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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13. 2017

#55. 1년 전 상상이 현실이 되던 날

라라랜드의 엔딩크레딧을 보던 날, 추워도 걷고 싶었던 건 왜였을까

재개봉하기를 바랐던 영화를 드디어 봤다. '라라 랜드'였다. 

'충분히 볼 수도 있지 않아'라고 누군가 말했었지만, 내겐 그 '충분'의 여유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발걸음을 떨어뜨릴 수 없는 전통 여성 캐릭터를 장착한 착한 엄마 신드롬에 빠졌던 나였으니까. 인정한다. 여전히 그 캐릭터가 나를 붙잡는 순간이 있다. (이건 본능이겠지. )


"다녀와. 내가 아기들 보고 있을게..." 


난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사이엔 언제나 '들'이 존재하니. 1이라는 단수가 아닌 2라는 복수의 '들' 말이다.


슬픈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었을까.
어리석은 변명에 불과한 그 말은, 여전히 가슴에서 지워낼 수 없었다. 


그 '들'때문이라는 변명은 도대체 언제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혼자서는 쉽게 감내할 수 없는 시간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가령 1인 이서 2인의 연속되는 똥기저귀를 갈아치우며 동시에 우는 아이 앞뒤로 들쳐 메고 흔들어 재워야 겨우 1시간 잘까 말까 한 시간들. 그러니 보고 싶었던 영화를 놓치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기억에서 지워졌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꼭 해봐야지 하고 몰래 일기장에 적어 내렸었다. 

당시 내겐 버킷리스트나 마찬가지인 것들. '라라 랜드'도 그 안에 버젓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아닌 삶으로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지만 마치 죽어가는 듯한 삭막한 시간에서 유일한 일은 상상하는 일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남몰래 적었다. 하나 둘. 그렇게 차곡차곡


쉬미아가 세바스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아쉽게도 그는 그녀의 곁에 함께 하지 못한다.



누구에겐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누구에겐 부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내게 내린 부정이었음을 안다. 나는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의 도리'라는 단어 속에서. 다만 할 수 있는 건 오직,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내리며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이 장면은 언젠가 현실로 그려 낼 거야. 꼭.... 그땐 이 옷을 입어야겠다.


정확히 1년 후, 나는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냈다. 

 1년 전.. 다시는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 않을, (아니 정확히 허리 사이즈 26의 스키니진이 맞지 않을 것 같은 몸과 마음의)  청바지와 백팩을 메고 다시 재개봉한 '라라 랜드'를 보게 될 줄이야. 언제나 삶은 예측하지 못해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두근거리고 설렐 수도 있는 걸까. 마음먹기에 따라서, 움직이기에 따라서.. 





 라라랜드의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니. 몇 번의 검색질과 몇 개의 이미지들은 이미 머리와 가슴에 들어 있었다. 다만 너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부러. 너무 많이 알아버리면 막상 실체를 봤을 때 실망이라는 감정이 더해질까 봐. 기대하고 바랐고 그래서 설레고 두근거리며, 새로운 것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때로는 나를 살아내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것들임을,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걸지 모르겠다.  


꿈을 꾸는 미치광이로 여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이 둘이 그냥 참 좋다. 


몹시도 알고 싶지만 일부러 알려하지 않으려 하는 건 항상 그 때문이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대충 알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선 훌쩍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좀 익숙(?) 해서였을까. 이런 류의 이야기가... 다만 보라색감이 참 예뻐서, 대사를 주고 받는 캐릭터들을 보며 '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이런 몇 가지의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지하철 한 정거장을 그냥 걷기로 했다. 걷고 싶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조금 떨어진 곳이기도 했던 터라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면 정류장에 다다르는 건 금방이겠지만, 그냥 이상하게 걷고 싶었던 건 그 때문일지도..


 한파였고 칼바람이 부는 밤 8시의 길이었다. 귀에는 음악이 흘렀고, 등엔 메고 싶었던 백팩을 메고 있었고, 좋아하는 그녀가 선물해 준 목도리가 내 목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타임특가로 질러 버린 2900원이 무색할 만큼 역할을 충실하게 다 해 준 빨간 장갑이 나와 함께였다. 그러니 나는 혼자 걷는 밤이 아쉽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 사실 아쉬웠다. 참 많이도. 그래서 내내 핸드폰을 쳐다봤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못하는,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행 비행기 안의 그는 오늘의 통화자로서는 일단 아웃. 대신 오늘 나의 '라라 랜드'와의 시간을 예찬해 준 한 사람에게 전화를 무작정 걸다가 나도 모르게 바로 끊어버렸다. 부재중 통화가 남긴 것을 뒤늦게 알아도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만의 막무가내 예측과 더불어, 설령 전화를 한다 해도 내 핸드폰 속 컬러링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는 것. 예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건 음악을 들려주는 것. 나만 알 법한 어이없는 '이유'라는 장치를 만들어 내곤 나는 금세 전화를 끊고 다시 길을 걸었다. 


전화를 할 수 있는 세계에 살아 있다는 것만해도 참 감사하고 다행이겠지. 살아 있으면 결국 괜찮다.. :)  


걸으며 내내 중얼거렸다. 라라 랜드 탓을 돌린다. 그 대사는 어느새 마음에 카피되었다.  


