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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08. 2017

#53. 페미니즘은 모르겠지만요.

프로 불편러가 되어가는 중인 듯합니다. 하하하 

 여자는 젊고 이뻐야 하며 167cm 에 48kg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끄덕'하며 나도 모르게 인정하게 되는 남자 사람 동물과 같이 일하고 있는 느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요 일주일, 대수롭지 않게 주고받은 일터에서의 대화들이 불편해서, 그 불편한 기운을 떨쳐내는 데 요즘은 곧잘 시간이 걸린다. 


상황 하나) 점심을 먹으러 지하 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대기하면서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물어봤다. 키가 몇이냐고. 작은 편은 아니고 오히려 나보다 작은 남자 직원분들이 가끔 불편(?) 함을 느끼곤 하니 그 질문은 내게 이젠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제가 좀 크죠. "168cm입니다."
"우리 와이프가 170인데, 더 커 보이네"
"작은 체구가 아니라 좀 더 커 보이나 봐요 (알게 뭐냐 당신 와이프의 키에 대해서) "
"그 정도면 날씬하고 훌륭한 거지."


 자. 여기서부터 대화가 꼬이기(?) 시작한 걸 지 모른다. 여전히 대수롭지 않았지만 불편함의 한 수는 순식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50kg 도 안 될 것 같은데 뭐. 우리 와이프는 70kg 육박하는데. 내 주위에 아줌마들 다 그래. 80kg 도 있다니까. 살만 쪄 가지곤..."


   '살만 쪄가지곤'이라는 말에 뚜껑은 이미 열렸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아내와 주변 여자들을 단지 비주얼적인 몸매로 그 가치를 메 김해 버리는, 그 한없이 가벼운 어리석음과 바보 같음에 이상한 치가 떨렸다. 당신의 아내들과 당신 주변에 보인다는 그 '아줌마'들이 고단한 육아와 며느라기로서의 시월드의 견딤과 동시에 '그런 생각을 가지며 사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아끼고 또 아끼며 대한민국 평균 4인 가족의 가정생활의 팍팍하게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탓에 삶의 유일한 달콤함을 어쩔 수 없이 야식이라는 대체제로 만족하게 된 탓에 붙은 고귀할 법한 살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를 감히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물을 가치조차 별로 없어 보여서. 아니 솔직히 나도 한순간 못났어서.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이기를 바라는 나여서. 그 아름다움의 기준에 몸무게의 숫자가 주는 가치가 적지 않았던 나였어서. 최소한 70kg가 된 적은 아기 둘 동시에 임신했을 때를 제외하곤 맛보지 못한 터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렸던 나였으니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가부장적인 폐해와 악습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자라온 탓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다를 테다. 나의 그 직장 동료 같은 남편이 흔한 건 아니겠지만 또 흔하기도 할지 모를 법이다. 다만 그런 발언을 자연스레 하는 남편과 살아오신 탓에 그 결혼생활의 고단함은 어느새 '살'이라는 것으로 안타깝지만 그녀에게 돌아갔던 것은 아닐까요 라고, 감히 마음속의 말을 모조리 배출해 내지 못했다. 내게 그럴 자격은 없으니까. 다만 그 '살과 몸무게' 발언에 던져진 공에 스매싱 한방을 제대로 죽방을 날리고 싶었던 걸까. 이상하게 마음에서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던 탓에 한마디 기어코 던져주고 말았다. 


"날씬하면 정상이고 70kg 이 넘으면 여자든 아내든 사람 취급 못 받는 거죠? 하긴 남자든 여자든 과체중은 위험하죠. 물론 비리비리한 저체중의 남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좋든 싫든 정 붙이고 살 붙이며 살고 있는 '내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어느새 타인 앞에서 내 사람을 자연스럽게 까고 있는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스스로 비극일지 그는 모르는 듯했다. 아마 평생 모를 것 같다. 
사람의 인성과 인품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드러나기 마련일 테니



상황 둘) 호의가 어이없음으로 다가온 순간 

 나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주시곤 하는 일터의 최애 아이템이자 단짠의 디저트에 극강의 한방을 점찍어 주시는 사랑하는 몽쉘통통 6개들이 한 상자를 선물 받았다.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고자 자리에 있는 팀원 몇몇에게 돌리고 바로 뒤에 앉아 있었던 그에게 건넸다. 


"드시면서 일하세요" 
"아. 고마워요. 역시... 여자는 애교지"  


 자, 여기서 또 대화가 꼬이기 시작할 법한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아차 싶었다. 이젠 뭐 자연스럽긴 하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글을 쓰면서도 웃기면서도 안습이다. 


