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vador Dalí
다정하고 좋은 기억은 사는 데 힘이 된다. 떠올리기만 해도 뭉클함을 자극하며 지나간 시간을 돌려내고 싶을 정도라면. 그런 기억은 살아내는 데 적잖은 동력이 되어 주는 것이다. 가령 아이들의 해사한 표정과 급작스런 고백. 엄마 최고라고, 엄마 음식 맛있다고, 엄마 사랑한다고... 품 안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힘껏 껴앉으며 서로의 살갗을 나눌 때.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순정한 시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삶을 진흙탕에서 일으켜내는 적확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 구원의 기억은 이것만이 아니다. 감정의 늪으로 침잠되려 할 때, 무심히 건네받았던 슈크림빵과 목소리. 먹고 기운 내라고, 좋은 면도 많은 너라고. 충분히 잘 해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던. 좋은 면이 더 많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했던 목소리... 생각해보면 눈물이 흐를 땐 슬플 때만은 아니었다. 태생이 울보였는지 그럴 때도 곧잘 흐르곤 했었다. 그리워서. 다정했던 기억과 그 목소리가 정말 그리워서...
한편, 좋은 기억이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좋지 못한 기억은 지니던 힘 마저 빼앗아갈 수 있음을. 여유랄 것은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사람처럼 시간을 틈틈이 살아가다가 급기야 소중히 아끼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때. 생각만 해도 울컥하고 속상한 장면이 원치 않게 다가왔을 때. 듣고 싶지 않았던 문장이 들리고 말았을 때. 그런 기억이 만들어졌을 때는 서서히 우울의 늪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할 것을 다짐한다. 너무 빠지지 않기를. 발만 조금 담갔다 어서 나오려 노력하기를. 결국 그 기억을 이길 더 강력한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쓸 것을.
오늘도 그랬다. 울렁거리는 감정의 늪에 발이 담가졌었다. 틈새 운동을 하고 급하게 복귀를 했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발견했다. 갤럭시 버즈, 한쪽 이어 버드를 잃어버린 것을. 처음엔 당황, 그리곤 상황 추적, 확인 끝에 은은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코끗이 매워지며 기억의 파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건 하나 잃어버렸을 뿐인데. 왜 그렇게도 속상했을까. 당연한 줄 알았기 때문이겠다. 당연히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당연한 건 사실 없는데. 그 '당연함' 을 기대했던 나 때문이었겠다. 계속 함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그럴 줄 몰랐는데 결국 잃고 말아서. 물건이 뭐라고. 마음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마냥 울적해졌던걸까.
함께 했던 장면이라 할지라도 같게 해석되는 기억은 없다.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겠다. 기억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남겨지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의 생사 여부는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달려 있음을. 기억을 살려둘 것인지 없애버릴 지에 대한 의지는 결국 기억하는 자의 몫이겠다. 무엇보다 살려진 한 장면의 기억일지라도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기억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그럴 수 없다. 절대로. 기억은 각자의 방식대로 편집되고 해석된다. 너와 나, 사적인 객체들을 향해 기억은 관통한다. 그리곤 각자의 세계 속에 스며든다. 그리하여 흔적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상흔 혹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으로. 각자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기억의 지속'이라는 그림이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로 너무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의 시그니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유독 내게 시간과 기억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시간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기억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되다 시간 속에 묻혀서 결국 사라지는 것일까. 무엇보다 모두가 경탄하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알고 나니 그의 작품을 보고 즐기고 기뻐하고 놀라워했던 나의 기억과 달리, 그의 기억은 반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인해 괜히 마음이 먹먹해진다.
달리의 부모님은 일찍 죽음에 이른 형의 부재를 이기지 못하여 달리를 그의 환생으로 보았다 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타자의 기대에 맞춰 연기해야 했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개미가 가득한 박쥐를 입안에 넣거나, 염소 똥으로 만든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던 괴상했던 달리는 사실은 고조되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는 심적 침잠을 제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가 느끼는 감정의 파동은 상흔처럼 동반되는 기억들과 함께 강박증이나 편집증, 급기야 정신 분열을 낳게 했을테다. 물론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를 달리 다운 아주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작품 속에서 승화시켜냈음은 존경받아 마땅할지 모르지만. 자신을 혹독하게 대했던 결과물이었다면, 개인에게는 그저 가혹하고 애잔한 삶이 남겨질 뿐이겠다.
