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다급한 마음을 지닌 채 어린이집을 향한다. 늘 마지막에 하원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사실 그런 감정조차 느낄 세 없이 일사천리로 제2의 근무는 시작된다. 씻기고 먹이고 놀이하고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학습까지 시키고 난 이후 재우기까지. 쉴 틈은 없고 피곤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TV에 빠진 아이들을 보며 안 되겠다 싶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려 했다. 손에 잡힌 건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문득 책을 읽다가 단순하게 넘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나무꾼이 꽤나 괘씸한 인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생각' 이 들어서였을까. 누군가의 행복이 누군가에겐 보이지 않는 조용한 불행이 될 수 있음에 대한 삶의 모순들, 그런 무쓸모한 생각들...
나무꾼이라는 캐릭터가 그렇게 깊은 생각이나 배려를 지닌 인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선녀의 옷을 훔쳐서 자신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것은 무례하고 무식한 행동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같은 상황을 두고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 이것이 어른 부모의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졌다. 의견이나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너무 '답'인 것처럼 주입시키지 않을 것을. 스스로 의식적인 주의를 해보기도 한다.
물론 다행히(?) 아이들은 눈앞의 TV 속 브레드 이발소나 마인크래프트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랑곳없이 꿋꿋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지만.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타자에게 결국 피해를 끼쳐서 얻은 그 나무꾼의 '성공사례'가 과연 좋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7세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 아직 터무니없이 복잡한(?) 문장들이라는 걸 느끼고 중간에 '아차' 싶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종료시켰고 다행히 아이들은 '그렇구나'라는 공감을 하면서 동시에 '엄마는 아빠랑 달라, 좀 이상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씩 웃고 넘겼으나 아이들을 재우고 난 이후 자꾸만 그 단어가 맴돌았다. '이상하다'라는 형용사가 국어적으로는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면에서 이상했던 걸까.
@Louise Abbéma, An elegant woman, said to be Sarah Bernhardt, on a winter's walk
프랑스의 화가 '루이즈 아베마'는 19세기 활동 당시 미술뿐 아니라 조각과 같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한다. 솜씨가 좋았던 작가는 주로 파스텔풍의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고. 그녀의 그림을 가만 살펴보면 꽃, 자연, 여성, 풍경이 컬러와 잘 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과 관련된 화가의 이력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절친한 친구이자 레즈비언 배우인 '사라 베르나르트'가 그림 속 뮤즈로 자주 보였다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실이든 그렇지 않든, 화가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니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험담' 들이 난무했다 한다. 그들을 돈독한 우정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두 사람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 사실 대중적이었다고.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지만 정말 신경 쓰지 않았을까. 드러내지 못하는 고충과 고단한 분노나 슬픔을 지닌 채 살아냈던 건 아니었을지.
그림은 글만큼 자신의 내면 혹은 떠오르는 인물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면서 억제했던 생각이나 감정을 펼치고 나면 묘한 시원함과 상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니까. 그림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테다. 겨울 길을 홀로 걷는 여성이 있는 그림을 살펴보면 화가가 사용했던 색감도 어두운 톤이 가득이고 하물며 주변의 삭막한 풍경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더욱 외로운 적막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물론 그래서 오히려 어떤 위로를 느끼기도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라는 그런 공감...
@Louise Abbéma, La bénedictine
우연히 발견한 이 그림을 한참 쳐다봤다. 창백한 피부와 입고 있는 옷마저도 모두 화이트로 무장한 이 여성에게서 어떤 위태로움과 동시에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여인은 조각상 끝에 걸터앉아한 손으로 모서리 장식을 잡고 있다. 자신의 몸 전체를 버티고 앉아 있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꽃을 잡고 놓치지 않겠다는 인물의 표정은 어딘지 단호한 기개가 느껴진다.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굳게 다문 입술의 침묵은 어떤 자유를 갈망하는 듯하다. 이 그림을 핸드폰에 나도 모르게 저장했던 건 어쩌면 그림 속 인물에게 느껴졌던 차갑고도 단정한 결의 때문일지 모른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날 선 고결함과 품위를 지켜내겠다는 그런 '말'을 그림이 하는 것만 같아서.
