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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11. 2017

#54. 훔쳐보고 싶었나 봐

나보다 더 괜찮은 삶들을. 그러다 보면 나도 좋아질 것 같아서.

 외상으로 인한 수술을 하고 나면 칼자국이라는 게 생긴다. 

메스를 뚫고 갈라진 살에선 선명한 피가 흐를지언정 치료를 위한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자국은 남아도 아무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는 역시 다른 차원의 것인 듯싶다. 아니 분명하다. 분명히 다른 문제다. 아니 어쩌면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이 삶에서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라면 분명 문제다.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정식으로 의학적인 판단을 받진 않았지만 나는 분명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자기분열을 동반해 오는 우울증의 증상이었음을.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시기를 겪어내리면서 나는 마음의 감기인 그것을 받아들였다. 환청이 들렸고 숨도 가끔 쉬어지지 않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가 어느새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 가끔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었다. 


마치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정말 트루먼쇼에 나오는 하나의 연극무대이고
나는 잠시 맡고 싶지 않은 역할극에 빠져 있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이었다. 

 

 어찌어찌해서 꾸역꾸역 지나간 듯싶다. 

절망적인 시간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그 시간들 덕분에 회복탄력성에 대해서, 사람이 어디까지 바닥을 치다가 다시 올라갈 수도 있는지, 마음을 어떻게 객관화하고 조절해 내면 또 다른 나의 새로운 세상도 열릴 수 있다는 것도, 미련 맞지만 스스로 희생(?) 삼아 시범케이스로 그렇게 연습을 해 낸 듯도 싶다. 잠시 지나간다고 믿었고, 다행히도 지나갔다. 그러나 반대로 알게 되었다. 


지키는 건 시간이 한없이 걸려도, 고꾸라지는 건 의외로 쉽다.
붙잡았던 끈을 놓았을 때, 그 한 순간이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은밀하게 나만 아는 감정선을 부여잡고 사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었다. 

아슬아슬하게 지상 1000m 에 올라가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시간들이었고, 다행히 그 시간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슬아슬함과 어딘지 모르게 희미하게 슬픈 기운이 요즘 들어 다시 부쩍 나를 가끔 찾아온다. 그럴 때 반대로 나와 비슷한 위치의 그러나 더 좋아'보이는'삶을 찾아서 이상하게 훔쳐보고 싶어 진다. 그러면 나도 좋아질 것만 같아서, 약간의 용기 혹은 삐뚤어진 자기 아니 대리 만족 혹은 그렇게 보고 있다가 어느새 내 삶도 좀 괜찮아질 것도 같아서... (관음증은 아닌데 뭐랄까 가끔 '궁금'해지는 순간이 정말 찾아온다) 


바라봤는데 다행히도 보고 싶었던 것이 보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덩달아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랄까. 


 일하다가 내키지 않은 순간이 다가와도 그냥 웃고 넘긴다. 아이들이 아프다고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어도 바로 당장 달려가지 못해서 양가 어머님들께 전화를 돌리면서 마음은 이미 초연해진다. 빌어먹을 성격 탓에 청소는 그림같이 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지라 집안일을 깔끔히 해 놓고 매일 아침 출근을 병행한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선명해졌던 때, 쓰기로 결심하고 다시 쓰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요즘, 너무나도 감사한 책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반대로 쓰면서 온갖 감정과 감각의 예민한 날이 나를 찾아오는 지라 필력과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내가 내가 아닌 듯한 캐릭터 설정에 빠져들곤 한다. 


손가락 끝에 뇌와 감정이 달려있는 것 같은 느낌에 의존하며 쓴다.
 마치 다른 사람의 시간인 것처럼 나는 내 삶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다이어리에 채워졌던 해, 수많은 그 이야기들 덕에 지금의 '나'도 있었음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그때의 나를 다시 훔쳐보고 싶어지나보다. 요즘은 좀 더 그렇다..


사실은 말이다. 나는 훔쳐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며 또 가장 동시에 힘들어했을 해, 나는 줄기차게 '나'라는 사람의 시간을 훔쳐보는 듯이 그렇게 여러 형태로 적어 내렸던 것 같다. 내 사람들을 향한 편지로, 나를 향한 일기로. 그렇게 시간들을 채워져 나갔고, 그 덕에 내가 있었고, 반면에 그 알 수 없이 용기 있던 에너지를 다시 얻고 싶어서 나는 타임리 프로 그 시간의 나를 다시 훔쳐내고 싶었나 보다. 


