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갈까

Herbert James Draper

by 헤븐

결혼생활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감정은 차곡차곡 축적된다. 적금은 이자라도 주지만 기혼자의 그것은 누적될수록 이익으로 환산될 리 좀처럼 만무하다. 게다가 생활적 소란이 끊김 없이 발생한다면 번뇌에 빠지기 십상이다. 하나가 되기 원하는 갈망으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서로가 매듭을 지었으나 기혼 후 피할 수 없이 따라붙는 절묘한 감정 논리의 뒤섞임과 보이지 않지만 선명한 역할의 강제로 빚어지는 혼선들. 거기에 돌봄이라는 세계에 진입하면 공적 인간으로 변신하여 본분과 책임이라는 쐐기가 강력히 박혀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잘해보려 할수록 망가져가는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지만 그는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지난주 에어컨이 고장 났다. 수리까지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처서의 마법이 내리기 전, 그러니까 여전히 31도에 육박했던 8월 중순의 주말. 하루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다며 우리는 카페와 마트, 백화점과 레스토랑 등 시원한 실내를 전전했지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아이들을 친정으로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주말까지 부모님께 돌봄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래야만 했다. 어쩔 도리 없이. 아이들을 떠올리면 미안하지만 실상 그들만 없어도 이 정도 더위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연쇄적으로 펄펄 생성되는 미취학 남아들 덕분에 늘 시끌벅적한 거실, 그들을 주기적으로 찬물 샤워를 시키다 하루가 다 갈 것 같은 반복되는 행태. 평소와 달리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급기야 정신과 체력은 30도에 육박하는 집안의 더위로 무력히 참패하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몇 주째 반복되는 불면의 밤으로 정신과 신체 여기저기는 어긋나는듯한 상태에서 아이들을 잠시 친정에 맡긴 채 남겨진 집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래서 느끼고 말았다. 석연찮은 홀가분함을... 급작스러운 자유, 적잖은 해방감. 그러나 그런 감정은 동시에 따끔한 가책과 죄책을 동반한다. 마치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달리 말하자면 정말 좋은데 사실은 절대 좋아서도 안 돼야 하는, 돌봄의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인간이 느끼는 요란한 혼동이랄까. 사적 인간과 공적 역할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인간의 모순. 나는 다시금 알 것만 같았다. 도리스 레싱이 말하던 '지성의 실패'가 어떤 세계의 것인지를.



유자녀 기혼 생활의 일정 부분은 확실히 '실패'라고. 특히 돌봄자로서의 기혼녀는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 머리에서는 이미 몇 개의 문장들이 맴돌며 차마 목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한 채 그저 뇌와 심장 안에서만 뜨겁게 발산되고 만다. 왜 아니겠는가... 최소한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로 시작하며 작가는 수전이라는 기혼녀를 통해 베일에 가려진 인간 내면을 지적하고 만다. 다둥이를 돌보는 주 양육자로, 외도를 하는 배우자를 둔 그녀는 시간의 압박을 느끼며 이런저런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단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열정 없는 열정과 실체화된 불행 사이. 그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을 '19호실'을 찾음으로써 그렇게 해서라도 씻겨지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19호실의 존재는 옳다, 타당하다, 적확하다, 괜찮다. 최소한 레싱의 수전과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물론 현실의 나는 그녀 같은 엔딩이 되어서는 안 될 노릇임을 모르지 않는다. 아직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럴 리 없다. 없을 것이다...



Herbert James Draper, A Water Baby, 1900



영국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허버트 드레이퍼는 주로 빅토리아 시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수많은 신화와 고전을 차용했다. 그의 화폭 속에는 주로 매력과 미학을 자극하는 매혹적이고도 관능적인 여성들이 여럿 뮤즈로 등장된다. 물론 당시 어떤 시선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포르노라는 평으로 굴욕과 모멸을 선사했다지만 나로선 그 해석이 좀 우스꽝스럽고 안타깝다. 여성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편협하고 단편적인 생각이 빚어낸 오역 같아서. 인물을 둘러싼 숨겨진 서사와 이야기가 전해주는 다채로운 생각과 상상은 하지 않는 수준의 저급한 해석 같아서. 작가란 무릇 활자와 그림을 사용하지만 결국 그들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것은 도구에 불과한 텍스트나 이미지가 아닌 이야기, 서사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해독할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파생되는 생각의 물결을. 단순한 지적 유희를 넘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봄과 이윽고 도달하게 되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감정, 성찰, 깨달음, 뭐 그런 것들을...



커다란 진주조개 껍데기 안에는 한 해도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기가 잠들어 있다. 바닥에 맨 살이 그대로 닿아 너무 춥지는 않을지, 관람자로서 보는 심정은 조마조마할 뿐인데 또한 눈길을 사로잡고 마는 건 아기 곁의 여성이다. 껍데기가 아기를 덮칠까 싶어서 한 손으로 그 위를 내내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폭 속 여성 또한 그리 강해 보이진 않는다. 이제 막 물 밖으로 나온, 속세의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새하얀 팔과 다리, 목과 곡선을 지닌 유약한 바다의 정령 같기만 하다. 아기와 여성이 바로 엄마와 자녀의 관계로 엮였다면.