"아니, 우리 와이프는 애교가 없어요." 
"몽쉘통통과 애교가 무슨 상관이죠?" (진짜 무슨 상관일까? 궁금해졌다. ) 
"아니 그렇다고..."


 뭐가 그렇다는 건지 사실 모르지 않았지만 모르고 싶었다. 

 당신의 와이프보다 10살은 젊었고, 어린 아가 둘 달고 사는 워킹맘이지만 그의 눈에는 167cm 에 50kg 정도밖에 안 나가 보이는 그 양반 주위에 보이는 여자들 대비 상대적으로 (그래 어디까지나 정말 상대적으로) 옷도 잘 갖춰 입고 다니고 화장도 할 줄 알며 무엇보다도 대화에 밀리지 않고 곧잘 웃으며 맞받아쳐내는(?) 화법을 지닌 여직원이 몽쉘통통을 가져다 주니 그것이 호의이며 잘 대해 주는 애교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라고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손가락이 이상하게 어이가 또 없어지려고 한다. 돌아와 어이야~) 


 여전히 가만히 넘기면 그만 이었겠지만 이상하게 또 불편함이 밀려오던 탓에 웃으며 한마디를 곱게 선사해 드렸다. 


"어머나. 애교에도 성(姓)이 있었군요. 전 몰랐네요. 남자도 애교 있으면 좋죠. 아마 사모님도 아쉬우시겠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소음이며 짜증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는 순간은 순식간이겠다. 

 그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대수롭지 않은 말들로 인해 이미 현시하고 있는 바보 같은 증거를 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소한 대화를 나눠도 단어의 선택과 목소리, 화법의 태도와 표정에서 그 사람의 인품과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안타깝지만 그는 이미 내 세계관에서 아웃이다. '딱 그 정도의 사람'에 그친다. 


이렇게 사람 가리는 나도 못날 법 하지만, 낸들 어쩔 수 없다.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모든 선택엔 책임이 따른다지만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는 걸 사전에 선택하면서 태어나는 사람은 인류의 역사 상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그 남자와 여자들이 공존하는 이 사회가 알게 모르게 바라고 있으며, 또 남자들의 속내가 진짜 원할법한 사랑받고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 설정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함이 좀 더 눈에 띄게 보이는 요즘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여전히 직시하지 않은 채 살다 보면
이미 익숙함이라는 타성에 젖어든 채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 악습의 시작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우리들의 가상세계, 인터넷과 모바일에선 지금도 실시한으로 모의 강간이 진행 중인 세상일 테다. 소라넷과 텀블러라는 곳에서는 미성년 자건 성년이건 여성이라는 성을 타깃으로 수많은 예비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며 차마 입에 넣기 싫어지는 사건들에 변태적인 호응과 지지를 얻는다. 


 물론 문제적 인간은 남자뿐은 아닐지 모른다. 아주 자연스럽게 역할대행 데이트 서비스에 '돈'이라는 가치를 매기는 사회가 되었다. 일을 하고 있다가 친한 남자 후배 동료가 웃으라고 보내준 사진에, 그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이런 사회 현상에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웃음 대신 걸쭉한 한마디를 내뱉고 마는 지랄 맞은 내가 있을 뿐이었다. 


"썅년 위에 개자식 있기도 마련이겠지. 사람 위에 돈 있다 생각하는 썩은 생각에 할 말이 없다. 


그에겐 미안하나, 나는 그처럼 웃으며 넘길 수만은 없었다. 이런 썩을......167에 48에 지적세련스타일....은 누가 정의내린거죠.  


 여성들은 이미 불안하고 불행한 세상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남자도 행복하진 않은 듯싶다. 이미 서열과 돈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의 줄 세우는 시스템에서, 능력 없는 남자를 인간 취급하지 않고, 못 벌어서 날 싫어하는 여자라는 선입견이 이미 싹틀 테다. 


 성공이라는 가치가 돈과 따르는 사람과 권력, 그리고 더 많은 이성과의 잠자리로 기준된다면 여자에 비해서는 안타깝지만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더 '성공하면 더 많은 여자가 나를 좋아해 줄 거고 그럼 더 많이 잘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편인 듯싶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그 이면에 뭐가 자리하건. 최소한 여자 앞에서 재산을 과시하고 성공하면 돈이 따르고 그런 주입 교육과 군대라는 커뮤니티에선 이미 그 삐뚤어진 단상들이 여전히 득실거리고 있다 하니, 정말 스스로 꺠우치거나 자신의 가치관이 단단하지 못한 이들은 이미 '대접'받지 못하면 무시받으니 남자로서 대접받으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할지 모르겠다. 


