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고통

Charles Courtney Curran

by 헤븐

우리가 얼마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문장을 떠올리자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이윽고 다음엔 이 문장들이 다가왔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개인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적으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 한 인간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무지의 경각과 자각에 대한 의지가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과연 개선되고 바뀔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면 그런 확률을 타자에게 '기대' 하는 것 자체가 사실 허무함만 남기는 쓸쓸한 어리석음은 아닐지. 나는 현실에 닥친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무쓸모 할법한 이런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써야 했다. 여전히 애를 쓰고 또 써야 이겨내지는 것들이 있다.



며칠이라는, 물리적으로는 짧지만 심적으로는 강렬히 나는 애간장을 태우며 속앓이를 확실히 하는 중이다. 아이들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었다. 기관에서 한 아이로부터 적잖게 나의 아이들이 불편하고 힘들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늦었지만 알아냈고,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에 대응하는 여러 행위를 현재 순차적으로 하고 있음에도... 씻을 수 없이 마냥 이어지는 감정과 생각들 때문에 나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게 '엉망진창' 이 되어가는 중이다. 삶의 명징한 목적과 방향인 '지켜낸다'는 가치를 그야말로 지켜내고 있지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 아이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스스로를 향한 원망. 동시에 나의 아이들을 힘들게 한 그 아이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그의 부모. 기관 내 교육자들을 비롯한 모든 주변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노까지도. 온갖 조악스러운 감정들은 뒤엉킬 데로 엉켜버려서 풀리지 못하는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마음속에서 번지는 중이다.



'엄마, 웃으면서 하는 말은 모두 좋은 말이야?'

'엄마, 근데 왜 OO이는 웃으면서 나한테 이 새끼야 라고 그래?'

'엄마, 나 어린이집 가기 싫어. 오늘 안 가면 안돼?'

'엄마, 나 반 바꾸면 안 돼?'

'엄마, 근데 내가 이런 말 한 거 선생님한테 말하면 절대 안 돼. 혼나'

'찰싹 소리는 났는데 근데 많이 아프지는 않았어. 그냥 놀이하다가 장난친 거래. 그래서 나도 장난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붙잡고 배를 때리려 했는데 때리지는 않았고 너 맞을래라고 자꾸 그랬어'



왜 그때.... 나는 왜 그때. 진작에 왜 그때.... ! 나는 도대체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아이의 목소리가, 그들의 말들이, 그들의 문장들이 모두 내게 다가오는 신호였음에도. 나는 바보다. 나는 헛똑똑이다.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아이를 읽어야 했다. 나는 그래야 했었다. 아이들의 언어와 아이들의 세계를 또렷하게 읽고 관찰하고 살펴보고 더욱 세심하게 대화를 읽어야 했었다... 아이들이, 특히 둘째가 한 아이로부터 자주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불편함과 피해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남' 일인 줄만 알았던 것이 '나'의 일이 되어 버렸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란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적합한 국어적 표현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무력함과 답답함을 느끼지만 기어코 '글'로 방출해내고 싶다는 욕망은 참다 참다 이렇게 결국 발산되어버리고 만다... 청소나 빨래를 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을 살피면서 계속적으로 해결방안을 고민하고 고심하고 상담하는 시간 속에서도 내내... 써 버리겠다는, 쓰고 말겠다는, 쓰는 세상 안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날 선 엄마의 생각은 활자화되어 일기장 속에서 번져나간다. 시간의 무게에 기대어 기억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도. 결국 어떤 기억들은 글자 속에 봉인된 채 영원히 박제되어 남겨진다...



Charles Courtney Curran, Shadows, 1887



프랑스 인상파와 미국의 사실주의 화풍이 결합된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찰스 커런의 작품들은 모두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여성과 일상의 모습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시원한 바람과 화창한 여름 햇살이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보인다. 빈티지의 파스텔톤으로 잘 묘사된 여인의 모습은 주로 그의 아내의 모습을 모델로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림은 참 신기하다. 보는 이의 내면이 반영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그림도 이상하게 예뻐 보이지 않고 자꾸만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결국 내면을, 또 다른 자아를 그림을 지켜보며 그 속에 자신을 투영시켜버리고 만다. 최소한 찰스 커런의 작품 속 인물들과 화가에게 뒤 묻고 싶어지는 게 많아졌던 나로서는 '그림'이 그러하다.



