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어가면 마음은 묘하게 조급해진다. 정말이지 그러지 않고 싶지만 어쩔 도리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버린다. 아직 손이 퍽이나 많이도 가는 미취학 아동 두 명을 키우며 일을 병행하는 '독박 육아 워킹맘'의 묘한 감정선이랄까. 아이는 혼자 낳지 않았지만 은근히 아이를 혼자 키우는 환경에도 사실상 익숙해져 버렸다. 누구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현상들이 그렇게 돌아갔을 뿐. 평일엔 그이의 적극적 양육 지원을 크게 바라지도 않는다. 모든 집엔 사연이 있고 우리 또한 그러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는 걸 잘 이해하기에 애써 배우자를 들들 볶지도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화평'을 유지하는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 누구의 물리적 노동 지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아이 양육을 도모하고 댁 내 가사를 책임지며 동시에 경제활동 노동인구로서 봉급생활자로 일상을 지낸다는 것.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크지 않은 인간은 어떤 이들의 일상 속 환멸과 고통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가령 왜 어떤 '여자' 들은 그 집에서도 땀이 줄줄 흐르고 별 거 아닌 것들에 쉽게 버럭 하며 동시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서 눈물을 흘리고 마는지에 대해서. 퇴근을 한 후 동시에 아이들이 기다리는 어린이집으로 그야말로 달려 나간다. 아이들과 귀가한 이후 코트만 벗은 채로 바로 식탁 위 밥솥에 밥을 안치면 그제야 2차 출근의 신호탄은 개시된다. 밥이 되어 가는 동안 차례대로 두 아이를 연속적으로 씻긴다. 머리를 말려주고 잠시 둘이서 노는 틈에 목욕 후 생긴 잔여 세탁물까지 세탁기에 넣으며 빨래를 돌린다. 그리고 바로 부엌으로 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면서 미리 손질해 둔 식재료로 각종 볶음류나 찌개, 메인 반찬을 만든다. 불 3개를 어느새 사용하다 보면 식탁은 완성되고 아이들의 허기는 그제야 채워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 했다. 가사가 사실 그렇다. 해도 해도 끝은 없고 게다가 완벽 강박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는 인간은 특히 더 그렇다. 밀키트와 인스턴트와 '대충'이라는 부사는 최소한 양육과 살림에 있어서 용납하기 쉽지 않은 것. 그리하여 어찌 보면 댁 내 성실한 일꾼을 자청한 건 분명 나였는데. 가끔 정말이지 그럴 때가 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고 혼자 거실에 나와서 소파에 털썩 앉는 순간. 고단했던 일상을 복기하다 괜한 부아가 치밀어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어떤 감정을 발화해버리고 만다. 우습지만 진지하고, 단호하지만 결국 한없이 형편없는 목소리는 기어코 들리기 시작한다. '하... 씨발 그만 살고 싶다' 거나 '존나 짜증 나는 하루였어'와 같은 식으로. 아직도 여전히 아주 가끔씩은.
@Berthe Morisot, On the Sofa, 1871
프랑스의 화가이자 19세기 인상주의 운동에 참여한 선구적인 여성화가였다던 '베르트 모리조'. 그녀의 풍경화나 인물들이 담긴 그림들은 대부분 소박하고 따뜻한 특유의 시선을 담아낸다. 가정으로 추정되는 실내의 여러 정경들이나, 화가가 바라본 일상 속의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특히 유난히 도드라지는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섬세하고 풍부한 색채로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의 그림을 워킹맘으로 굉장히 고단했을 때 접했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그림들을 보면서 '속 편하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화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침묵과 친밀함 사이, 그 부드러움의 순간들에 주목할 수가 없었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은 여인에게 내 감정을 투사해버리고 마는 것. 머리는 틀어 올렸고 입술은 뾰로통하게 조금 나와 있는 채 그리 편하지도 않은 자세로 무언가를 직시하며 멍 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이 여인. 구부정한 허리가 흡사 누군가와 닮아있다. 퇴근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이 잠들 때를 기다리다 그제야 혼자의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와. 삶의 묘한 환멸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언제 이 시절이 '끝' 날지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분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림이란 그래서 바라보는 이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고 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따뜻한 색채감을 지닌 평온해 보이는 그림 한 점이라 할지언정. 나는 그랬고, 여전히 그러하다...
