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해방의 실험

John William Waterhouse

by 헤븐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위로가 되곤 한다. 마냥 착하다 생각될 법한 인간에게도 그 내면 안에는 꽤나 심도 깊은 복잡함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부덕한 면모도 마찬가지.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밀폐된 진실과 목도한 인간은 동공의 흔들림을 자각한다. 생긴 의심은 원하던 관심을 배제시키려 하지만, 스스로를 제대로 속이지 못하는 인간이 확실히 성공할 리는 없다. 평소와 같은 음악이었음에도, 매일 마주하는 빌딩 숲 속 건물을 바라보면서. 각성된 인간은 자각하고 만다.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무언가가 틈새를 비집고 천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서.




답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그 답이라는 걸 구하려 한다. 곁의 주변인들에게서, 혹은 잘 나간다 하는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나로서는 사람보다 책을 믿고 의지하는 편인데 책을 펼쳐서 나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주인공들의 역경담을 읽고 있으면 묘하게 위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위로에 그칠 뿐. 그 무엇도 해결되는 건 없다. 아무리 책을 읽어봤자, 화려한 인맥으로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낼지언정. 자신이 찾는 '답'이라는 건 결국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 더 이상 그러고 싶지만은 않았을 때. 자신만이 구원의 주체일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마치 에로스를 되찾기 위해 죽을 각오로 아프로디테의 미션을 수행하는 프시케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John William Waterhouse, Psyche Opening the Golden Box, 1903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잊고 지내던, 잊어야 하는, 현실에서는 도무지 갖기 힘든 어떤 판타지를 지켜주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라파엘전파 화가로 주로 고전을 주제로 다루며, 화폭 속에서 전해지는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오묘한 감정을 자극시키고 만다. 신비롭고 때로 애틋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탁월하게 표현한 화가.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이국적이면서 어딘지 미스터리하여 보는 사람이 처한 현실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대표적으로 그의 그림 중 '판도라'와 '황금 상자를 여는 프시케'를 접했을 때 심박수가 조금 더 세차게 뛰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그리워하던. 이제는 잊힌, 돌아가기 쉽지 않은, 그리하여 파생되는 어떤 감정들은 꾹꾹 눌러서 봉인시키는 데 익숙한, 그런 나 때문에.



인간의 인내가 그리 만만치 않은 것임을, 프시케나 판도라를 통해서 더욱 깨닫곤 한다. 아프로디테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 프시케는 그녀의 시기를 산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인 에로스를 불러 프시케에게 금화살을 쏘아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명령 하지만, 천하의 에로스조차 프시케를 피하지 못했다. 인간의 신뢰는 신의 그것보다 나약했을까. 보지 않아야 하는 에로스의 모습을 기어코 보고 말았던 프시케는 결국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자신의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괴로워하지만 한편 그녀 스스로 시험에 들기로 자처하며 저승의 왕비로부터 황금 상자를 받아온 프시케 앞에서, 우리는 과연 그녀를 마냥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어떤 각오를 했을 테니까. 영원한 잠에 빠질지언정.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 움직인, 어떤 결심을.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황금 상자를 여는 프시케'는 인간의 나약하고 불안하며 불완전한 당돌함을 우회하여 잘 그려진 것만 같다. 기어코 상자를 열어볼 결심을 하고 마는 그녀들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흔들림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만 같기에. 처진 어깨는 그녀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듯, 가녀린 두 팔로 조심스럽게 황금 상자를 열어보는 프시케. 그녀의 무언의 두려움은 발꿈치를 위로 올려 몸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열어보아선 안 된다 했지만 그 황금상자를 열었을 때 영원한 잠에 빠져든다는 것을. 그녀가 앉아 있는 곳 주변에 핀 꽃들만이, 상자 속에서 피어오르는 마법의 연기가. 자신을 감싸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정말 몰랐을까.



@John William Waterhouse, Pandora, 1896



자신을 유혹하는 잠의 마법에 이미 빠지기 시작했다는 걸. 여리고 하얀 프시케의 목선이 점점 아래로 향하듯 쓰러질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난 이후에 치러야 할 대가를 잘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그럼에도 용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이유는 어쩌면 끝내 상자를 덮지 않고 내내 열어둔 채 똑바로 직시하듯 끝까지 바라보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라 볼 수 있을 '판도라' 도 마찬가지.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상자를 여는 판도라. 그녀의 미세한 떨림과 감출 수 없는 불안한 두려움은 그녀의 하얀 손목과 지그시 눈을 반쯤 뜬 채 엿보듯 고개를 들어 상자를 열어 보려 하는 그녀의 목선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하얗고 긴 그녀의 곡선은 어두운 주변의 색감과 확실히 대조적으로 대비되어 더욱 극명한 몽환적 분위기와 관능미마저 자극시킨다. 지켜주고 싶지만 동시에 헤쳐보고도 싶었을 마음은 과연 판도라뿐이었을까. 화가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아니었을지. 평생 안전하게만 살았던 너는 결코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 선언하듯, 그렇게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들도 있다는 것을. 판도라든 사강이든 그녀들에게 우리는 돌을 던질 수 없다. 판단할 수 없겠다. 다만 자신을 돌이켜볼 뿐.




@John William Waterhouse, Ophelia, 1889




언젠가부터 어떤 서사든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섣불리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가령 헤어짐을 앞두고 단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유한한 시간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일념 하 메리어트의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연달아 행했다던 호기로운 서사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던, 묘한 열패감마저 자극하는 것이었을 뿐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 서사의 처음과 끝에 대해서. 타자의 신발을 신고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 상대를 설명할 수 없음을. 나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내 선택과 그 선택이 이끄는 시간의 흐름들. 그것으로 인해 마주하게 되는 기억의 파편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수용할 뿐인 것이겠다. 나약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음에도 그런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 애쓸 자격. 단지 그것만 지녔을 뿐...



원하는 걸 때로 원하지 않는다 해야 하고, 억지로 자신의 어떤 모습을 지우려 애쓰는 인간은 지속적으로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이 있을 수도 있는 건 그런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황에 맞춰 자신과 그런 자신의 삶을 끝없이 조정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비범한 열정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인간은 마냥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고 또 괜찮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나가려 하니까.



자신이 만들어 내는 그 어떤 이야기도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덕분에 다만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려 할 때. 그제야 해방을 느낄 것이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은 그저 인생이라는 바다를 표류하고 있을 뿐, 결국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오직 자신의 것이라는 점만 기억한다면.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있어 조금은 해방이라는 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향한 가장 정확한 해방의 실험이라면.



정확한 해방의 실험. 점심시간의 할리스, 얼그레이를 곁에 둔 채 흰색 갤럭시 버즈를 귀에 꽂는다.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자신도 모른 채, 아무것도 장담하지 않은 채로. 다만 쓰이는 이야기가 뜻밖의 서사라면 멈추지 말고 그대로 이어 나갈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해방의 실험을 맞이할 자격을 지닌, 용자의 순간일 테니까...






#Source : John William Waterhouse



인용) 신형철 평론가님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단행본 제목과, 첫 단락의 인용문은 그의 책 p 131 (가장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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