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 고. (He who has a why to live can bear almost any how) 맞다. 정말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다.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를 흐리게 만드는 것들과 마주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오기에. 삶을 멈추게 만드는 것들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상황일 수도 혹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 아니면 지우고 싶은 기억의 모습을 한 채 조용히 곁에 자리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그런데 피하지도 즐기지도 못한다면 어찌할 수 있을까. 어떤 고통이나 아픔은 한편으론 생장점의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견딜 수 있을까? 사실 그렇다고 믿는다. 믿고 싶은 것이다. 때로 좋은 고통도 있기 마련이며 그 아픔에 '의미'와 '이유'가 선명하다면 고통이란 한편 생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인간이란 결국 자처하여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니까. 힘들고 괴롭지만 기꺼이 그 아픔을 맞이하고 감내하는 것처럼...
아이들과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보호자의 설명이 필요한 다소 잔혹한 그 영상의 주된 스토리는 단출하지만 선명한 교훈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어린 사랑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였다. 주인공은 가족과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정의감마저 가득 품은, 현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귀한 인물로 등장한다. 돌연 가족들이 혈귀의 공격에 의해 사망하며 그의 행복은 순식간에 빼앗긴다. 그때부터 약했던 주인공의 기나긴 고생의 여정은 시작된다. 남겨진 단 한 명의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주인공은 고통을 자처할 결심을 한다. 그 후 엄청난 인고와 훈련의 시간 끝에 점차 강하게 성장해나가며 자신의 주변인들을 열렬히 지켜내는 이야기다. 비록 허구에 불과한 비현실적이고 비약적인 장면들로 가득한 애니메이션에 불과하지만 어딘지 묵직한 교훈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문장과 장면이 펼쳐진다. 현실을 조용히 되돌아보며 삶의 방향과 의미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그리곤 허무하고 회의적인 힘 빠지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와, 이성의 눈을 떠야 한다고. 그리하여 '오늘'을 제대로 지켜내라고. 지금 내 곁의 아이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고. 그것을 반드시 기억하라고.
Death in the Sickroom, 1893 (오른쪽 작품 이후 C 컷, 왼쪽, 1895)
편안하고 즐거운 경험 혹은 고달프고 괴롭지만 의미가 확실한 경험. 둘 중 과연 삶에서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느 쪽일까. 우리에게 '절규'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를 떠올리면 확실히 그를 예술가로 만들어 준 강력한 무기는 후자였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을 넘치게 받기에도 모자랄 유년기 시절, 꼬마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를 폐렴으로 잃고 만다. 그 이후 남동생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남은 가족인 아버지로부터는 사랑은커녕 보호자의 강박적이고 신경질적인 광기와 슬픔이 뭉크에게는 어린 시절의 큰 트라우마로 자리하게 된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사연이지만 한편 그의 깊고 헤아릴 수 없는 그 생의 고통은 작품들 안에서 고스란히 승화되어 탄생되는 걸 볼 수 있다. 보는 이도 아프게 느껴질 만큼. 눈을 질끈 감게 만들면서도 숙연하게 현재 지닌 것들에 감사하게도 만드는 묘한 역설을 연출하는 뭉크의 작품들...
뭉크는 자신의 누이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나고서야 그녀가 죽던 그 순간을 그림에 담아내고 만다.'병실에서의 죽음' 은 어쩌면 뭉크가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누이는 한참 예전에 죽었지만 그 방 안에 있는 인물들은 그 당시가 아니라 한참 더 나이가 든 모습을 한 채 그려져 있으니.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도 지속적으로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음을 뭉크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이렇게 아프다고. 시간이 흘러도 쉽게 잊지 못하는 그런 기억이 분명 있었고 여전히 잔흔이 된 채 자신을 놓아주지 못하고 만다고.
@Edvard Munch, Love and Pain (Vampire), 1895
뭉크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그로 인한 공포가 거의 자신의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작품을 통해 표현해낸다. 게다가 몸도 약해서 잔병치레가 잦았다던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로부터 그리 사랑받지 못한 채 혹독하고도 가난한 삶을 지냈다 하니. 그가 살아생전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었다고 한 말은 필시 거짓은 아니었겠다. 청년 시절 밀리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끝내 의심과 질투로 스스로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한평생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일종의 혐오와 공포와 슬픔을 안겨주는 존재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니.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속 '여성' 들은 대부분 어둡고 음침하거나 슬픈 모습의 형태로 그려지곤 한다. 마치 마돈나이자 메두사와 같은 존재 아니면 흡혈귀로 변신한 채로.