화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아내를 모델로, 일상을 모티프로 삼았다던 그에게, 과연 그 일상이 보여지는 작품들처럼 끝내 조용하고 평온하기만 했을지. 남편이 보는 아내는 정말 '그렇게' 보였는지. 보이는 게 다는 아닐 테지만. 작품 속 '아내'는, 그녀들은 목가적 분위기 속에서 그저 편안하고 자유로웠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당신의 가족들은, 당신의 배우자는 큰 복과 운을 타고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기어코 하고 마는 요즘의 나는.... 그의 작품을 지켜보면서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분하고 화도 났다. 한껏 화창한 날씨에 이불을 널고 있는 여인의 모습 속에서 (Shadows, 1887) 화창한 여름 날씨에 푸른 하늘과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한껏 들판에서 뛰어노는 생기 발랄한 아이들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여성의 옆모습에서 (Summer, 1906) 사실은 어떤 생각들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불면과 피곤함과 끊임없는 속앓이를 남몰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원래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절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편향적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절대 알 수 없고 오히려 스스로의 경험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기에 얼마나 잔악무도하던가...



Charles Courtney Curran, Summer, 1906



아이가 꾸준히 '피해'를 입고도 견디고 있었다는 생각... 동시에 '가해'를 입힌 그 아이가 멀쩡하고 평온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그들만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내가 힘든 이유는 어쩌면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는 생각. 모르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과 생각. 누구들은 내게 가끔 말할 지 모른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고.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되묻고 싶다. 생각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건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모른다는 생각조차 생각하지 않은 채로, 생각하려는 의지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편협한 시선과 조악한 사유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어른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고, 아이라고 다 아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얕은 지성력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려고나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른 아침 출근하면서 아이들을 등원시킬 때. 퇴근 후 아이들에게 달려가 하원하여 귀가한 이후 씻기고 먹이고 놀리고 틈틈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설마' 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나는 완벽히 틀렸다.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 이후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하는 와중에. 또한 그럴수록 나는 '현실'의 어떤 단면과 마주한다. 악순환의 근본과 본질적 개선은 여전히 되지 않는다는 것. 개선이 쉽지 않은 현상과 상태에 맞서는 피해자가 오히려 '피해' 버리는 게 사후 대처로서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 결국 피해를 입은 쪽은 끝까지 속앓이를 하고 반대로 가해의 입장은 과연 이 상황을 인지나 하고 있을 지, 여전히 '남' 일 처럼 생각하며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과 일상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것이 바로 잔인하고도 비극적일 수 있는 인생의 형편없는 모습 그리고 빌어먹을 모순...



Charles Courtney Curran, After the Storm


찰스 커런의 'After the Strom' 은 폭풍이 지나간 그 후의 풍경과 남겨진 사람들을 보여준다. 비가 세차게 왔는지 땅은 젖어있고 구름은 잔뜩 낀 채 날씨는 아직 흐린 상태다. 물론 맑아지고 있다는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파스텔톤 색깔의 구름이 걷히고 있는 배경이라든지 이미 생존한 나무나 돌 틈새로 보이는 풀들이 작품 오른편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화가는 나름의 희망을 암시해내고 있다. 그렇다. 맞다. 희망은 있다. 존재한다. 생존한 것들은 그럼에도 살아지고 살아갈 것이다. 폭풍이 지나갔어도. 잔해에 묻혔어도. 남겨진 존재들은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 속 서 있는 여인은 과연 그렇게 희망적인 생각'만' 했을까. 폭풍이 분명 미웠고 분했고 그 자리에 없어진 무언가로 인해 원망하고 애통했던 건 아니었을지. 있던 일은 없던 것이 되지 못하니까. 생긴 상처는 그저 그 아픔과 고통을 견디며 회복되려 할 뿐, 그 상처의 아픔이 없었다고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이나 기대, 아니면 어떤 강인한 믿음 없이 도무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겠다. 최소한 이미 내가 아는 세계는, 여태껏 내가 느끼고 경험했고 여전히 아이들을 키우면서 경험해나가고 있는 이 세계는 솔직히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절망적이지만 않으면 다행이고 감사한, 흡사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아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시대다. 아이라는 존재를 그저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며 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는 시대다. 약자에게는 여전히 강한 인간 어른들이 많은 시대... 한 때 모두가 어린아이였고, 그 어린 존재들은 사실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와 인고의 감정들을 먹고 자랐음을, 우리는 결국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 사실을 망각한다. 혼자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혼자 살아남지 않았음에도.



