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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8. 2017

#50. 에세이 쓰는 시간

생일 밤에 조용히 쓰는 에세이의 맛


아이를 낳고 나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부터 짧게나마 육아기록을 남겨두었다.

일기라고 하기엔 좀 모자란 듯한.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온갖 감정들이 벅차오를 때 그저 그 매 순간을 담아내고 싶어서 무작정 쓰기 시작한 기록들. 1년 전의 육아 다이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나의 쌍둥이들의 자라남이 보이는 동시에 나도 한 살을 더 먹게 되는 세 사람이 동시에 다시 태어나고 자라는 성장일기가 되어준 셈이다.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매거진을 펼쳐냈을 때. 그리고 어느새 고마운 인연이 다가와 정말 출간을 해 낼 의지로 좀 더 정교하게 이야기를 다듬어 내는 시간들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올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11월 28일. 나의 생일날에도 변함없이 에세이는 써지고 있다.

모든 게 특별할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저 흘러가는 과거에 지나지 않을 평범한 일상의 기록들이다. 사실 에세이라는 게 어찌 보면 별거 없는 일상의 흐름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보고 느낀 개인 특유의 단상을 적어 내린 이야기의 집합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게 글쓰기는 고통스러울 때 자기연민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수가 많은데,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좀 더 객관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연습을 하며 이성을 되찾아오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하얀 공간에 뭐라도 적는 그 맛이 쏠쏠하니 참 좋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이 섞여 버린 미움도 어느새 ‘그래. 그땐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마음. 사물을 사람을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어쩌면 글 쓰는 것의 힘일지 모르겠다. 특히나 자기 안의 흘러가는 이야기를 다시 글을 통해 새로운 해석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 바로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법 하지만 사실은 읽는 이들이 ‘이거 무슨 말인지 너무 알겠어, 나도 그랬는데. 나도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주시면 더 기쁠 것 같다.


 내게 지금의 에세이 작업도 그런 소망과 소원으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밤 10시가 되어 가는 사무실 한편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려보고 있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이상하게 설레기마저 한다. 오늘이 아마도 생일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여전히 나의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래서 좀 힘들다. 책 한 권을 만든다는 건, 지금의 감정을 고스란히 떠 앉은 채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켜 나가는 작업이니까. 첫 번째 책은 경제 에세이여서 그랬는지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굉장히 이성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번 에세이는 이상하게 우울감에 시달리는 때가 많아졌다. 마치 그동안 스위치를 내려놓았던 온갖 날 선 감정과 감각들이 다시 나를 찾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존재하고 있는데 마치 존재하지 않은 듯한 유령이 된 느낌은 뭘까. 가끔 요즘은 그런 감정에 휩싸인다. 없어지는 느낌..


글이 의외로 잘 써지는 시간이 있다.

가령 아플 때. 마음이 혹은 몸이 정말 아플 때 이상하게 글감이나 쓰고 싶은 문장이 어리석게도 잘 생각이 난다. 그래서 그대로 쓰고 만다. 쉬지 않은 채. 어쩌면 이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 보겠다는 요즘의 '변화'를 향한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얕은 슬픔과 아픔이 잠시 마음에서 가라앉고 문제로 느껴지는 감정의 허물이 없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사실 그 자체의 기쁨은 길게 가지 않는다. 여전히 삶을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고 다시 감정은 나를 찾아오니까. 다행인 건 그럴 때 더 이상은 예전처럼 좌절하지 않고 싶었나 보다. 다만 그저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뿐. 단지 그뿐이라면서.


서른넷에 다시 쓰기 시작한 지금 삶의 이야기는
어쩌면 다시 해석해서 재탄생되는, 내 삶의 또 다른 성장일기일지 모르겠다.


에세이를 쓰면서 '용기'라는 단어를 참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용기가 있어야 일단 내 안의 모든 추악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되도록 가감 없이 거칠지만 날것의 그대로를 있는 대로 적어내릴 수 있는 요즘이다. 그리고 동시에 에세이를 쓰고 있는 동안엔 문득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정말 변하기도 하고 때론 참 무딜 정도로 변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우리들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삶에 많은 역할극을 하는 기분이 든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역할극을 수행하며 살아내고 있다. 그 역할극들이 이야기로 다시 재탄생되는 순간, 해석도 달리 될 수 있다. 읽히는 시점에 따라. 읽는 사람에 따라 지금 그곳 당신의 현재에서 이 이야기는 어떻게 느껴질까. 그 상상을 하면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면 이상하게 좀 더 진정 어린 진심과 마음을 담아낼 '용기'가 샘솟는 느낌이 든다.


결혼을 한 기혼자들이라면 좀 더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다.

결혼 이후에 내가 더욱 진하게 경험해야 했던 역할 덕분에 나는 아팠고 또 성장과 배움도 함께 공존했다. 결혼을 한 만큼, 그만큼의 몫을 해내고 있는 요즘 이어서일까. 경험 물이 쌓이는 만큼 글의 문장과 단어도. 그 안에 담겨있는 생각도 깊이가 얕았다가도 깊어지고 진해지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보니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는 순간도 사실 자주 왔다.

사실 요새 에세이를 쓰다 과거 이야기를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어느새 글을 쓰다가 과거로 다시 도망쳐 있는 내가 보인다. 그래서 흠칫 놀라기도 한다. 혼자였던 나로. 그래서 엉뚱한 생각도 참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 그래도 싫지 않다.


나만 알고 있는 슬픔도 설렘도 기쁨도,
그저 담아내고 적어내릴 수 있는 시간에 고맙다


물론 좋지 않은 감정에서 쏟아낸 이야기들은 한 단어 한 문장이 흑의 기운으로 다소 가득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걸 내가 썼나 싶을 정도의 것들도 있다 (나중에 소설 글감으론 퍼펙트할 듯싶다. 다크함과 퇴폐미가 가히 어마 무시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험과 깨달음이 묻어난 삶을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삶을 다시 현재로 가지고 와서 글로 재탄생시키고 다시 해석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도 만들어 주는 에세이 쓰는 시간이 그저 고맙게만 느껴진다.


같은 밤이고 같은 하늘이고 같은 도시인데도, 비행기안에서 내려다 보는 게 또 다른 설렘과 해석이 되는 것 처럼...


요즘, 그래서 에세이 쓰는 기쁨에 취하면서 동시에 얕은 알 수 없는 우울감을 동시에 맛보고 있다. 자꾸 바뀌게 되는 한 문장에 담긴 감정들이. 기쁘다가 괴롭고... 그런데 이것에 솔직할 수 있는 게 바로 에세이 쓰는 시간에 내가 진짜 내 마음을 돌아 보고 기억을 다시 새롭게 정화시키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기쁘지 않은데 기쁜 척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내 감정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섞여 이상하게 해석될까 봐 항상 조바심을 냈고 눈치를 봤고 매우 긴장하며 조심했었다. 나를 감추며 살았었다. 지금도 다 드러내진 않았으나 최소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올해는, 내 감정표현에 솔직해질 수 있어서 자유롭다.


자유롭게. 좀 더 자유를 만끽하며 써 내려가고 싶은 오늘이 좀 더 특별한 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지금 덕분에 아닐까 문득 생각해 본다.


당신도, 당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를.
누가 알까. 시작하는 순간 또 다른 기적이 찾아오고 있을지도 모를 테고 말이다.





생일 축하해. 헤븐. 아직 멋지게. 여전히 잘 해내주고 있는 오늘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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