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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7. 2017

#49. 믿음의 깊이

당신은 얼마나 '나'를 믿고 있나요 

 흔히 일희일비하지 말라 한다. 

그러나 소원하는 무언가를 향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간절한 만큼 흔들렸다. 원하는 걸 향해 달려 나가다 벽에 부딪히고 해내지 못했을 때. 실패라는 쓴 경험이 더해지고 쌓아질수록 사실은 지쳐만 갔다. 사람 관계도. 원하는 대로 바라는 소망도. 결국 성취되지 못했을 때엔 더욱 지쳐만 갔다. 모든 게 싫증이 나고 만사가 귀찮았다. 일희일비하고 팔랑팔랑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매기를 반복했었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의 20대의 끝자락과 30세의 시작은 그랬다. 가장 예쁘고 찬란한 듯 보였으나 사실은 가장 흔들렸던 시간들. 여러 역할들이 주어지니 더욱 무겁기만 한 나날들이 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친구. 동료. 선배. 내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에 고맙지만, 사실 때론 버거워서 벗어버리고만 싶어 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만이 아닐 게다. 


 그럴 때 하나 둘 사부작사부작 단어를 적고 그 단어와 단어들이 만나서 문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가 어느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글을 쓰다가도 문득 당연한 감정들이 하나 둘 흔들리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요즘엔 에세이를 쓰다 보니 더욱 그런 기분이 반복된다. 


마음과 감정이 갈피를 못 잡을 땐 잠시 모든게 정지다. 


 과거를 추억해 내는 글을 쓰다간 그 지나간 과거의 나만 아는 명대사 명장면들이 너무 선명하게 생각이 나서. 다시 되돌리기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흔들리는 걸까. 되돌아가고 싶어서.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뚜렷한 답을 낼 수도, 아니 내려고도 사실하지 않는다. 그저 흔들리는 감정조차도 그대로 인정하려 들뿐. 내가 터득한 방법은 바로 '인정'. 받아들임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분에 휩싸이면 중심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이게 나의 욕망인지 아닌지 내 마음의 중심을 은연중에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일종의 나만의 방법인데 어쩌면 이게 나를 '객관화'해 나가는 일종의 명상 수행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깨달아 가는 걸까. 여전히 물음표다. 잘 모르겠다 


 이 지나가는 생각이, 혹은 잠시 멈춰서 내내 나를 붙잡고 있는 생각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을 나의 것처럼 착각하는 것인지. 그럴 때마다 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아주 강렬하게 끌리는 마음을 선택한다. 


완전한 어둠에도 오히려 아주 선명한 뭔가에 이끌리는 때가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 때론 끌리는 법처럼..


 선택에 후회를 해도. 일단 선택을 하고 본다. 
해야 뭐든 마법도 일어나는 법이라면서... 


 서른의 중간을 흘러가고 있는 나는 이제 그렇게 변한 듯싶다. 

때론 될 대로 되라는 막무가내 정신이 강해지다가도.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유한하다는 생각이 더 선명해지곤 한다. 고작 인생의 1/3 정도도 채 살지 않은 듯 하나 그간 작고 큰 사건들은 매년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그 덕분에 이 글을 쓰고 난 다음 1시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테니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묘하게 설레고 긴장이 어리곤 한다. 한편으론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올해 겨울이다. 시간의 유한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유로운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힘든 것인지를 더 간절히 알게 되어서. 


 아이들을 재우고 밤 8시가 지나면 빨래를 돌린다. 아랫집에겐 미안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상의 소란스러움이 밤에 시작이 된다. 집안 정리를 끝내고 내일 새벽의 도시락 찬거리들을 준비해 두고. 노트북을 켠다. 그러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의 일들. 어제의 일들. 과거의 일들. 그리고 바라고 또 바라는 내일의 장면들. 그 모든 것들이 중구난방으로 꼬리를 물고 나가다가 나는 어느새 작고 크게 흔들리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들여다본다. 믿음의 깊이를. 내가 원하는 최종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행복과 퇴사가 익숙한 시대.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와 온갖 자기계발, 미사여구 등등의 키워드가 이제는 참 자연스러운 시대인 듯하다.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는 진정한 내 삶의 가치를 향해 움직이는 용기는 부족한 건 아닐까. 문득 나 자신부터 되돌아본다. 


나를 조용히 되돌아보는 시간은 대부분 '밤'이다. 그래서 밤이 참 좋다. 특히 겨울밤은...지나가는게 아쉬울 정도다.


 여전히 바라는 것에 자기검열을 하고 나를 숨기는 데 익숙한 나를 발견하면 더욱 그렇다. 낮이 뜨거워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럴 때마다 소란스러운 마음과 감정을 진정시켜 내기 위해 뭔가를 사부작사부작 적어 내리곤 한다. 이 또한 다행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최고의 정화 도구이니까. 글을 쓴다는 게 이제 내게는 공기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걸 지 모르겠다. (아니면 강박일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든 어떤 길로 가든 말이다. 
내가 한 오늘의 선택이 완전하다는 자뻑정신도 때론 필요할 듯싶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게 다가올지도 모를 테다. 운이라는 그 녀석이... 


12월이 다가오려 한다. 그리고 올해도 이제 딱 한 달 남았다. 뭔가 아쉽다. 아쉬우니 미련이 남는다. 아직 보지 않은, 다가오지 않은 행운을. 운을. 여전히 기다린다. 그래서 상상이 점점 진해지는 요즘. 11월의 지나가는 겨울이다. 


 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는 욕심쟁이의 삶을 흘러가 보고 있다. 

누군가에겐 내가 행운을 가득 짊어지며 살아가는 여자로 보일 테지만, 여전히 나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브이질이라도 해대고 싶지만, 홀가분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 그래도 연습하다보면 어느새 하고 있지 않을까. 럭키-라며 어느새 웃고 있는 언젠가의 나처럼..


그 다가오지 않은 최고의 순간을 여전히 기다리며 오늘을 지내본다. 오늘이란 24시간이 이제 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이란 요즘 내게 참 아쉬운 존재다. 그럴수록 믿음에도 더 깊이가 생기는 듯싶다. 유한해서. 이미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인 걸까. 


완전한 믿음의 깊이 위에서 초연해지고 싶어 지는 겨울밤이다. 

겨울만 되면 유독 상상하는 버릇이 진해진다. 눈을 감고 그렇게 상상에 빠진다. 이제 행운이 움직여졌다고. 내게 배달되고 있는 중이라며. 그렇게 다시 꿈을 꾼다. 밤은 점점 더 깊어진다. 아이들의 쌔근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단지 내 마음의 목소리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어렵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믿고 싶다. 그래서 믿어 본다. 가감없이.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그렇게 믿음이 좀 더 단단해졌으면 한다. 여전히 나약한 나를 이젠 제법 알고 있어서. 그럴수록 마음은 요란스럽게 뛰어댄다.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린다. 마음의 목소리가 나를 찾아오는 순간이다. 


마음의 목소리가 선명해지는 시간. 
어느새 믿음의 깊이에 힘이 생기는 순간이다. 


당신의 목소리도 좀 더 선명하기를. 진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우리들의 믿음의 깊이가 생기는 순간에 우리가 함께이기를. 이 문장이 닿는 순간. 마음이 연결되면 우리는 이미 함께임도 믿어 보는 지금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여전히 마음에 자라나고 있다. 고마운 햇빛과 미안한 슬픔이 공존하는 나의 나무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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