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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06. 2017

#52. 기억이 사라질 때

기억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는 반증이겠죠. 

 오직 두 사람만 아는 기억이 있다.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두 사람만이 평행하게 유지할 수 있기에.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이 기억을 잃고 한 사람만 그 기억을 생각해 낸다면, 기억하는 한 사람과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 되어 버렸다. 내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 버린 밤 때문이었다. 


 사실 기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딱히 없다. 

 그러나 요즘 들어 잦은 건망증이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고 있는 덕분에 이상하게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이 강해지면 공포로 변한다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만 요새 가끔 희미하게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단 몇 분 전에 말했던 한마디를 기억하지 못해서 다시 물어보는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옆에서 한 소리씩 듣곤 한다. 


“정신을 딴 데 쏟고 다니니까 그렇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어제만 해도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집 된장 통이 냉장고에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일주일이 지나서 없어진 걸 깨닫고 오밤중임에도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혹시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머니 혹시 이번에 올라오셨을 때 된장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어요?”
“응? 된장 필요하니? 나 가져간 적 없는데?”
“아….. 네 가져오신 줄 알았어요…. 오밤중에 죄송해요 어머니”
“그래 다음에 갈 때 가져가마”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친정엄마가 대뜸 버럭 하며 건넨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너 내가 치매 걸린 줄 알았지? 내가 미쳤다고 된장 들은 통도 구분 못해? 네가 잘못 기억한 거잖아. 너 정말 병원 좀 가봐. 애 엄마가 정신을 딴 데다 두고 다니니까 그렇지”
“미안….. 미안해 분명 있었는데...  된장 담긴 통, 진짜 여기서 봤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텀블러에 물을 먹다가 그만 입을 데일 뻔했다. 분명 차가운 물을 떠 왔다고 생각했는데 뜨거운 물이었었다. 치약을 손에 들고 치약이 어디 있는지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왼손에 들려진 치약을 보고 괜히 쓴웃음을 지었었다. 쌍둥이들의 등원 준비에 분주하게 도시락을 준비하고 청소기를 돌리려고 작은 방에 들어가던 중에 뭘 가지러 갔었지 잠시 고민하다가 ‘아 청소기’ 하고 청소기를 꺼내 가지고 온다. 가계부를 정리하려고 노트북 속 엑셀 파일을 연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원고가 들어가 있는 워드 파일을 열고 어느새 글을 읽고 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 이상한 허전함을 느끼다가 그제야 가계부 생각에 다시 엑셀 파일을 연다. 점심 약속이 있었지만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11시 50분까지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고 있었다. 톡으로 독촉 메시지가 오기 전까지는. 


 이런 날들의 연속은 요 몇 달간 꽤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큰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이런 건망증들 덕분에 몸이 좀 더 부지런해졌고, 생각은 의외로 단순해졌다는 것 정도. 


어떤 장면이 들어가 있었는 지 알아내지 못할 때, 답답함은 순간이지만 뭐 괜찮다. 새로 채워 나가면 그만일 테니까...


 최근에 한 건강검진에서 큰 이상은 없었다. 

 뇌에도 심장에도 뚜렷할 만한 문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분명 그렇다고 했다. 물론 정밀 검사를 해 보지 않았기에 의학적으로 발견된 증상은 아직까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상하게 병원에 가기가 싫어지기도 했다. 가서 무슨 소리라도 듣게 되면 정말 못 견딜 거 같아서 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 보다가 애써 멈췄다.  


 가뜩이나 상상을 현실로 끌어 오는 걸 즐기곤 하는데 되도록 비극의 상상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겨우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으니..


 아직 나의 상상은 반드시 소설에 그쳐야 한다.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최근에 떨어진 단편소설 공모전의 여주인공을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설정했었다. 

 그 캐릭터에 너무 몰두한 탓일 것이다. 여주와 나를 일심동체 시킨 탓에 심하게 몰입해서 그랬던 거라고. 아직 너무나도 서투른 초보 작가인 나는 허구의 캐릭터와 현실의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잠시 헤맸었던 탓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입선이라도 했으면 덜 억울할 텐데 사실 좀 억울하다. 

 그래서 슬픔도 밀려왔다. 어제 된장 통 사건이 있고 나서는 더더욱. 그러나 울진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울면 정말 내가 그 여주인공이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나는 끝까지 눈물샘의 한 끗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막고 있었다. 더군다나 친정 엄마 앞에서 울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울었다면 엄마는 정말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엄청난 걱정과 동시에 퍼부어대는 1절부터 4절까지의 잔소리를 감당해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대신 잠든 아이들을 보며 단숨에 마음을 가라앉혀냈다. 잠에 푹 빠진 아기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언제나 내겐 특효약이자 만능 처방전이다.  



 일상의 사소한 기억들의 사라짐이 조금씩 쌓일수록 요즘은 이상하게 불안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 불안 덕에 동시에 무기도 단단해졌다. 메모하는 힘이 더 길러졌고 반대로 작은 소소한 것들을 기억해 내기도 한다. 


일상의 잃어버려도 괜찮을법한 작은 기억은 자주 잃어버리게 되었다. 
반대로 잃고 싶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들은 신기하게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고마운 다행이다. 


너무 기억해서 때로 탈일 뿐인 과거의 기억이 이상하게도 여전히 고스란히 마음에 살아 있다. 


마음 속에 영사기가 하나 있다. 지칠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기억은 그렇게 다시 현실에서 재생된다.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요즘은....


다이어리에 오늘의 문장들을 적어 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곤 노란색 포스티 잇 한 장을 떼 내어 1번부터 3번까지 번호를 적으며 ‘오늘의 todo list’를 간단한 단어들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처럼 적어서 노트북 위에 붙였다. 이렇게도 작업을 해내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 시작의 마음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내년의 다이어리는 특별히 2개를 장만해냈다.

 한 권은 생일 선물로 미리 받은 기념 삼아 필사와 상상 노트로, 한 권은 매일/매주/올해의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질 일기장으로 삼으려 한다. 두 개의 다이어리와 함께 흘러내려갈 2018년이 기대되면서, 사실은 붙잡고 싶어 지는 마음이 강한 요즘이다. 


 올해, 일상 속에서 잦게 사라지는 사소한의 기억들도 좀 붙잡고 살아야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라지는 기억들 속에서도 내가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쓰는 일, 그리고 최대한 기억해 내는 일, 문득 사라진 기억에 깜짝깜짝 놀라는 마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일. 그리고 정말 기억하고 싶은 시간들은 마음에 담아 두어 힘들 때 꺼내어 보며 웃는 일. 단지 그뿐일 테니까. 


기억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괜찮다. 



헤묵은 과거의 추억들은 사실 현재의 기억들 덕분에 존재하는 것일테니, 현재의 기억들이 좀 더 기뻤으면 좋겠어. 꺼내보는 추억들이 아프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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