그의 '기억의 지속' 은 사실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량화된 시간의 엄숙함, 그러나 그 시간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인생의 모순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천편일률적이고 정형화된 생각을 확실히 파괴시키는 듯. 녹아내리는 시계에는 달리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담겨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시간이란, 기억이란, 각자의 세계 속에서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 편향적인 우리 인간의 본성은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해석하고 마니까. 그리하여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되는 영역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세계 안에서 확실히 상대적인 것임을. 누구에겐 쉬운 시간이 누구에겐 굉장히 어렵게만 흘러간다. 그리하여 개츠비의 이 문장을 종종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깨물게 될 때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 위대한 개츠비, p. 11 -
달리는 밀레의 만종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장면'이지만 다른 '기억'을 지녔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밀레의 '만종' 은 석양이 지려는 배경을 등지고 두 남녀가 종소리에 맞춰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목가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들의 발치에는 감자 바구니가 놓여 있고 캐다 만 감자 몇 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부부로 추정되는 두 사람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평소처럼 흘렀음을, 그렇게 하루 일과를 무탈히 끝마치고 수확이라는 결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짐작된다.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살만한 삶을 보여주는 듯한 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그림을. 달리는 다르게 해석했다.
평화로운 게 아니라 서글프고 안타까운 비극이었음을. 두 사람은 하루의 평탄함에 감사함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죽은 아이를 애도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달리의 주장엔 설득력 있는 근거가 확실히 남겨져 있었다. 그 시대엔 겨울을 넘기고 난 후 봄이 올 때면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한다. 배고픔을 참다못해 굶어 죽은 아이들... 기아가 많았던 시기. 바로 두 사람은 기근으로 죽은 아기의 시체를 묻기 위해 바구니에 아이의 관상자를 넣어 담아왔고 결국 감자 바구니의 정체는 그것이라는 점이다.
죽은 아이를 묻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질 수 없었을 터. 그리하여 바닥을 바라본 채 애통했다는 것이 달리의 주장이고 그래서 탄생된 아래 그림에서 '만종'을 확실히 다른 기억으로 해체했다. 훗날 사실 파악을 위해 루브르 미술관에서 조사한 결과 해당 바구니의 초안 그림에서 어린아이의 관 모양이 감쳐 저 있었음이 밝혀졌다 한다. 이렇듯 기억은 편집되고 재편되어 비로소 각자의 세계 속에서 해체된다. 결국 같은 장면도 달리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평행선 같은 시간 속 기억의 역설, 우리 인생의 모순...
각인된 기억은 그것을 기억하는 자의 삶 속에서 때때로 소생된다. 소실되지 못한 기억의 궤적은 통증을 동반시킨다. 그래서 어떤 기억들은 시간을 원할지도 모른다.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릿한 기억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을 때. 해방되지 못하고 마는 기억의 중심 끝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삶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갈 것인지를. 기억에 갇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품고 지닌 채로 아픔을 감내하며 나아갈 것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상처 좀 받았으면 어떠냐고. 울적해도 괜찮다고.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믿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마법은 시작된다. 좋지 않았던 기억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리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렇다고 믿는다. 그렇게 스스로 주문을 걸며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간다. 나아가야 한다. 멈출 수 없다. 멈춰서도 안 된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랑받았던 기억이 선명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럴 리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낸다'. 발화되지 못한 문장은 다만 마음 깊숙한 곳에 꾹 눌러 담은 채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않으면 된다. 자신을 믿고 조용히 나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폐허 같았을 마음 마저도 끝내 사랑하며 그렸을 그림들처럼.
기억이 지나간 자리. 그것들이 잠시 멈추게 만들지라도, 아직은 멈추지 않겠다고.
지나온 모든 기억은 결국 마지막에 도착해서야 애처롭고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기에...
#Source : Salvador Dalí #Spanish surrealist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