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helm Hammershøi
퇴근 후 달려가듯 어린이집을 향한다. 마지막까지 남겨진 아이들과 만난다.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걷던 중. 나도 모르게 잠시 손을 떼어 본다. 손바닥조차 끈적이는 그런 무더위 때문이었을까. 양쪽 어깨엔 각각 나의 가방과 아이들의 가방 두 개가 걸쳐져 있다. 같은 무게여도 여름엔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왜였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을 켠다. 문제는 그 이후다. 생각해보면 딱히 '문제'라고 지칭할 것 까지도 없는 평범한 일상일 수 있겠다만. 웬일인지 자꾸만 나의 무의식은 그 시간들을 종종 '문제적'이라고 느끼고 만다. 어쩌면 그 느낌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성능 좋은 에어컨 덕분에 빠르게 낮아진 실내 온도는 쾌적하다고 느껴질 법 하나, 땀이 식기는커녕 줄줄 흘러내리기 일쑤다. 재빨리 두 아이를 순서대로 씻긴다. 말끔히 옷을 갈아입은 형제는 거실로 달려가 티비를 켠다. 나는 바로 주방을 향하고 냉장고를 연다. 새벽에 미리 손질해 둔 식재료들을 꺼내고 오늘의 메인인 생선을 튀길 준비를 한다. 그러다 문득. 에먼 생선 탓을 하는 어리석은 나를 발견한다. 이 무더위에 하필 오늘 저녁 메뉴로 가자미를 튀겨 먹일 준비를 해 놓은 것이 원인이라고.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나' 에게 있음을. 가자미 위에 튀김 가루를 입히고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생선을 올려놓는다. 벌써부터 고소한 냄새를 맡은 모양인지 아이들의 기대에 찬 목소리가 들린다. 마음은 금세 누그러진다. 나를 구원하는 그들의 목소리로 인해. 어떤 생각을 차단하려 용케 애쓰면서.
옷을 겨우 갈아입고 머리는 질끈 묶은 채 등을 비롯한 온몸에 흐르는 땀을 닦을 여유 하나 없이 나는 여태 뭘 하느라 그리 바빴던 것인지를 생각했었다. 여름이라는 날씨와 노릇노릇 잘 튀겨지고 있는 가자미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문다. 에어컨은 잘 돌아가고 아이들에게 건넬 따뜻한 저녁 식탁은 오늘도 문제없이 준비될 테지만, 왜 나는 여전히 더운지에 대해서. 왜 나만 '문제적'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생각 끝에 엉뚱한 결말과 만난다. 잘 튀겨진 가자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만다. 결국 누군가에게 먹히는 인생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빨리 늙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해서. 보통은 오래 살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게 된, 그렇게 변해가는 한 사람의 은은한 분노를 그는 이해했을까. 말로만 이해한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행동과 말이 따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음에도. 무기력함을 동반한 억지 동조가 연기된다. 그래, 당신은 이해했겠지 라며. 그리곤 사소한 것들로 인해 틈은 벌어진다. 그 틈을 파고들어 균열의 폭은 점점 넓어질 테고.
회색이나 흰색 혹은 적갈색과 같은 단색 하면 떠오르는 덴마크의 예술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작품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가 덴마크 출신이라 자연스레 '휘게'를 떠올린다면 잠시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걸 상상하기에는 어딘지 너무 차분한 '휘게'로 가득하니까. 북유럽의 생활 문화 방식이라던 아늑하고 포근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하는 '휘게'를 느끼기에 그의 작품들은 늘 비슷한 실내 풍경을 향하고 무엇보다 모노톤의 반사된 빛과 신비한 무채색에 가까운 색들의 조화가 어딘지 모르게 너무 차분하다 못해 약간은 가라앉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면이 또 한편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되지만.
'창문 옆 노파'라는 제목의 작품에 특히 눈이 쏠렸던 건 아마도 어떤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이겠다. 그 무엇에도 쉬이 휩쓸리지 않을 것 같은 초연한 자태로 한 노파가 커튼이 쳐진 창문을 향해 서 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간 사는 게 답답했을까. 아니면 지겨웠을까, 아니면 하루 일과를 다 마친 이후의 고즈넉한 넉넉함을 즐기고 있는 걸까. 어쩌면 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그야말로 '다 겪어볼 데로 겪어 본' 시간을 통과해서 그제야 고요한 적막 속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쩌나. 겨우 혼자가 되었는데 이미 늙어버린 몸. 이미 지나쳐 버린 시간. 시간은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데. 그럼에도 괜찮을 수 있는 것은 그제야 시끄러웠던 모든 것들로부터 홀연히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 때문일지 모른다. 물론 그 자유는 고독을 동반하지만.