 성범죄가 일어나는 패턴 속의 범죄자들의 내면에는 어쩌면 '남자는 여자보다 아무래도 우수해야 하며, 일터에서 과시해서 보상을 받아 돈을 만들어 더 많은 여자들이 나를 따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그들이 노출되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즐기게 되고 마는 음담패설과 포르노와 모의 강간과 온-오프라인 상의 수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 그들은 이미 그런 관계들을 보고 배워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뭐 다들 도찐개찐이며 여자보다 대단하게 잘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하게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으며 나보다 더 잘난, 정말 모든 면에서 잘난 여자와 맞닥뜨리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그 심적 불안함과 콤플렉스는 기어코 사회에서 마주하는 약자들과 그저 '여성'을 향한 분노로 표출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선 당당히 욕하지 못해도 온라인상으론 흔히 '이대녀, 김치녀, 된장녀, 맘충, 등등으로 여자를 혐오한다. 


마음에 구멍이 뚫려도 뚫린 채 살아가본다. 그러다 보면 다시 좋은 것들로 채워질 날을 기대해 보며... 그건 어리석은게 아니라고. 다만 더 용기있는 것이라고..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여자에게 상처를 받든가, 내 여자라고 결국 정복한 
'그 년'은 어느새 성 상대로 전락하는 순간, 데이트 폭력과 가정폭력이 완성된다.
그의 가오는 서고, 대신 한 사람의 인권은 처절히 유린되고 만다.
그게 우리의 또 다른 사회의 현실이다. 알고 고치려 하는 사람만 알게 되는...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1:9의 비중으로 많은 일터에서는 더더군다나 술자리와 옥상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가리 까대는 순간순간들에서도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품평회는 이루어질지 모른다. 내가 속한 이 곳은 덜 한 곳 (이라고 여전히 믿고) 임에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없지는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개 아이 엄마인 나에게도 '50kg 정도 돼 보이는 우수한 몸매'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일을 잘 한다며 칭찬받고 승진받고, 반면 육아휴직 전에 승진 대상자에서 까이고 강제 발령되고도, 나는 여전히 웃으며 불편함을 내 식으로 토로하며 꽤 잘 살아내야 하는 오늘이니까.




 페미니즘이 핫하다. 요즘 더 그런 듯 싶다. 솔직히 나는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기든 아니든 그 타이틀을 달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다만 불공평하고 그지 같은 것은 이상하게 고치고 싶어 진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해하고 고민하며 나의 후 세대인 아이들에게도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다. 


 엉뚱한 상상이나, 소녀시대가, 트와이스가, 레드벨벳이, 방탄소년단이, 비주얼적으로 넘사벽 클래스의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못생기고 뚱뚱해도 노래로 음악으로 승부해서 인기를 얻는 세상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걸까...외모 지상주의와 학력주의, 서열사회가 안타깝지만 여전히 그건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노니는 것들이기에 감히 우주의 모래알만한 내가 이래 말한다고 해서 움직이지도, 해결되지도 않는 악습의 답습은 여전히 있을 거라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아쉽다... 그래서 개개인의 인식이, 선한 연대가 필요한 걸지도 모를테고) 


  이미 전통 여성 캐릭터 설정에서 이미 벗어나도 한창 벗어난 나임에도 이쁘다고 칭찬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감과 호의가 불편하지 않은 데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만약 그 즐거움이 거짓으로 포장된 즐거움이고, 사실은 불편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다. 그 혹은 그녀의 언행과 습관적 행동과 내가 느끼는 것들이 불편하다면 그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닐 테다. 


남자든 여자든 불편하면 표현해야 한다.
다만, 그와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의 온도차가 분명 있다.
그러니 자신의 불편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는 최소한의 노력.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노력과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불편한 상황이나 주변 분위기와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그것을 '배려'라는 가치로 포장하면 이미 표현의 기회는 놓치고 만다. 사실 나도 너무나 그렇게 자란 사람이라 쉽지 않다. 다만 스스로 지랄 맞은 성격이 됨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왜? 불편하면 말하고 늦었더라도 따지고 싶으니까. 때로는 내가 파괴되든 상대가 망가지든, 불편함에 대항할 수 있고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는 잘 버틸 수 있는 깡이 있다면 꽤 의미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 말이다. 그 용기를 내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제일 큰 바람은 그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그게 사람대 사람이 되고 서로 힘든 인생 같이 사는 삶인 걸 테니까. 꼭 누가 누구에게 가격을 매기고 성을 상품화시키는 게 아니라, 누가 누구를 만족시키고 누가 누구에게 매달리는 관계가 아니라, 그저 마음 맞는 두 육체의 즐거움과 마음의 공감과 교류가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사회. 바보 같지만 여전히 나는 그런 연대를, 사회를, 사람들의 시간을... 여전히 꿈꾸고 바란다. 


모든 사랑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일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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