마지막엔 결국 그러지 않기로 다짐하듯 머리는 헝클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엉망인 채 대충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삶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Carl Larsson, Model Writing Postcards, 1906,  Sweden



돌봄이 끊이지 않은 전업주부가 더 힘든지 아니면 일과 돌봄을 동시에 떠맡아야 하는 일하는 워킹맘의 일상이 더 전쟁스러운지 라는 식의 지극히 지겨운 프로파간다식 생각에 가끔 선동되려다가도 이내 그 마저도 부질없다는 듯, 설거지를 마치며 창 밖을 바라봤다. 날씨가 좋아 보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행이라는 안도를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현생이 피곤하거나 고단하거나 기댈 곳 없이 혼자라는 생각에 괜한 슬픔이 밀려올 때. 그것이 돌봄 초반엔 '매일' 혹은 '자주'에서 이제는 '가끔' '때때로'라는 식으로 부사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기에. 돌봄의 시간은 매일 속상함의 연속이다가도 차츰 익숙해지다 보니 종종 서글퍼지는 걸로. 변한다. 변해간다. 결국 상황에 맞춰서 우리는 변해야 산다. 살아갈 수 있다. 본능적으로 나도 그걸 깨달은 걸까. 변해야 산다는 것에 대해서.



칼 라르손도 변해야 산다는 걸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스톡홀름의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지만 결국 가족들과 평화롭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며 그의 작품도 대부분 전원생활을 모토로 한 아기자기하고 맑고 화사하고 투명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많이 남긴 것처럼. 칼 라르손의 '엽서를 쓰는 모델'의 주인공은 나체로 무언가를 적고 있다. 인물 주변의 공간은 밝은 톤의 가구와 미술품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발이 닿은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포근해 보이고 열린 창문으로는 바람이 부는 듯 책상 위의 종이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만 같다. 주변 공기는 그야말로 밝고 화사하며 그림 속 인물은 너무나도 자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누군가에게 글을 쓰고 있는 중인 그녀의 책상 위의 꽃병은 그런 주인을 조용히 지켜주는 것만 같다. 만개한 꽃을 뽐내며. 마치 봄이 왔다는 걸 알리는 듯. 글을 쓰는 봄의 여신은 인생 그 자체를 봄처럼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거침없이 매력 있게.



그림 속 그녀처럼 변할 순 없다는 걸 잘 안다. 예컨대 카모의 라웻 (Life is wet)을 듣다가 괜히 키스하고 싶어지는 마음과 함께 에스트로겐이 무언의 테스토스테론을 바라는 발칙함을 잠재우면서도. '우리집으로 가자'며 흰 피부의 가디건이 잘 어울리는 다감한 연인의 존재는 나로서는 결국 영원한 부재중임을 확실히 인지하며. 그런 형편없이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지극히 지키고 사랑하려는 역설적인 엄마의 오늘 공원 산책길은 무언가 평화로웠다.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투명하고 파랗더라.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흙을 파며 신나게 놀고 있는 사이에 잠시 벤치에 앉아 왼쪽 귀에 갤럭시 버즈를 끼고 오전에 읽다 만 책을 펼쳤다. 그러다 노래가 들렸다.  위대한 게츠비의 OST 인 'Young and Beautiful'이었다. 결국 책을 덮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입술은 영문을 모른 채 깨물어지고 만다. 왜일까. 왜였을까.





'중년의 결혼 생활은 예전에 연애하던 사람과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기분'이라던 비포 선셋의 제시를 이해할 것 같았던 나는 위대한 게츠비의 데이지를 못마땅해했음에도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걸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괜한 음악으로 인해 심박수는 올라가고 괜한 봄 날씨에 마음이 들썩이듯 쓰렸기에. 게츠비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았던 데이지는 정녕 행복했을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분법적인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속에서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지 싶다. 오늘, 음악과 책과 하늘과 너희들과의 순간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때때로 돌봄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내가 고통스럽다가도. 당신을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시간이 잦게 되는 내가 못내 답답하고 미워지다가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 두 마음을 지닌 채로. 이 노래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 The Great Gatsby, Young and Beautiful -



더 이상 젊고 예쁘지 않아도. 상처받은 영혼만 남는다 해도.

나는, 당신은, 너희들은. 여전히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라도 이제는 괜찮을 것만 같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충분히 불행해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만 같기에...






#Source : Eva Gonzales, Carl Larsson

그리고 Young and Beautiful... 위대한 게츠비


https://en.wikipedia.org/wiki/Carl_Larsson




The Great Gatsby... 그들의 Young and 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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