그뿐일까. 기술이 인간과 인문성을 교묘하고 산뜻하게 갉아먹고 있지만 우린 잘 모른다. 소셜 포비아 속 인간들은 그런 기술에, 미디어에, 광고에, 돈에, 자본에, 권력에, 주류에 의해 인간이 지닌 고유한 영혼과 순수성, 삶의 우선순위는 결국 먹히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할테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려고 노력할까. 그저 알고 싶은 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려 하는 욕망과 탐욕 뿐. 그것이 대물림되어 후세대에 영향을 끼친다면 어떨까. 능력주의와 경쟁의식으로 인해 괴물이 되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바른 의식으로 키워내려는 인간들은 결국 고통을 자처할 수밖에 없겠다. 그것이 최선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Charles Courtney Curran, June Day on the Mountain



나는 점점 더 알 것만 같다. 사랑한다면, 지키려 한다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로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로워선 안된다. 편해서도 안 된다. 아낌없이 지키고 내어주려는 이는 애초에 편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나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 쏟아내야 한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고통스러워야 한다. 그것이 아이의 삶을 나아가게 만드는, 주려는 인간이 기꺼이 맞이하는 '최선의 고통' 이기에. 양육과 교육의 세계에서는 특히 괜찮은 부모로 살고 싶다면...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식이어도 내가 아닌 타자로서의 그들을 다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한다면, 상대를 끝없이 관찰하고 살펴봐야 하고 유해한 것들로부터 되도록 최선으로 지켜내야 하고 단호하게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건강한 인성의 괜찮은 인간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것... 그래야 하는데. 그리하여 사교육이 아니라 인성과 인문교육이 필요할 테지만 이미 시대와 세상은 인성보다 사교육이 먼저가 되어버린 터라, 이런 생각을 하는 부모를 둔 나의 아이들이...결국 '피해'를 입게 되어 버린 것이 결국 모두 무언가 내 비좁은 식견과 가치관으로 인한 것 같아서.. 무력과 환멸과 분노와 허무가 뒤범벅되어 자주 숨이 막히는 갑갑함을 느끼지만.



'Jun Day on the Mountain' 속 여인은 돌 바위 위에 올라가서 먼 풍경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 손으로 허리 뒷짐을 지며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녀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도망치지 않으려고. 숨 좀 제대로 쉬려고. 처참하고 형편없는 현실의 너저분함속에서 벗어나보려고. 잠시 산 위로 피했지만, 피하는 것이 사실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작품 속 바위 위에 서 있는 여성의 모습 속에서, 단편적으로는 자유와 해방이 느껴지면서도 이윽고 사실 그 자유와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끝없는 부자유함에서 탄생되는 강한 책임과 단호한 결의 없이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지. 고작 그림 하나 보면서, 나는 여전히 생각에 휩싸이고 만다...



Charles Courtney Curran, A Comfortable Corner, 1887



잠든 아이들을 쳐다보며 끝없이 고민하며 다짐한다.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아이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분한 경험과 마주하고 나니 더더욱 여실히 깨닫게 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을 스스로에게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얼마나 언제나 되어서야 서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얼마나 자유롭게 된 이후에나 정말 마음 편히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낼 시간이 올 수 있을까 라는. 아이를 어느 정도 다 키워내고 나면 그런 시간이 오기도 한다지만 솔직히 그게 가능한 일일지 현재의 내게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최소한 친정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그러하다. 그녀는 여전히 다 큰 자식인 이런 나와 손주들을 향해 물심양면 그녀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여전히 쏟아붓고 있기에...



그리하여 나는 문장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더 사랑하고 제대로 지켜내며 살아가는가,라고.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위해 최선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지. 괴물 같은 시대와 그 시대가 낳은 괴물 같은 존재들로부터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낼 수 있을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한창 내면에서 파생되는 서슬 퍼런 분노와 독기를, 잘 다스리며 활용해보려 한다. 사랑하고 지켜내는 데 더더욱 정신 차리고 만전을 다할 것. 그러려면 우선 더 강해질 것... 여전히 유약하고 무르고 그래서 토끼눈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지만. 다행인 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에 의지한 채. 속앓이를 내내 하다가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그들을 바라보며 혼자 거실로 나와 한껏 울어버려도. 사랑하는 너희들 앞에서는 큰 목소리로 왕왕 씩씩하게 수다를 떠는 그런 엄마가 되는 중이라고...



현재에 갇히지 않기 위해, 지켜내기 위해, 그리하여 '최선의 고통'을 앞으로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결한 삶의 '정답'인 것 같아서. 물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이 믿음이 부디 덜 흔들리기를....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며 나는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신께 어떤 것들을 염원하는 불면의 밤을 맞이하는 중이다...






#Source : Charles Courtney Curran, Woman,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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