함메르쇠이는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집 안 풍경을 자주 그렸다 한다. 댁 내 단조로운 풍경만을 수차례 묘사했다지만 모두 조금씩 다른 그림들이겠다. 시간에 따라, 시선에 따라, 각도에 따라서. 그러나 공통점은 유독 회색과 같은 무채색이 많았던 것. 그가 사용한 '그리자이유 (grisaille)'라는, 명암과 농담만을 사용한 특유의 화법은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완성 전 작품의 모델링을 할 때 활용했다지만 그는 그것 자체로도 충분한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신념과 화폭을 향한 그 시간을 사랑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한다. 조용한 공간을 단조로이 묘사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가령 우리가 느끼는 집 안에서의 아늑함이라는 느낌은,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한 시절의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며 소생되고 그러므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소실되고 마는, 그런 역설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빛이 들어오는 창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굳이 서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읽지 못한 채 잠시 틈을 내어 읽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면 서서 읽는 게 보다 손쉽고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서서 읽을 때의 나는 식탁 옆에서 아이들의 시중이나 요구사항에 수반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읽다 만 책을 펼치다가 내려놓는 행위를 반복했었다. 그림처럼 우아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그림에서 보이는 조용하고도 내적인 혼자의 시간을 갈망하던 마음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서서라도 읽겠다는 그런 혼자만의 의지... 그것은 남에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만큼은 확고히 보이는 마음이겠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의 세계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시간이었다. 돌봄이 지속될수록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동시에 기쁨의 양극을 역설적으로 경험한다. 가끔은 그 이전까지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정도다. 그것은 마치 '나'라는 인간의 색깔이 점점 옅어지고 흐려지다가 그렇게 무채색에 가까운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전까지 내가 만들어 온 다채롭고 들쭉날쭉한 색상이나 채도 따위는 온데간데 없어진 채로.
나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닌 채로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지기 일쑤라는 생각과, 그 불온한 생각이 파생시킨 에먼 감정은 결국 검정이나 하얀 혹은 회색에 가까워지고 만다. 이런저런 밀려오는 감정과 생각을 입술을 깨물면서 겨우 차단시킨 채 오직 생활을 어긋남 없이 이어 나가려는 인간은 '밤'을 늘 갈망했고 여전히 그러하다. 밤이 찾아오면 향초를 켜고 책을 읽거나 떠오른 무언가를 적으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것처럼. '꿈' 은 점점 사소하고도 작아져간다. 어쩌면 일상의 소박한 사소함들이 결국 진짜에 가깝다고, 여태 꾸었던 크고 대단한 것들은 모두 가짜 같기도 하다...
시간은 동등하게 흘러도 다양한 인간상 속 제각각의 형태로 채워진다. 누군가는 가족들이 무사히 하루를 지내고 다 잠든 그 밤에 오로지 읽고 쓰는 혼자의 시간이 인생의 큰 선물이고 목표인 양, 매일의 평온한 밤을 기원하며 낮이라는 무거운 시간조차 씩씩하게 견뎌나간다. 한편 같은 시각 누군가는 해신탕과 소주,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친구 혹은 동료들과 희희낙락 하루의 피곤함을 달래는 유희가 섞인 밤의 시간일 수 있다. 이 뿐인가. 사실 누군가는 겉으로 보이는 명성과 권력을 앞세워 뒤로는 구린 속내를 감당하지 못한 채로 호텔에서 신나고도 뻔뻔하게 몸뚱이를 마구 굴릴지 모른다. 마음과 뇌는 없어도 매력적인 껍데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몸과 시간을 '교환' 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는 베르사체 원피스와 토리버치 샌들, 티파니 앤 코의 18K 로즈 골드 소재의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바인 서클 펜던트를 목에 두르며 여유롭게 칵테일을 마시며 프라다나 에르메스의 신품을 주문할 생각을 할 지 모른다. 물론 주고받는 '거래' 관계가 '싸구려'의 세계가 아닌 '럭셔리'의 세계 속에서 성립 '가능' 한 재력과 베풂도 어쩌면 복이고 그들만의 유효한 권한일지도 모를 테다. 하긴. 최소한 싸구려 공간에서 상대를 탐하기만 하려는 슬픈 형편없음을 시전 하지는 않을 테니. 물론 가족을 기만하고 있다는 일말의 양심적 자책을 느끼지 못한 채 탐욕과 유희를 즐기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포장된 위선과 기품 없음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 턱이 없겠지만.
같은 시간이어도 다른 형태로 시간이 제각각 흘러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가자미를 튀기는 그 저녁 시간 동안 땀을 연신 흘리며 불 앞에서 지지고 볶는 요리를 하면서도 온갖 잡스러운 상상을 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고 어이없었다. 그렇지만 낙인 없이 자신의 인생이 읽히길 바라며 아이들을 돌보고 살리며 제대로 인간답게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끝까지 기억하려 애쓴다... 맞다. 단지 정말이지 그럴 뿐이다. 비록 초라하고 남루한 자신의 모습에서 때때로 밀려드는 슬픔과 분노와 우울을 경험하며 해방되지 못한 자신의 삶에서 떨어지지 않는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한편 병원에서 오늘내일하는 누군가들과 병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는 한낮 배부른 우울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간직한 채로.
오늘의 기분이 어땠는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 애써 묻는 밤, 그제야 잘 쉬어지지 않던 한낮의 숨은, 밤이 되어서야 조금 틔는 것 같은 숨통의 순간을 맞이한다. 고단했던 하루가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그제야 이미 지나간 것이 되어 있는 시간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간 앞에서 되도록 정직하고 편안한 숨을 쉬려 노력하는 밤. 숨 쉬는 밤... 그 밤은 그렇게 한 인간을 다시 읽고 쓰게 만든다. 숨 쉬는 밤, 쓰는 시간. 쉬고 나면 다 잊혀질 것이라고. 그렇게 마음의 상흔은 천천히 아물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식탁에 혼자 걸터앉은 채로.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휴식'은 그렇게 잠시 찾아온다.
#Source : Vilhelm Hammershøi
https://en.wikipedia.org/wiki/Vilhelm_Hammersh%C3%B8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