아이들이 '이상해'라는 말을 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배우자와 가끔 대화를 나누다 어떤 화두들 앞에서는 '정상적인 생각'으로 보진 않곤 하니까.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하는 사회라지만 누구나 말은 쉽게 한다. '인정한다, 이해한다' 라면서. 그러나 일상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혐오를 조장하고 정상 가르기를 일삼는 어른들이 아직까지 상당하다는 게 느껴지면 못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예컨대 비장애인으로 태어나 지정 성별을 받아들이며 이성애자로서 4인 가족을 형성한 '보통(?)'의 '워킹맘'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하기도 했던 게 자연(?) 스러웠고. 그렇게 세상엔 각자의 사연과 다양한 삶이 있다는 걸 더더욱 체감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폴리아모리나 인터 혹은 바이섹슈얼, 무성애자, 이민자나 입양자들. 그뿐일까. 외벌이, 맞벌이, 싱글 부모, 전업'아빠 주부', 비혼 1인 가구, 다자녀 가구,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고 그렇게 가족이 된 사람들 등등. 이미 '가족'이라는 단체는 다양한 형태를 맺고 공존하는 세계일진대. 과연 우리는 여전히 어디까지 진정 그런 다양함을 이해하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전히 의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을 간접적으로 발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상에서는, 겉으로는 '신경 안 쓴다' 라지만 사실 신경 쓰며 은근히 '나 와는 거리가 있기를'이라는 바람으로 은은히 차별하며 혐오하는 어른들이 보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세계관으로 타자에 대한 상상력 없이 함부로 해석하고 재단하며 구분 짓는 어른들... 특히 그 어른이 '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더 안타까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Louise Abbéma,, Mujer Leyendo, 1883
루이즈 아베마의 그림이라던 '책 읽는 여인' 은 내면의 분주함을 잠시나마 사라지게 만들어 준다. 한낮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이른 저녁 혹은 해질녘,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어둠이 조금 덜 한 시간대에 담쟁이덩굴이나 마른 잎사귀가 무심히 덮혀진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벤치에 기대어 혼자 고심하듯 책에 몰입한 여성이 보인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있기에 그렇듯 심취해있었을까. 아니면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난잡함들로부터, 주변인들로부터 홀로 도피하듯 책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책이 사람보다 좋았다. 물론 솔직히 여전히 좋다. 사람보다는 책이 더. 덧붙이자면 책이 산 사람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고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안전여부를 떠나 책이 사람보다 확실히 더 다정했고 친절했다. 물론 책으로 인해 배우는 점도 사실 적잖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난 이후 다시 현실로 복귀하면 가끔 현실이 더 '이상하다'며 거짓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기도 하다. 가령 이런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하면 그렇다. 브랜드 아파트와 임대주택 아파트에서 사는 거주자들을 구분 짓거나 소위 잘 사는 동네 그렇지 않은 동네로 지역 다툼을 하는 사람들. 소유한 부동산 혹은 직업 소득계층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내 사람들'로 그룹화 짓는 사람들. 그들은 허울 좋은 말로 자신들 혹은 우상시된 단체의 위대함을 포장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혹은 약간의 의견이나 생각의 다름을 비추면 언제든 '내 사람' 은 쉽게 버려지고 또 버리고 만다. 어른이 될수록 '친구'가 생기기 쉽지 않은 건 어쩌면 이해관계를 따지며 머리로 사람에게 다가가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아이가 어른에 비해 더욱 훌륭한 편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니까. 마음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으니까.
문득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만다. 책이나 읽자고. 읽으면 쓸데없이 복잡한 생각은 어느새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다 쓰고 나면 더 좋아질 것이고. 정상적인 '엄마' 들이 보기에 그녀들에게 나는 어딘지 조금 이상하고 분주하고 우울해 보이는 워킹맘으로 비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실이기도 하니까. 우울은 여전하고 아직도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채, 오히려 빨리 시간이 흘러서 자연사로 죽고 싶은 생각을 종종 하는 몹쓸 나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눈물을 글썽이는 이런 나를 그래도 믿어보기로 한다. 어딘지 이상하고 바쁘고 뭔가 계속 움직이고 있고 그러면서도 오래 살고 싶지 않는 '엄마'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