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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9. 2017

#51. 미친년이 잘 산다.

삶에 궁극적 플러스가 될 수 있다면, 미친 선택도 정상이고 나쁘지 않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지?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중간이 있을까 라는 생각. 중간이 있기는 한 걸까. 나 자신만 보아도 때에 따라서 정상인 것 같다가 돌연 비정상적인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으니까. 가령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자세로 허리를 곧게 핀 채 책상에서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다가도, 어느새 흘러나오는 귓가의 음악의 가사 덕분에 갑자기 노래를 따라 미친년처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돌연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니까. 누가 봐도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아니 그렇게 일단 믿는다. 심장이 안정적으로 뛰고 있었고 들숨과 날숨도 큰 파장 없이 잘 쉬고 있으며, 여전히 내가 해야 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눈 앞에 닥친 일들을 여전히 묵묵히 하고 있으니까. 


사실 정상과 비정상을 정의한다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엔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도 사실 그 속에 들어있는 은밀하고 어두운 내면은 눈에 절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고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구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아니 구분해 내는 게 우스워도 보인다. 


사실 이미 비정상적인 것들이 정상인 것 마냥 활개 치고 다니는 세상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건 아닐지. 그래서 우리는 그런 세상에 적응해 내기 위해 그저 마음에 정상과 비정상을 동시에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그냥 약한 단 한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그러니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지,
단편적인 보이는 것으로 타인을 쉽게 평가하는 것이 좀 아쉽다.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월급 받고 항상 똑같은 잡담을 나누고 주제로 회의를 하는 생활에 만족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학습된 반복에 익숙함을 느끼고 적응을 하다 보면 그것에 빠져서 자각하기 전까지는 쉽게 변하려 들지 않으니. 그리고 그 생활이 수년 아니 수십 년간 똑같이 반복될 거란 생각이 없다면 그저 미래도 반복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난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문득 숨이 막힌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익숙함에서 나오려고 하는 요즘의 움직임은 그 생각이 마음 한편에 숨어서 자꾸 내게 말을 걸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거울 속의 내가 내게 묻곤 한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도 대답을 알지는 못한다. 나는 내 손이 써 내려간 오늘의 문장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강한 파도가 솟구쳐 올라 곧장 심장으로 흘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용기 결단 안도감 뿌듯함의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나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응? 


누구나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막 그런 삶에 재미를 붙였다. 이제 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정말 아무도 없다. 삶을 살아가면서 선택을 나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어른이라면 내가 한 그 선택에도 무거운 책임도 함께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책임이라는 단어를 가끔은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고 싶어서 우울함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 사실 가끔 여전히 우울하지만 그건 그냥 생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전혀 우울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낫고 있는 걸까. 


사실은 정상에서 때론 건강하게 벗어나 보고 싶다가도 여전히 자기검열에 빠지면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에도 마음엔 살아 숨 쉰다. 


스파크가 활활 불타오르는 게 매일 지속되지 않겠지만, 그 타 오르는 반짝이는 그 순간이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때론 미친년인 채 세상을 살아가 보고 싶다고. 

겉으로 정상으로 보이나 마음엔 따뜻하고 때론 뜨거운 설렘과 몰입과 영감을 해 낼 수 있는 반 미친 상태의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듬뿍 담아내어 몰입할 줄 아는 미친년. 


미친년이 잘 산다. 특히 사랑할 줄 아는 미친년들은 기쁠 줄 안다. 
그러니 그녀들은 이미 꽤 행복할 테다. 


삶이란 둘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극단적이긴 하나, 때론 미친년의 신나는 모험을 하거나 때론 정상으로 사회가 규정한 틀에서 편안하게 살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거나. 모두 다 뭐가 좋고 나쁜 건 없을 테다. 다만 지금 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미친년의 신나는 모험을 선택할 요즘의 나다. 


나는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여전히 궁상맞게 느껴져 옷소매로 눈물을 쓱 닦곤 한다. 울지 말라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라고 가르치던가요라고 반박도 해 보는. 자기 목소리가 여전히 상냥하면서도 굳건히 살아있는 미친년이 더 돼보고 싶은 11월이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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