잘 컸네. 혼자서 영화도 볼 줄 알고 이젠.. 
"꿈을 꾸는 그대를 위하여, 상처 입은 가슴을 위하여...."


여주인공인 미아와 남자 주인공인 세바스찬은 말했다. '흘러가 보자'라고... 

달랐던 두 삶이 우연히 만났고, 사랑했지만 결국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영화의 마지막을 달려가는 장면엔 평행선처럼 헤어져서 다시 마주할 것 같지 않던 삶을 산 5년 후의 두 사람이, 결국 미치광이의 꿈을 이루어 내어 둘이 꿈꿨었던 한 장소에서 만난다. 그렇게 다른 연인의 아내가 되어 버린 미아와, 그녀의 꿈을 유일하게 지지해 준 남자였던 세바스찬은 다시 만났다. 


 경쾌하고 오색 알록달록한 색깔의 경쾌함이 주는 재미가 있다고는 하나 나는 반대로 영화가 내게 건네는 무언의 메시지 탓에 이상하게 내내 마음이 저려 왔다. 만나야 할 사람이 결국에 만났는데, 남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채 그렇게 흘러가 보고 있는 두 사람이 좀 아프게 느껴지는 건 나뿐이었을까. 


만났으나, 보고 싶다고 그녀가 그에게, 그가 그녀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픈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역할극을 한다. 지금 사는 이 세계는 거대한 무대에 불과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엔딩 크레디트를 향해 달려가는 거대한 무대 말이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주어지는 삶의 시기에 따라 역은 바뀌고 주어진 배역에 사람들은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 충실함을 위해 때때로 자기검열을 하며 자신의 욕망과 마음을 억지로 추슬러낸다. 


 스스로 만들어 낸 역을 참 멋지게 해내고 싶다 보니 의도하지 않은 역할에 마주하게 되면 잠시 머뭇거리다가 깨지고 부딪히고 결국 무대에서 아웃되고 말 것 같은 아슬아슬한 경험들을 해내기도 한다. 20대의 후반과 30대의 들어섬에 결혼과 출산이라는 이벤트가 내 무대의 결말이 아닐 텐데 나는 마치 결말인 것 마냥 살아온 탓에 역할의 아픔과 후유증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스스로 잔인해져 갔고 스스로 생채기를 냈고 스스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억지로 숨기며 살았다. 

 그가 날 보기엔 겉보기엔 거침없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대함에 모든 걸 검열해 나가며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을 혼자 견뎌내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남의 연극 혹은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요즘 시간들이 유독 그렇다. 내 삶이라는 1인극의 단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여러 사람들 속에 보이지 않는 관객의 느낌에 잠깐씩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다시 되돌아온다. 사실 그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가 단 한 사람이 되어 우뚝 서게 된다. 


마음에 음악이 흘러서, 한 건반을 누르는 순간, 기적도 마법도 시작되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거야.


단 한 걸음, 그 단 한걸음만 올라가면 주인공이 된다.
 한걸음만 움직이면 된다. 앞으로 단 한걸음... 그게 아쉽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알고 있었으나 동시에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사랑하는 마음에 동시에 가장 비겁했고 두려웠던 마음이 있었을 테니. 함께 하면 더 이상 그 미치광이 같아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은 그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설정 장치가 마음에 녹아들었을 테고. 그렇게 또 다른 역할극을 해 나가며 흘러가 보다가 둘은 결국 꿈을 이뤄냈다. 그런데 그 이룬 꿈이 그렇게 썩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역시 평행선처럼 서로 각자 다시 흘러가 보게 된, 고작 상상 속에서나 그 둘은 함께였기에. 


그래도 괜찮다. 뭐. 상상이라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 둘의 흘러감이 그렇게 많이 불행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한 정거장을 걸어가는 내내 나는 정말 결혼을 상상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던 한 사람과, 비행기에서 내려서 당장 나와 우리 집에 달려올 것을 아는 보고 싶은 나의 한 사람과, 더불어 나의 라라 랜드와 유일하게 나의 글쓰기를 조용히 예찬해 주고 있을 것만 같은 그와 그녀를 생각하며 걸었다. 


어둠이 시작되려는 밤의 보라색이 참 잘 어울리는 장면은, 내 삶에도 다시 재생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내내 걸어보았어..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마음에서 이미 알고 있던 그 대사를 믿고 나는 오늘도 그냥 흘러가 본다. 

역시 예측하지 못하는 흐름이 있어서, 그게 유난히 고마운 오늘이다.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건넨 나의 선물들이 내게 다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신이 선물한 기적 같은 오늘 아침을 맞이했기에. 


 혼자가 된 지 삼일째인 오늘 아침 일곱 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지나갔다. 그 시간을 알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예상치 못하게 받아버린 '카보 마일' 티 한잔의 응원으로 시작했으니. 


여러 역할극을 꽤 잘 이루어 내고 있는, 아니 사실 단 하나의 정말 원하는 역할극을 이제 겨우 찾아서 조금씩 느리지만 해 나가고 있는 나의 오늘 이 흐름이 아쉽지 않고 기대가 되는 건 그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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