왜 나는 이 그림을 보는 내내 처연한 사랑을 떠올렸을까. 한 인간의 육신과 심장과 마음 전부를 믹서기에 넣고 보기 좋게 갈아 넣어야 그제야 살아지는 존재를 생각하자니 그랬던 걸까. 아니면 사랑의 가혹한 양가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지키려는 인간의 애타는 심정, 그러나 동시에 손을 떼 버리고도 싶어지는 열렬한 욕망에 대해서. 잠든 아기 곁의 여성이 손을 떼는 순간 잠든 아기는 껍데기에 뒤덮여 산소 부족으로 숨을 쉬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연약한 아기를 살리려는 그녀의 한쪽 팔은 저리고 또 저려와 마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염없이 아기를 쳐다보며 기꺼이 마비를 버틴다, 견딘다, 이겨낸다, 살린다, 그리하여 둘은 그렇게 산다, 분명 살 것이다. 최소한 내가 본 드레이퍼의 'A water baby (1900)' 속 두 인물의 투명한 몸은 그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을 순백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성에게 '19호실' 은 다름 아닌 아기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내게 '19호실' 이란 결국 아이들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Herbert James Draper, Calypso's Isle


'칼립소의 섬' 은 어떨까.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향하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오디세우스.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된 신비의 섬 오기기아에 사는 바다의 님프인 칼립소.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섬에 붙잡아 두지만 결국 페넬로페를 향해 떠난 그를 향해, 망망대해를 등 지고 바라보는 칼립소가 보인다. 그녀의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하얀 등에서 쓸쓸함과 허망함이 묻어나는 것 같지만 한편 나는 무언의 홀가분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생각하고 만다. 칼립소는 틀렸다고. 화가의 시선은 편협하다고. 좀 더 허리를 피고 당당하게 바다를 노려보는 칼립소여야 했다고. 그대로 첨벙 들어가 헤엄이라도 치면서 떠난 오디세우스를 향해 조소를 퍼부으며 웃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칼립소는 오디세우스 따위와 매듭지어지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충분히 빛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음을. 그림 속 그녀는 좀 더 확실히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결속된 관계에서 오는 생활적 처절함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칼립소라서 평생 어떤 감정의 곡예들을 알 턱이 없겠지만.



반면,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의 수전과 매슈는 모두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처절함에 대해서. 고함치듯 서로에게 말하지만 않았을 뿐, 다만 생활의 부침 속에서 파생되는 절묘한 고통을 그들 나름대로 교묘하게 승화시켜냈을 뿐. 한 사람은 볼품없는 외도로 또 한 사람은 침묵과 고독과 이윽고 타나토스와 마주하는 19호실의 엔딩으로. 수전과 매슈는 자신들의 기혼 생활을 시험하고 돌보는 데 훌륭한 능력과 본분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빌어먹을 지성인들이었으니까. 물론 레싱이 표현한 대로 '지성의 실패'를 조용히 극 속에서 체감하면서도 모른 척하는데 탁월한 그들은 큰 다툼 없이 다시금 순순히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왜 아니겠는가. 서로에게 익명이 될 수 없는 존재의 그들 부부는 문제가 있을 수 없겠다. 왜냐하면 서로 무사해야 비로소 수혜자가 생길 테니까. 아이들은 절대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에. 아이라는 존재는 어른이 만든 형편없는 난장판 속에서도 절대적인 수혜자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 정도의 진지한 각오 없는 인간들의 매듭과 결실 앞에서 아이들의 존재만 결국 피해자가 되고 마는 형국은 여전하여 통탄할 노릇이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을 19호실의 수전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아이들은 기혼 시장 이후의 결실에 대한 수혜자여야 하지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하여 그녀가 19호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음을, 그것이 양쪽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였다는 걸 느끼고 만다. 물론 예의 없고 머저리 같은 매슈와 같은 배우자들은 알기 쉽지 않을 테지만.



Herbert James Draper, Halcyone, 1915


드레이퍼는 '알키오네'가 바다에 빠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것이었을까. 바람의 신인 아이올리스(Aeolus)의 딸인 알키오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라키스의 왕 케이스의 아내다. 항해에 나선 남편이 익사한 줄 모르고 매일같이 배우자를 위해 헤라의 신전에 가 기도를 올렸다지. 이를 불쌍히 여긴 헤라 여신이 꿈의 신 모르페우스를 보내 남편의 죽음을 꿈에서 알려준다. 잠에서 깨어난 알키오네는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런데 시커먼 물체가 파도에 떠밀려 오길래 보았더니 남편 케익스의 시체였다는 것.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이를 불쌍히 여긴 신들은 그녀를 물총새로 만들어 버렸다 하는. 나로서는 좀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이 들리는 신화였지만 최소한 그림 속 알키오네는 (Halcyone, 1915) 그러지 않았음 싶었다.