 그때가 가장 사랑한 순간이었을지 모르겠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팠지만 그래서 더 사랑하려고 했던 나였던 듯하다. 사랑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 시간들은 더더욱. 나는 '내 사람'들의 시간은 동시간대에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매번 궁금했었고 지금도 가끔, 아니 종종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대체 불가능한 귀한 글감들도 된다는 건 핑계가 아니라 진짜다. 소설의 반 이상은 그렇게 플롯과 캐릭터와 세계가 구축이 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바보 같지만 생각했으니까.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일상이, 지금이, 어제가, 그리고 내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일상에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기는 한 건지 그 모든 것들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내가 바라보는 그와 그녀의 '지금을 흘러가는 그 장면'에 내가 존재하는지가
나는 항상 궁금했고 또 바랐다. 내가 거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늘 같은 대단한 한파에 손과 발이 더욱 춥다는 핑계로 우울한 감정이 올라오면서 문득 사람이 그립고, 예전에 스치고 지나갔던 수많은 에피소드의 인연들과 그들의 삶이 오늘은 잘 지내는지 훔쳐보고 싶어 졌다. 그러나 훔쳐볼 수가 없다. 시간도 없고, 하물며 시간이 주어졌어도 그렇지 못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미 지나갔고 내 곁엔 남아있지 않으며, 어쩌면 훔쳐보고 싶어 져도 감히 볼 수 없는 곳에 자리하기도 한다. 그걸 바로 '추억'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훔쳐보고 싶을 때 그와 비슷한 추억을 마음에서 잠시 꺼내어 본다.  삶에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되어 주는 추억이 많으면 참 좋겠다만 사실은 만만치가 않은 게 또 삶인지라 때로 그 마이너스 덕분에 겨울이 좀 추워질 때도 있다. 가뜩이나 추웠던 겨울의 추억은 이렇게 엄청 추운 날이면 또 나를 찾아온다. 빌어먹을 그것은 잠들어 있다가 다시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네가 아직 고생을 덜 해 봤구나. 좀 더 굴러봐야 정신 차리지. 그래야 쓸데없는 생각 안 하지. 어서 들어가.


 맞는 말이다. 쓸 데가 없다. 정말. 이런 감정들의 오묘한 조합으로 인한 우울감은 정말 쓸데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감정에는 결론은 없고 정답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나의 가족이 이 시간 문득 내가 시시콜콜하게 내비쳤던 우울감 섞인 문장을 보고 해준 이 말. 내게 해주는 이 웃음기 섞인 농담이 오히려 '힘내'라는 의미 없는 말보다 훨씬 더 와 닿는다. 뭔가 좀 이상하고 일도 잡히지 않고 지루해져 버리려고 마음먹다가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마음 탓에 이상하게 지루해지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를 어둠의 빛처럼 바라봐준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은 분명하다... 물론 바라봐줌이 빛처럼 따뜻하지만도 않은 게 냉혹한 현실이지만 말이다.

 

오늘부터 단 이틀, 잠시 네 식구가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상 속에나 바랐었던 내게 주어진 이 자유(?) 로운 시간이 이상하게 자유롭지 않다. 나를 붙잡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우울한 마음에서 자유롭지 않아서일까. 사실 뭘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지만 사실 뭔갈 하길 바란다는 걸 안다. 읽든 쓰든 만나든 말하든.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릴 나라는 걸 안다. 그러다 보니 더 생각했나 보다. 나와 같은 이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삶을 흘러가고 있는지를 헛되게도 상상해 보다가, 타인들의 삶을 투명망토를 걸쳐서 옆에 다가가 훔쳐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생각을 하지 말자고 결심해 버렸다. 



Be free 


 친애하는 지인께서 해 주신 이 말에 문득 정신이 버쩍 차려졌다. 그리곤 읽다 만 책에 대한 미안한 예의를 차리려 하다가 그것마저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왠지 책을 읽고 또 사색에 잠기다 생각의 문에 갇혀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될 것만 같아서. 


빈틈없이 살아왔던 내가, 빈틈이 생기길 바라는 걸까. 
'빈틈 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사실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그 빈틈들을 얼마나 메꾸고 싶거나 혹은 빈틈을 만들어 내고 싶으면서 살아가는 걸까. 부재중 통화의 그 혹은 그녀는 도대체 어떤 시간을 흘러가고 있길래 전화를 받지 못했던 걸까. 아니 받지 않았던 걸까. 내게 걸려오는 전화를 일부러 컬러링을 들으시라고 잠시 그 음악을 들을 여유를 가지시라고 받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을 바라보고 있는 내 진심이 무안해질 정도로 바로 끊어져 버린 전화를 보고 나는 왜 전화를 걸지 않았을까. 단지 연결이 아니라 훔쳐만 보고 싶은 지독한 악취미의 소유자인 걸까. 나는 그런 걸까. 


 퀘스천이 스스로 생겨지는 의문과 호기심과 상상이 좀 더 자극되는 겨울밤. 난 내게 중얼거려보았다. 중얼거림도, 착각도 그 모든 건 자유니까. 


아직도 왜, 난 왜.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시간들을 다시 꺼내서,
그 시간과 닮은 사람을 찾게 되어 잘 지내는지 훔쳐보고 싶었던 걸까 라고. 


나쁘지 않았으면 해.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도, 지켜봐 주는 것도... 그게 따뜻하고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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