@Berthe Morisot, Peasant Hanging out the Washing, 1881
@Berthe Morisot, Le Berceau (The Cradle), 1872, Musée d'Orsay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가진 것이 많이 없던 치기 어린 젊은 미혼 시절엔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건 '그럼에도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배우자도 있는. 단란한 4인 가족이 누군가들에게는 그저 화평한 삶으로 보일지언정, 그 삶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그 4인 가족 구성원 중 최소한 누군가들은 일정 부분 사적인 기쁨과 즐거움은 과감히 포기한 채 단체의 유희와 건강과 평화를 위해 조용한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는 분투를 해내야 비로소 그 4인이 유지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역할에 대체되어 살아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이를 돌보는 워킹맘이 되고서야, 남매를 꿋꿋하게 성장시켜냈던 친정 부모님들의 고단함과 슬픔이 어떤 무거움이었을지 절절히 깨닫게 된 것과 같다.
@Berthe Morisot, Before the Mirror , 1890
베르트 모리조의 거울 앞 여인을 담은 그림들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혼자의 시간을 절실하게 원했던 '나'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고상하게 화장대에 앉아 있을 틈은 허락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럴 여유는 현재의 나로서는 일종의 사치이자 행운이어야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편하게... 정말이지 마음 편하게 오래 쉬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부끄럽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가든가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것이 맛있지 않았고 즐겁지 않았고 그저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그들이 무사하게 그들이 즐겁게. 내가 아닌 타자들에게 맞춰지는 삶이었고 여전히 일정 부분 확실히 그렇게 돌아가는 중이다.
화장대 위의 여인은 과연 완전한 평화를 누렸을까. 오랜 시간의 편안함이라기보다는 겨우 얻은 찰나의 시간,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고 싶었을 그림 속 여인은 머리 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머리를 다듬고 무엇을 할까. 다시 일을 하러 갈까, 빨래가 돌아갔다는 신호음이 들리니 이제 건조기에 넣을 시간이고 건조기가 다 되면 다 된 빨래를 잘 접어서 제자리에 각각 놓아야 할 것. 그리고 읽다 만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식탁 위에서 책을 펼치다가도 금세 식구들의 니즈 파악이 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야 하는 삶은 아닐지. 거울 앞에 그녀는 과연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가 만약 유자녀 기혼자였다면 나는 한번 더 묻고 싶어 진다. 당신은 확실히 당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Berthe Morisot, Woman at her Toilette, 1875
그래도 그림은 무언의 일침을 전하는 것만 같았다. 그림에서 보이는 평화로울 수 있는 일상. 혼자보다 그럼에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그 '현재'에 충실할 것에 대해서. 그리하여 늘 씩씩하게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꿋꿋하다가도, 기어코 혼자가 되고 나면 언제나 가끔,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아서, 그만 살고 싶어서. 해방되고 싶어서. 기어코 울어버리는 나일지언정. 마음을 괴롭히던 어떤 생각들을 이윽고 떨쳐내려 애쓰며 생각하고 만다. 나는 이런 내가 정말 싫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두고, 다정한 그이를 곁에 두고도. 이렇게 형편 없이 무너지는 내가 무척이나 밉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도 눈물 흘릴 날은 아직 많을지 모르니 조금은 아껴두는 법을 연습하라고. 누군가를 확실하게 돌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 경험이 기쁨이 아닌 일종의 '고문'이라는 생각에 가끔 휩싸여 때때로 너무 힘든 무거움을 느끼기도 할 테지만. 동시에 그들과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얼굴에 닿는 바람과 하늘이라도 쳐다보면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나는 정말이지 간절하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