바위에 선 채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 같은 바람을 만끽하 듯한 딱 그 모습대로, 꼿꼿하고 당당하게 자신으로 살아가길 감히 바랐다. 알키오네 주변의 님프들과도 뻔뻔하지만 도란도란 활력적인 수다를 즐길 줄 아는 호기로움을 발산할 것을. 필요하다면 바다에 첨벙 들어가 혼자 유유히 헤엄쳐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그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기를 바란다. 사랑도 적당한 거리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 거리조차 있을 틈 없이 숨 막히게 만드는 여러 생활적 현상들에서 오는 갑갑함을 알키오네가 정녕 알고도 물에 뛰어들었다면, 그렇게 형편없는 엔딩을 연출할 것이 아니라, 그녀는 반드시 더 과감한 다른 차선을 택했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향한 최소한이자 최선의 예의일지도 모르니까.



Herbert James Draper, A Young Girl by a Pool


화장실 청소, 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처리, 잡초 뽑기, 식재료 관리, 기본적 청소와 빨래, 계절 별 냉장고, 옷장, 침구 정리, 생필품 재고 관리, 재정 관리, 명절 및 댁내 대소사 이벤트 챙김, 자녀 돌봄과 양육, 기타 놀이 및 교육 전반 챙김, 하원을 비롯한 하루치 원사이클의 대부분. 가사 살림 일체, 동시에 커리어 지켜내기와 그리하여 마이크로하게 쪼개어 활용해야 겨우 만들어지는 시간관리는 언젠가부터 내 인생의 디폴트 값이 되었다. 에어컨은 출장 수리를 확인받았음에도 몇 시간이 지나서 다시금 기어코 냉방이 되지 않은 상태. 그리하여 며칠을 연달아 점심시간을 쪼개어 회사와 집을 종종거리며 오가는 중이다. 작은방 형광등은 기절 직전,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망해버린 형광등은 한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영리하게 밀려나면 대신 다른 한 사람의 차지가 된다.



늘 반복되는 패턴과 그것에 이미 익숙해진 인간의 리소스 투입률은 나머지 3인을 향하는 헌신과 애정이라는 공헌이익으로 과대 포장된 채 이미 고갈상태임에도 에너지를 끌어 모아 과다 투입됨을 기꺼이 자처한다. 그러다 밀려오는 환멸을 애써 지우려 하다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져 신음한 채, 도리스 레싱의 19호실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겠다. 그야말로 '19호실로 갈까'라는, 절벽으로 서서히 내몰리는 중인 한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탄생되다가도 이내 우선순위에서 사그라진다. 생활은 계속돼야 하기에.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쇼는 끊김 없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엔딩 직전까지는.



좋은 결혼이란 무릇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연기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다고 했던가. (사랑은 왜 아픈가, p 79) 에바 일루즈의 그 생각에 기대어 생각하자면 나는 그 연기 연출이 상당수 충만하기에 이 생활을 꽤 잘 유지하고 있는 중이겠다고 스스로 경탄과 탄식을 오고 가며 의식을 무장시키곤 한다. 그러나 한편 자조와 환멸을 자주 느끼고 마니,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는 인간의 연기력은 정말이지 바닥이라 이런 배우도 참 없겠지 싶다. 일상생활의 합리화가 개인에게는 자꾸만 실망과 좌절을 낳을 때. 그이의 몸 사림과 책무의 우선순위가 사실은 옹졸하고 가증스럽스럽게 느껴질 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통탄하며 기어코 장모를 딸 가진 죄인으로 만들어 한 여성의 시간은 여전히도 손주들에게 저당 잡혀야 할 때. 잘 자고 잘 먹는 남편과 달리 불면에 시달리는 아내를 비교할 때. 그럼에도 아픈 배우자를 연민하고 걱정하고 그리하여 내내 신경 쓰고 그것이 결국 사랑이라는 걸 자각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당신의 성품과 사랑을 의심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증오할 때. 그로 인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이르게 될 때. 무언가 분하고 또 분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쥔 채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부유하는 생각은 점점 선명해져서 곤란한 결심을 끝내 떨치지 못하고 만다.



포기할 결심. 1인칭인 '나'는 산뜻하지만 '너'를 포함한 3인칭은 섬뜩할 수 있을. 아직 그럴 리 없고 아마도 그럴 수 없고 끝까지 그러지 않겠지만. 반대로 그럴 리 없다고도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실존적 인간이라서. '헤어질 결심'의 서래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끝내 헤매다 선택한 그 엔딩과 또한 19호실에서 수전이 만들어 낸 엔딩은 내게 아직까지 단연코 무효하겠으나, 다만 이렇게 선언할 수 있겠다. 때가 되면 나를 옥죄고 말았던 어떤 것들은 과감히 포기할 것이라고. 대신 익명으로 존재할 자유를 반드시 내게 허락하겠노라고. 매듭과 굴레에서 탈피한 인간의 익명성을 가감 없이 과시하겠노라고. 무엇이든 포기해도 아무 영향 끼치지 않을 무해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인지, 오기는 하는 것인지를 궁금해한 채. 그리하여 내내 자문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19호실로 갈까라고. 19호실에서조차 완벽히 해방될 수 없는 인간임에도 그곳에서만큼은 과분하고 과감한 홀가분함으로 인해 생경한 나를. 사실은 보고 싶노라고. 때가 되면. 언젠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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