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Schjerfbeck
핸드폰 배경화면은 세 사람이 담긴 사진이다. 그이가 첫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마를 태우며 앞을 향하는 모습. 그 뒤를 둘째 아이가 신나게 따라 달려 나가는 장면. 천진한 세 사람이 잔디밭에서 신나게 노는 그날의 우리들. 그땐 몰랐었다. 아이를 앉아주고 엎어주고 함께 부대껴 뛰놀아도 전연 문제없었던 - 그렇게 보였던 - 그이의 호기로웠던 건강함은 결국 사라지고 있음을. 목마를 태울 수 있던 순간은 그 시절이 사실상 마지막이었음을.
출근길, 핸드폰을 열어서 평소처럼 시계를 보려 했다. 그러나 아뿔싸. 이윽고 당했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주르륵 그러다 펑펑. 손수건을 챙기지 못해서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야 했다.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낌이 새어 나가는 걸 간신히 막은 채로. 핸드폰을 괜히 열어봤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돌연 마음을 헝클어뜨려 뒤엎는 순간은 언제나 찰나다. 평소와 같은 핸드폰이었는데. 다만 배경 화면의 사진 때문이었을까. 문득 기억나고 무너졌기에. 그 시절의 윤기 나던 그이가 떠올라서. 영원할 줄 알았던 소중한 것들의 최후와 기어코 마주한 것 같아서. 그립고도 안타까워서. 그렇게 무언가에 사무쳐서.
남편이 아프다. 순식간에 여기저기 고장 나는 중인 걸까. 그이는 올해 들어 부쩍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여러 적신호를 보인다. 부서지는 허리는 다리 신경을 기어코 건드리는 것인지 지난 주말엔 절둑인 채 걷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손쉽게 앉아주곤 했던 그의 몸은 이제 그 누구에게도 적극적이지 않다. 아빠가 변했다는 걸 아이들도 아는 모양인지 눈치를 보며 이젠 매달리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묘한 분함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입술을 깨문다. 할 말을 잃은 채로. 발화하고 싶은, 뱉어 내고 싶은 어떤 심정을 꾹꾹 힘껏 누른 채로.
핀란드의 '뭉크'라는 수식어가 곧잘 따라붙는 여성 화가인 '헬레나 세르프백'. 그녀의 그림은 조용하지만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화폭 속에는 분명 그녀만이 표현하고 싶었을 아름다움도 있겠으나 어쩌면 아름다움 이전에 어떤 뜨거운 분노, 아니면 열정 혹은 슬픔, 그럼에도 꿋꿋하게 돌파해나가는 어떤 강인함이 서려 있을 것이라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가부장적이었던 그 당시 핀란드의 시대상과 재정적인 어려움, 사적인 건강 문제 등. 그녀의 어두운 작품 소재에 대한 사회의 편견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다 한다. 자신의 작품이지만 소유권조차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헬레나,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헬렌:내 영혼의 자화상)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왠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림의 주인일 수 없는 시대, 자신이 주인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을 통과하며 애써야 했을 그녀의 처절한 분투에 대해서.
'엄마와 아이'라는 작품을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굳게 다문 입술의 '엄마'로 추정되는 화폭 속 여성의 표정과 그녀가 꼭 끌어안은 아이의 작은 체구에 시선은 멈추고 만다.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무언의 정적이 굳건한 사랑 그 이상의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곤 도리어 나를 반성하게 되기까지. 주말에 볼멘소리를 잠시나마 그이에게 기어코 쏟아부었던 내가 너무 못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겠다. 가사 돌봄을 비롯한 온갖 댁 내 책무들을 홀로 도맡아 수행하는 일상. 그럼에도 왜 당신은 자신의 건강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나를 더 벅차게 만드냐며.
리소스의 로드밸런싱은 붕괴되어 버린 것 마냥 싱글맘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들 둘을 혼자 돌보는 일상으로도 나는 연일 한계를 갱신 중인데. 왜 당신까지 그렇게 아픈 것이냐고. 목소리의 데시벨은 약했지만 선명하고 단호한 원망이 섞인 어조를 첫째 아이는 알아챘는지 내 옆에 와서 손을 잡았고 그제야 나는 말을 멈출 수 있었다. 토끼눈이 된 두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그러니 헬레네의 그림 속 '엄마'는 나보다 낫다... 최소한 아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그것이 아이와 자신을 향한 최선이라는 걸. 나는 알면서도 왜 자꾸만 어긋나고 마는 걸까.
헬레나의 또 다른 그림은 그야말로 '부서짐'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파편이 되어 버린 부서지는 감정과 해체되는 마음에 대해서. 그림의 배경으로 보이는 깔끔하지 않은 붓터치는 역설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화폭 속 여성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웠던 과거로 회귀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선택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회피하고 싶었을까. 어제에 대한 회귀든 오늘 혹은 내일을 향한 회피든. 주인공은 말없이 입술을 다문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덜 부서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대뇌피질의 뇌세포에 베타 아밀로이드가 쌓여 경도인지장애가 오지 않는 이상 - 물론 그것이 축적되지 않아도 인지 기능은 언제든 약화될 수 있음을 늘 주의해야 할 테지만 -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가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했는지. 그들을 앉고 또 앉아도 더 앉아주고 싶었을 당신이었다는 것을. 나보다 더 괜찮은 부모였고 지금도 심적으론 그러길 바란다는 것을. 비록 신체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하고 있어서 기력도 에너지도 쉼표만을 찍은 채 연일 안방으로 사라지는 생경한 아빠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또한 나는 기억하려 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연민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해줬던 말을 부정할 수 없음을. 그것은 곧 애정이라던. 상대를 향한 마음과 기대가 남아 있기에 그런 감정을 지니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작품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위치는 늘 한계를 부딪히면서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 나는 그녀의 마음을 내내 기억하고 싶었다... 포기해야 하는 것들 앞에서 포기하지 못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 여전히 그이에게 기대하다 서운해하고 이러저러한 삶의 부침들 앞에서 균열과 틈새는 만들어지고. 좀처럼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음에도. 움켜쥐던 아픔은 끝내 말끔히 씻기지 못한 채 잔존함에도.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 포기했다 선언하면서도 사실은 그 무엇도 제대로 포기하지 못했고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그대로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까지도.
누군가를 향해 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사랑의 형태이며 그것은 이윽고 에로스를 지나 아가페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지만. 그리하여 그것이야말로 좀처럼 떨어질 수도, 포기되지도 못하는 무결한 형태의 사랑일 수 있음을. 물론 동시에 역설적으로 나는 기억한다. 포기해야 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할 때에도. 그만큼의 아픔이 동반될 것임을. 되풀이되지 못하는 박제된 순간 속 사진 한 장에서도 기억은 뇌의 시상하부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마음을 무너질 수도 있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기에.
그러니 사랑은 아픔의 영역이라는 걸 나는 안다.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