'사랑과 아픔'이라는 제목 속의 여성은 한 인물을 감싸 앉지만 이윽고 혈귀의 존재로 비치는 걸 손쉽게 알 수 있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사랑. 어쩌면 뭉크에게 사랑이란 단순히 아름답고 예쁜 시간의 결정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통일 수 있다는 사랑의 민낯을 확연히 드러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화가 자신이 느꼈을 사랑의 형태는 저렇게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고. 사랑은 원래 고통의 영역이고 아프게 끝나는 것일 수도 있음을.
Weeping Woman, 1907–1909
뭉크의 작품들 중심에는 '죽음'과 동시에 '팜므파탈' 적인 여성 인물들이 상징적으로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마치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뗄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음침하고 섬칫한 모습을 띄며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뭉크의 작품 속 그녀들은 상대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데 탁월한 듯싶다. 아니면 그녀 자신들의 자멸과 우울을 드러내기도 하는 듯싶다. 어쩌면 화가 자신이 생전 느끼지 못했을 사랑에 대한 반증이 작품에 묻어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참담한 안타까움을 방불케 하는 그의 작품들은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을 짓누르게 만들다 내면의 어떤 감정을 들켜버리고 있는 것도 같다.
Separation, 1896
단순한 선들과 색의 조합은 묘하게도 공허한 여백들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감정의 심연을 건드리고 만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들이 모두 생전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고, 다른 것을 더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부는 그리지 않는다.' 고 하였다. 약간의 나른함을 자극하면서도 어딘지 슬픈 감정의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여기 '헤어짐'으로 가슴 아파하는 남자와 그를 향해 등을 돌린 채 반대 방향을 보고 사라져 가는 듯 보이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그녀는 흡사 유령이 되어 떠나간 것으로 보이고 남자는 현실에서 홀로 남아 찢긴 가슴을 한 손으로 막은 채 눈을 감고 아픈 이별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은 이처럼 아픈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남이 바라봐주는 내가 아름답기만 한 게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라고 했는데 (사랑은 왜 아픈가, p.217) 그렇다면 뭉크에게 사실은 그를 바라봐 주고 아껴주고 인정해 준 이가 사실상 거의 없었고 고독하게 말년을 보냈다니. 결국 사랑은 아플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지. 아픈 사랑의 기억이라 할 지라도 원목판에 새겨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장면도 있는 법. 뭉크의 '키스'는 실체가 선명하지 않은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포개져 위태롭게 불안정한 자세여도 한껏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사랑은 그런 것. 위태롭고 불안하고 기약할 수 없는 앞날에서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Kiss IV, 1902, woodcut print on wood
5월의 시작은 초반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나에게 가정의 달이라던 5월은 연이어 피곤하고 속상한 감정을 혹독히 통과해야만 했다. 무엇으로 인해 마음이 이토록 관통당한 것일까. '우리'가 된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입혀야 했던 것인가. 이것 또한 지나가고 나면 '별 것 아님'으로 기억될 일일까. 미래의 '별 것 아님' 이 현재는 '대단히 별 것'인 것 마냥, 왜 나는 실망하고 속상하고 애간장이 탔을까. 아이들을 향한 깊은 속죄와 원인 모를 미안함. 동시에 그이에게는 굵은 실망과 날카로운 분노를 조용히 느낀 채 그 감정을 모조리 감내하려 했던 것인지.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될 때. 그것이 반복되고 쌓여서 불현듯 삶이 무척 허무하게 느껴지고 말아서 일순간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잦아질 무렵. 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곤 생각한다. '그래도'라는 부사를. '그래도' 주어진 이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사는 '이유'가 있을 것을 기억하라고. 기억해 내라고. 지켜야 할 것이 확실하게 생긴 이번 생에서는 그리하여 쉽게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고통이 비단 아픔으로만 남겨지는 것은 아닐 것이니. 그 아픔 이후의 성숙과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사는 의미. 살아내야 하는 이유...
이유는 견디게 만든다. 비록 입술을 깨물게 할지언정. 사랑스럽고 선량한 나의 이유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아이들의 잠든 얼굴과 볼을 쓰다듬으며 아마 오늘도 다짐할 것이다. 견디게 해 줘서 고맙다고. 지켜야 할 이유가 이토록 충분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 덕분에. 엄마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